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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희 Feb 27. 2020

신화가 될 수 있는 계몽의 위험, 그 차이와 반복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로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철학적 단상』.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공저한『계몽의 변증법: 철학적 단상』에 대해 얘기를 꺼내고자 한다면 과연 이 우울한 책이 현재에도 의미를 갖는지부터 물어야겠다. 이들은 어째서 인류가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섰다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12쪽)”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20세기 야만 상태의 좌절감 속에서 이 책을 저술했다면 당연히 현재에도 이 책이 갖는 의미는 유용하다. 21세기 인류는 20세기와는 다른 종류의 야만 상태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7년에 초판이 출판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야만은 지금의 야만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자연을 인간이 지배하면서 계몽을 꿈꾸던 인류는 이성을 도구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부정적으로 사유할 힘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 『계몽의 변증법』의 핵심적인 내용 중 하나이다. 계몽을 통해 신화를 탈피한 인류는 도구적 이성이라는 또 다른 신화로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70년 전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여전히 인류는 또 다른 신화에 빠져들 수 있다. 가령, 인류의 미래처럼 여겨지는 인공지능과 데이터 기반 경제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20세기에 경계했던 자본주의와 기술의 발달이 야기한 도구적 이성에 대한 맹신과 비슷한 신화가 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한다.


미디어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문화 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은 이 책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읽어 온 글이다. 10여년전 콘텐츠의 디지털 유통과 소비가 보편화되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위의 글에서 우려한 문화산업의 동질화 경향이 심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 우려는 사실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콘텐츠의 종류가 다양해 진 것은 물론이고, 넷플릭스와 같은 디지털 플랫폼에서 조차 비평적으로 가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용자가 미디어를 통해 적극적으로 의사표현 하는 것이 가능해진 환경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우려 하였던 대중 기만의 위험은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용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만 취사선택해서 접할 수 있는 환경에 갈수록 익숙해 지고 있다. 필터 버블이나 확증편향과 같은 단어는 몇 년이 지나면 너무 당연히 한 것이 되어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70여년 전과는 다른 형태의 대중 기만은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 환경 변화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우려 했던 문화산업의 부작용은 상당 부분 불식되었다는 취지의 글을 최근에 쓴 적이 있다(「스트리밍 시대 비평적 가치가 갖는 의미 」, 『아주경제』, https://www.ajunews.com/view/20200213113206155). 이 글은 긍정적 가능성을 얘기한 것이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과거에 우리에게 얘기했던 사유 자체가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는 취지로 쓰여 진 것이 아니었다. 


“현대적 야만에 의해 디아스포라를 강요당한(노명우. 『계몽의 변증법: 야만으로 후퇴하는 현대』, 57쪽)” 이들이 쓴 이 우울한 책은 비판받을 소지는 있겠으나 그 의미가 퇴색되기는 어려운 책이다. 특정 시대가 가지고 있는 모순이 야만의 형태로 드러날 가능성은 언제나 있으며 부정적 계몽의 시대가 다시 신화화될 위험은 상존하기 때문이다. 신화가 될 계몽의 위험은 시대에 따라 반복될 수도 있고,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계몽의 변증법』은 오래된 책이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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