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빛이 미래의 빛이 될 수 있도록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by 노창희

학부 시절 좋아하던 강사 선생님 몇 분이 있었다. 전공과 학교가 달라진 영향도 있겠지만 당시 숙기 없었던 나는 연락을 하고 지내는 선생님이 없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고 생각난 선생님이 한 분 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주인공 희원 보다 철이 없었도 한참 없었지만 국내에서 학위를 한 박사가 학교에서 자리 잡기가 얼마나 힘든 지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여성이었고, 학점이 나빴던 나는 4학년 계절학기에 그의 수업을 처음 들었다. 아마도 종강파티에서 들었던 얘기였던 것 같은데, 그는 교수 임용을 거의 체념한 것처럼 얘기했다. 그리고 영어와는 상관없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체념조로 말했다. 나는 마음이 좀 아팠고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그의 안부가 궁금해서 가끔씩 검색해 보곤 했는데, 10여년 전에 최근에 쓴 논문이 검색되지 않아 결국은 학계를 떠나 다른 일을 하고 계시겠거니 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고 검색해 보니 교양학부이기는 해도 모교에 전임 교수를 임용되어 계셨다. 정말 기뻤다. 전공이신 셰익스피어 관련 논문도 꾸준히 발표하고 계신 것 같다. 아마도 10여년 전 내 기억이 왜곡되어 있거나 검색을 제대로 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배음으로 깔려 있는 것은 용산 참사다. 용산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희원이 자신의 의견을 능동적으로 얘기하지 못해 죄책감을 느끼는 사건이고 희원이 빛이 되어 주기를 바랐던 그녀와 공유하는 공동의 공간이기도 하다. 용산 참사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 배음으로 기능하는 것은 용산 참사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폐허가 있기 때문이다. 희원은 자신의 삶이 용산 참사처럼 아무것도 없는 폐허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희원이 그녀를 존경하게 된 것은 생리 때문에 고생하던 희원을 그녀가 흔쾌히 도와주고 난 이후 그녀가 쓴 에세이를 읽고 난 후이다. 은행에 다니다가 학사 편입을 한 희원이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하자 그녀는 난감함을 감추지 못한다. 최은영 소설에서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는 가까웠던 관계에 균열에 생기는 지점이다. 그녀는 희원이 여성 연구자로서 감당해야 할 삶을 우려했기 때문에 희원이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난감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희원은 결국 대학원에 진학하고 그녀처럼 되고 싶어한다. 부당한 일에는 당당히 맞서면서도 힘든 일이 발생했을 때 구조적인 한계 탓을 하지 않았던 그녀를. 하지만 10년 지난 후 희원은 그녀의 흔적을 찾을 없게 되어 버렸다. 아마도 그녀는 꿈을 포기하고 학계를 떠났으리라.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쫓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서 보고 싶었다. 그 빛 사라진 후, 나는 아직 더듬거리며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어림해보곤 한다(86-87쪽).”


그녀가 사라져 버려 실의에 빠진 희원은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 용산 참사로 공터가 된 자리를 이제는 피하지 않는다. 학생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 들이면서 이제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과거에 빛을 던져 주었던 그녀를 기억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어느 날 퇴근하던 길, 나는 그녀를 마음속으로 부르고 긴 숨을 내쉬었다. 나의 숨은 흰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서 흩어졌다. 나는 그 때 내가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겨울은 사람의 숨이 눈으로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언젠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며 긴 숨을 내쉬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보일 것처럼 떠올랐다. 그 모습이 흩어지지 않도록 어둠 속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87쪽).” 과거의 빛이 미래의 빛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일. 그것 외에는 도리가 없는 시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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