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중.「상속」
가지고 있는 책을 처분해야 할 사정이 있어 친할 뿐 아니라 나이도 한참 어려서 아직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 소설가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 책 중 상당 부분은 둘이 같이 수강했던 글쓰기 수업의 선생님이 준 책이다. 여기까지는 범상해 보인다. 그런데 책을 넘겨야 하는 사정이 시한부 판정 때문이라면. 그리고 책의 상당수를 주었던 선생이 책을 처분해야 하는 사람보다 20살 넘게 어린 요절한 작가였다면.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이 소설의 제목은 ‘상속’이 된다.
삶은 어떤 면에서 타인이 남긴 유산으로 이뤄진다. 우리는 우리가 알게 된 모든 사람과 생의 마지막까지 인연을 맺고 살지는 않는다. 특정 시기에 만나 인연을 맺었지만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사람이 있다면 분명 그 인연이 남긴 유산이 있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기주와 진영은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여름에 연을 맺었다. 그들은 선생의 창작 수업을 들을 때를 인생의 화양연화처럼 기억하고 있다. 물론, 이미 지나간 시기이기에 더욱 찬란한 빛을 뿜고 있는 것이리라. 기주와 진영은 그 여름이 남긴 유산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유산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남기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설정이 다소 작위적이지만 문장이 좋아서 읽다 보면 작위적인 설정 따위는 무시하고 푹 빠져들게 되는 소설이다. 좋아하는 작가이긴 하지만 김성중의 문장이 이렇게 좋았나 싶기도 했다. “인간은 원치 않는 모순에 붙들린 채 살아간다(170쪽).” 그렇다면 원치 않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글을 쓰면서 이 모순을 극복해 나간다. 물론, 작가가 아닌 모든 인간이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살아간다. 그 문제는 간단치 않고, 이 소설은 그 간단치 않음에 관한 소설이다.
“소설은 일종의 번역입니다. 나의 인식이 더해진 세계에 대한 번역(175쪽).” 소설 쓰기만이 이러한 행위는 아닐 것이고, 각자의 생업에는 모두 이러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생업 뿐 아니라 살면서 하게 되는 많은 행위는 세계에 대한 ‘나’의 번역이 투영된다. 이 번역은 매번 성공하는가? 혹은 가능한가? 그렇다면 이 소설이 탄생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힘든데 고통이 글자로 변하지 않아서 화가 나요(164쪽).” 이 문장을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힘들게 사는데 왜 삶에서 의미를 찾기는 어려운 걸까?” 정답은 없는 문제이고 이러한 고민 자체가 ‘삶’이라는 생각도 든다.
처연하게 아름다운 소설이다. 내게는 한해를 마감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다고 2017년에 쓴 적이 있다. 이 글은 그 글에 사족을 조금 붙이는 것이다. 『애디 혹은 애슐리』에 「상속」에 실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워지면서 인연이라는 것에 대해 오히려 다시 생각하게 계기가 되는 것 같다. 아직 두 달여가 남았지만 결코 좋은 기억으로만 남을 리 없는 2020년도 그 생애를 다해 가고 있다. 2020년이 내게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 2020년을 우리는 각자 어떠한 방식으로 번역하여 유산으로 남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