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스러운 고민 그러나 결정적 문제 왜 살아야 하는가?

시바타 쇼. 『그래도 우리의 나날』.

by 노창희

20대는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어떤 청춘은 그 의미란 것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삶의 의미를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당한다. 일본과 한국과 같이 외적으로 시대적 격변기를 겪은 국가들에 살았던 청춘들은 이에 해당한다. 소네와 사노 사이의 갈등은 치기 어린 다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청춘들에게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소모적인 갈등으로 다치기 쉬운 어른들은 모른 척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는 계속 되물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이 소설에 대해 물으면 근래에는 만나기가 불가능한 아름다운 서간체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영찬(『문학이 하는 일』)의 말을 빌려서 다시 내식으로 비틀면 소설은 다른 미디어와 세상에 오염된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대에 서간체 소설은 쓰이기 어렵다. 쓰이더라도 타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이 소설에서 결정적인 것은 사노의 편지와 세쓰코의 편지다. 그 두 통의 편지에는 한 청춘이 어떻게 삶의 전환점을 맡게 되는지가 처절하게 기록되어 있다.


공산주의 투쟁에 가담했던 적이 있던 50년대 일본의 청춘들을 다루고 있는 『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격렬했던 투쟁의 날들이 저문 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 관한 얘기다. 다분히 현실 타협적 인물로 보이는 후미오는 투쟁을 함께 했던 사노의 죽음을 알고 힘들어하는 세쓰코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약혼했던 그들은 세쓰코의 실존적 고민으로 인해 결혼에 이르지는 못한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응원하고 싶은 인물은 세쓰코다. 미안하지만 후미오는 속물이다. 그는 삶과 직접 마주하고자 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세쓰코를 필요한 존재로 자각하게 된 것은 그녀가 없는 삶을 상상하는 시점부터이다. 즉, 그는 내적으로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인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노세는 비교적 손쉽게 사회와 타협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를 이해할 만큼 이 이 소설에서 노세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 사노는 너무 예민한 인물이고, 자신에게 엄격한 인물이다. 안쓰럽고 안타깝다.

세쓰코의 마지막 결단은 자신의 삶에 대한 예의를 지킨 것이다. 대다수의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 우리가 예의를 지키는 대상은 보통 사회적 압력과 관습이다. 그렇게 해서는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세쓰코는 어떻게 늙어갔을까? 다음의 아름다운 문단을 옮기는 것으로 마친다. 아마 다음 문단의 생명력은 영원할 것 같다.


“머잖아 우리가 정말로 늙었을 때, 젊은 사람들이 물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젊은 시절은 어땠냐고. 그때 우리는 대답할 것이다. 우리 때에도 똑같은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어려움이기는 하겠지만,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려움에 익숙해지며 이렇게 늙어왔다. 하지만 우리 중에도 시대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로 용감하게 진출하고자 한 사람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 답을 들은 젊은이 중 누구든 옛날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데, 지금 우리도 그런 용기를 갖자고 생각한다면 거기까지 늙어간 우리의 삶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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