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시선으로부터,』
정세랑이라는 작가를 안 지는 꽤 오래됐다. 판타지로 데뷔해서 문단으로부터 차별을 받았다는 얘기를 팟캐스트를 듣다가 알게 되었고, 응원하는 마음이 생겼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고는 이런 소설을 쓰시는 분이구나, 이런 소설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다. 나는 판타지를 좋아하지 않지만 판타지라는 장르도 꾸준히 생산되고 대중적인 인기는 물론 비평적으로도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문단과 출판계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아마 2020년 한국문학은 정세랑의 해가 아니었을까 싶다. 평단에서의 관심과 평가는 여전히 황정은 쪽이 우세한 것처럼 보이지만, 대중적인 관심과 평단의 평가 두 가지 모두 넘치게 받았던 것은 정세랑 쪽이 아닌가 싶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표현을 빌리면 당대 최고의 문화적 우세종이라고 할 수 있는 넷플릭스에서 <보건교사 안은영>이 크게 성공을 거둔 것도 정세랑의 크나큰 성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세랑이 원작자로서의 역할은 물론 극본까지 참여했다는 점에서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정세랑이 가지는 지분이 무척 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시선으로부터,』는 텍스트 내부와 외부를 함께 생각하지 않기 어려운 소설이다. 이 글의 시작을 정세랑이 문단으로부터 차별을 받았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시선으로부터,』는 판타지 작가로서의 정세랑의 정체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젠더를 가지고 있는 작가 정세랑이 놓여 있는 사회적 위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작가의 말」, 334쪽).”
『시선으로부터,』는 자신의 의지와 주변의 도움으로 나름대로 성공적인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온 심시선과 그의 자손들에 관한 서사다. 정세랑은 심시선이라는 이름을 할머니의 이름에서 한 글자 바꾼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시선으로부터라는 제목은 다분히 중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가지고 있다. 심시선의 자손들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시선’으로부터 출발하는 서사라는 것이 제목이 함의하는 첫 번째 의미일 것이다. 두 번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감내할 수밖에 없는 폭력과 고정관념이 ‘시선’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것은 아닐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시선으로부터,』는 제사와 같은 구태를 극복하며 살아온 심시선의 제사를 일가친척이 모여 하와이에서 지내자고 장녀 명혜가 제안하면서부터 시작한다. 심시선의 가계도로부터 시작되는 『시선으로부터,』는 수직적으로 뻗어가는 서사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확장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즉, 연대기적으로 사건이 진행된다기보다는 사이사이에 배치된 심시선의 글과 심시선의 일생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심시선의 자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각각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331쪽).” 자칫 지나치게 무거울 수도 있는 소설을 유머로 이끌고 가는 작가의 솜씨는 독자가 부담을 갖지 않고 책장을 넘길 수 있게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으로부터,』는 우리에게 만만치 않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무엇보다 심시선과 그의 후손들이 감당해야 했던 폭력들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 『시선으로부터,』는 그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무겁지 않고 유쾌한 방식으로 우리를 설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