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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희 Feb 25. 2020

스펙타클이 된 이미지는 인간을 소외시키는가?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고 여기서 의미하는 스펙터클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스펙타클은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된 자본이다(34쪽).” 이 문장이 개념적 정의가 되기 어려운 것은 “고도로 축적되어”라는 행위가 갖는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 드보르가 처음으로 『스펙타클의 사회』를 출간한 1967년과 2020년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으며 그동안 미디어 환경은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 20세기에 미디어에서 산출되는 스펙타클이 소수의 전문가가 자본, 경우에 따라서는 일부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만들어 낸 것이었다면 지금은 그 누구나 스펙타클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구분해야 할 것은 단순한 이미지와 스펙타클의 차이일 것이다. 여기서 이미지와 스펙타클의 차이는 고도로 축적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차이가 된다. 하지만 그 차이를 규명해 내기는 역시 어렵다.       

이미지와 동영상이 196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적으로 침투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상황에서 스펙타클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과거와 어떻게 다를까? 긍정적으로 보면 누구나 이미지와 동영상을 생산하여 유통시키는 것이 가능한 미디어 환경에서 우리는 과거에 비해 스펙타클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 드보르가 우려하는 것처럼 스펙타클에 마냥 속는 존재라고 인간을 규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정적으로 보면 우리는 스펙타클에 전방위적으로 노출된 존재이다. 아주 비관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스펙타클에 의해 소외될 수도 있다. SNS에 우리가 공유하는 이미지들은 참된 나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펙타클로 편집하여 널리 공유하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갈구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스펙타클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경계를 소멸시킨다. 자아는 세계의 현전-부재로 에워싸여 진압된다. 또한 스펙타클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소멸시킨다. 가상의 조직이 믿게 하는 허위의 실질적인 현전 아래 경험된 모든 진리가 억압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자신과 소원해진 운명을 수동적으로 매일 감내야 하는 사람은 마법적인 기술에 도움을 청하면서 이 운명에 눈속임으로 반응하는 광기를 향해 내몰린다. 상품의 수용과 소비가 반박할 수 없는 소통에 대한 가장된 반박의 중심에 있다. 소비지가 느끼는 모방의 욕구는 바로 자신을 철저하게 박탈하는 모든 측면에 의해 조건 지어진 유아적인 욕구이다(212쪽).”     


기 드보르의 말처럼 소비자가 느끼는 모방의 욕구 자체가 자신을 철저하게 박탈하는 것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스펙타클의 넘쳐나는 과잉 스펙타클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며, 그렇기 때문에 스펙타클에 대한 기 드보르의 말은 여전히 귀담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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