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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희 Feb 22. 2020

역사의 침묵을 파고드는 서사

우민호 <남산의 부장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서사들에 독자 혹은 관객이 궁금해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정확히 얘기하면 내가 궁금해하는 것이 다음의 두 가지다). 첫 번째 이 서사는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하는 부분이다. 두 번째 이 서사는 실재했던 인물의 내면에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매체가 갖는 특성상 소설은 내면에 개입할 수 있는 폭이 크다. 내가 읽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룬 소설 중 실재했던 인물의 내면을 가장 매력적으로 그려낸 작품을 두 개 뽑자면 김훈의 『칼의 노래』와 조선희의 『세 여자』다. 『칼의 노래』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 중 하나인 이순신이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다시 구축해 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마도 김훈의 내면이 고스란히 투영되었을 1인칭의 이순신에 대해 『칼의 노래』는 칼이라는 외관에 내면이라는 속을 채워서 이순신이라는 소설적 인물을 창조해 냈다. 『세 여자』는 상대적으로 참조할 자료가 부족했을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라는 세 여성을 소설 속에서 살아 있는 캐릭터로 형상화 해 낸다.       


김재규는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의 선택은 많은 것을 바꾸어 버렸고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라는 것은 영원히 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설령, <남산의 부장들>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미국의 개입 때문에 김재규가 그런 결정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내면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물론,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박정희를 죽이는 선택을 했다고 밝혔지만 그의 그런 주장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민호 감독은 <남산의 부장들>에서 등장 인물들에게 실재와는 다른 이름으로 극화한 것에 대해 서사의 자율성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얘기한다(우민호 감독이 서사의 자율성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아니다. 맥락적으로 서사와 실재 역사는 구분된다는 취지로 필자가 편의상 서사의 자율성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다). 그래서 김재규는 김규평(이병헌 분), 김형욱은 박용각(곽도원 분), 차지철은 곽상천(이희준 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산의 부장들>은 실재 역사와 선택을 대부분 존중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10. 26을 다룬 <그때 그 사람들>이나 <제5 공화국> 같은 작품들과 <남산의 부장들>이 갈라지는 지점은 박용각으로 등장하는 김형욱의 얘기를 중심으로 서사를 끌고 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작품들과 다른 고민거리 하나를 더 보태준다. 10. 26을 다룬 다른 작품들은 차지철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을까 혹은 미국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을까 아니면 본인이 얘기한 것과 같이 민주주의라는 대의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을까를 고민하게 만든다. <남산의 부장들>은 여기에 더해 과연 2인자 혹은 3인자로서 나는 충성의 대가를 어떻게 보답받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고민거리를 던진다. 박용각은 김규평이 처할 미래의 모습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김규평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침묵하는 방식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이미 지나간 역사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 이것을 다루는 서사는 그 침묵을 파고들어야 서사가 된다. <남산의 부장들>은 그 침묵을 파고 들되, 김재규의 선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할 뿐 결정적인 원인이 무엇이다 라고 말해 주지는 않는다. 김재규의 내면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그의 결정이 단일한 원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뿐이다.     


이병헌, 곽도원, 이성민은 그들의 이름이 주는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연기를 펼친다. 우민호 감독은 이제 그가 연출한 영화라면 믿고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한 감독이 된 것 같다. 역사를 다루는 서사는 역사의 침묵을 파고든다. 이 시도는 역사를 환기시켜 준다는 측면에서도 의미를 갖지만 새로운 서사가 탄생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김규평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김재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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