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진정성

윤대녕, 「대설주의보」, 『대설주의보』, 파주: 문학동네.

by 노창희

윤대녕의 소설을 평가하는 그 무수한 문장 중에 나는 저 문장보다 폐부를 찌르는 문장을 알지 못한다.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만날 수도 완전히 헤어질 수도 없다는 것을 나는 그의 소설에서 배웠다(『대설주의보』 해설, 신형철, 「은어에서 제비까지, 그리고 그 이후」).” 김형중이 지적했던 것과 같이 윤대녕은 어느 순간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접근보다는 삶 그 자체에 집중한다. 신형철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시스템과의 낭만적 긴장 대신 ‘생’이라는 불가항력이 소설을 이끈다(285쪽).”


윤수와 해란 인연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윤대녕 소설의 대부분이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얘기지만 「대설주의보」처럼 여러 차례 만남과 해후가 잦은 소설은 드물다. 내가 만남과 이별이라고 적지 않고 만남과 해후라고 적은 것은 윤수와 해란은 한 번 결정적으로 이별하고 여러 차례 우연히 다시 해후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랫동안 “늘 그리워하지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101쪽)”가 된다.


「대설주의보」는 윤대녕 소설 중에 드물게 헤피엔딩이다. 서로가 정말로 필요할 때마다 결정적인 만남을 갖고는 거리를 두던 윤수와 해란이 다시 만날 것임을 암시하는 이 결말에 대해 한동안 나는 수긍하지 못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백담사 입구에서 윤수와 해란이 조우하는 장면은 윤대녕 소설에서 일상에 부여할 수 있는 구원의 극대치이다.


이번 주 월요일이었던 1월 6일은 소한이었다. 절기를 마주할 때면 때때로 윤대녕의 소설이 떠오른다. 절기를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는 삶이라는 일상적 순환을 제의적으로 만들고 그 제의는 성과 속의 절묘한 절충지대를 만든다. 그 절충지점에서 작은 구원이 온다. 그의 최근작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에는 구원의 기미가 전혀 없다. 그는 시대와 함께 자기 자신에게마저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다음 작품에서는 구원이 담긴 윤대녕의 소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이제야 완전히 만날 수도 완전히 헤어질 수도 없는 남자와 여자가 결국에는 만나고야 마는 「대설주의보」의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 것이 진정성이라는 것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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