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창희 Oct 06. 2019

질서를 시험하기 위한 악과 악이 될 수 없는 악

<다크나이트>의 조커와 <조커>의 조커가 다른 이유

질서를 위협하는 카오스로서의 조커     


‘조커’라는 캐릭터는 지난 10년간 히스 레저의 조커였다. 이 조커는 이전의 조커들과 다른가? 물론 그렇다. 슈퍼히어로 장르는 필연적으로 영웅과 대극에 놓여 있는 악당을 필요로 한다. 영웅은 선이며, 악당은 악이다. 고전적인 슈퍼히어로 장르의 영화들은 선이 악을 극복하고 물리치는 권선징악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이 고전적인 서사의 구조는 변하지 않고 유지되지 있다. 그럼 <다크 나이트>에 등장하는 조커는 왜 이전의 조커와는 다른가? 그것은 그의 적인 배트맨의 성격 변화와 관련이 있다.      



이동진이 지적한 것처럼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에서는 “9.11 이후 미국이 겪는 무력감과 자성(「다크 나이트」(32쪽),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고양: 위즈덤하우스 )”이 느껴진다. 전 세계의 질서를 지키는 경찰로서의 미국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앉고 자신들도 자신이 그러한 역할을 하는 유일한 존재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배트맨이 고담시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투사할 수 있다. 또한, 그 자신이 정의의 이름으로 수행해온 활동들 때문에 발생하는 부작용과 정의라는 명분으로 행해지는 자신의 활동이 분명한 위법성을 지니고 있다는 딜레마는 배트맨이라는 존재가 과연 선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배트맨 자신과 관객 모두에게 해당되는데 이 질문 자체가 이전의 <배트맨> 시리즈를 포함한 슈퍼 히어로물들에서는 찾기 어렵던 질문이었다.     

 

그럼 조커는 왜 다른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와 다른가? 그는 배트맨의 적이 아니라 질서를 반대하는 자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니까 조커는 배트맨은 정의로운 존재인가를 시험하기 위한 악이라는 것이다. 즉, 배트맨이라는 존재가 대변하는 질서라는 가치 맞은 편에 놓인 무질서를 대변하는 존재가 바로 히스레저가 연기한 조커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성찰이 없다. 다만,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질서를 대면하고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그의 행위는 거의 유희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대사 “왜 그렇게 심각해(Why So Serious?)”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조커가 시민과 범죄자들에게 죄수의 딜레마적 상황을 제시했을 때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선택을 하지 못하는 윤리적 결단을 보고 당황하는 것도 그가 자신의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행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히스 레저의 매력적인 연기는 이 영화가 던지는 무거운 딜레마가 제기하는 모순을 관객으로 하여금 성찰하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히스 레저의 연기가 대단한 것은 가장 기능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캐릭터를 가장 생동감 있게 연기해 냈다는 것이다.      


악이 되기에는 너무도 약한 자 조커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우리가 배트맨과 관련하여 잊기 쉬운 사실 하나를 강력하게 환기해 준다. 부르스 웨인의 아버지 토마스 웨인이 엄청난 부자라는 것이다. 물론,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국한된 서사라고 볼 수도 있으나 지젝은 웨인이 엄청난 부자라는 사실과 더불어 “무기상과 투기꾼(312쪽)”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꼬집는다(『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박준형 역, 서울: 문학사상).      



<조커>에서 아서 플렉이 죽이는 토마스 웨인의 직원들이 월 스트리트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설정은 지젝이 제기하는 문제제기와 맞닿아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일가가 돈을 번 방식을 성찰하고 슈퍼히어로가 된 아이언맨을 떠올리게 된다. 배트맨 시리즈에서 배트맨이 정의의 수호자가 된 것은 자신의 부모가 공권력의 공백으로 부당하게 살해된 것이 계기로 작용한다. 하지만 <조커>에서는 사회적 양극화를 방조 혹은 심화시킨 것에 대한 보복으로 부르스 웨인이 살해된 것으로 묘사한다.         


자신을 괴롭히던 토마스 웨인의 직원들을 살해한 아서를 범죄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악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는 오히려 기존의 사회에서 배제된 자에 가깝다. 정신 질환자인 어머니의 학대로 인해 자신도 정신질환을 겪게 되는 아서는 어머니로부터 웃을 것을 강요받는다(아서의 출생과 어머니의 정신실환과 관련된 부분은 이 영화에서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는다).     


아서 역시도 성찰하지 않는다. 인생의 결정적인 변곡점에서 비극인 줄 알았던 자신의 인생이 알고보니 코미디어 였다고 탄식할 뿐이다. 그는 내면이 없기 때문에 성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찰할 만한 조그마한 여유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성찰할 수 없는 약한자이다.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그는 잠깐 영웅으로 추앙을 받지만 결국 범죄자로 전락한다.      


슈퍼히어로에 등장하는 악의 공통점은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조커>의 아서는 악으로 기능할 수 없는 악이다. 그는 사회에서 배제되어 범죄자로 전락한 약한 존재일 뿐이다.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하는 조커는 그렇기 때문에 악이 될 수 없다. 관객들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를 보며 아서가 느끼는 불안과 절망에 공감하게 된다.        


영화 <조커>로 인해 우리는 매력적인 조커 캐릭터 하나를 더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히스 레저의 조커와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의 우위를 비교하는 일은 그다지 유익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미학적 가치 판단의 문제라기보다는 취향의 문제에 가깝게 느껴진다. 다만, 코믹스를 기반으로 한 영화가 왜 문학에 가깝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궁금증은 남는다. 더욱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이 영화가 비평의 영역을 넘어서 대중적인 성공까지 거두고 있는가 하는 부분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토드 필립스가 연출하고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는 장르적 관성이 반드시 흥행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