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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희 Nov 24. 2020

영화가 재현하는 랜드스케이프의 의미

허문영.「랜드스케이프를 잃고」.『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영화란 무엇인가? 새삼스럽게 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더 이상 극장에서 개봉하는 것이라는 확정적인 전제만으로는 영화란 무엇인가를 논할 수 없다. 넷플릭스 때문이기는 하지만 넷플릭스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영화가 반드시 극장에서 처음 개봉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니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코로나 때문이기는 하지만 코로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이었다.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개봉되어야 하는가? 영화가 유통되는 창구가 다양해 졌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영화란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언제나 필요하다. 특히, 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 자신에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생각보다 중요할 수 있다. 영화는 직접적으로든 혹은 무의식적으로든 시대를 재현하려하고 우리의 심상 어딘가에는 영화에서 영향을 받은 심상이 시대에 대한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음악이 추억을 회고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한 메커니즘일 수도 있지만 영화 쪽이 조금은 더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허문영은 영화와 관련된 기억의 근원을 서부극에서 찾는다. “하지만 내가 그리워하는 건 정확히 말하면 필름이라는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20세기의 세계 자체가 아니라, 필름에 새겨진 어떤 형식이거나 이미지들이다. 사라져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감되는 것은 그 형식 혹은 그 이미지들이다. 내게 그건 어쩔 수 없이 서부극과 연관되어 있다. 그중에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서부극의 서부라는 랜드스케이프이다(19쪽).”     


영화 비평가인 허문영이 영화에 관한 최초의 심상을 떠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겠지만 나 역시 영화에 대한 근원적 심상이 있다. 그것은 80년대 홍콩 느와르의 세계이다. 내게 각인되어 있는 홍콩 느와르의 이미지는 비장미라는 아우라이다. 또한, 허세의 세계이기도 하다. 또한, 본토로의 반환을 앞둔 세기말적 분위기 역시 홍콩 느와르가 만들어내는 정조에 기여했을 것이다.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그 정조를 허문영을 빌려 홍콩 느와르의 랜드스케이프라고 말해 볼 수 있을까?     


세기말 하면 떠오르는 영화는 이상하게도 장윤현 감독의 <접속>이다. <접속>에서 느껴지는 우울과 낭만을 지금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만 같다. “우리는 세속적 인간으로서 그리고 후기산업사회의 거대 미디어에 노출된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미디어에 반영된 테크놀로지의 영향 아래 영화를 본다(22쪽).”나는 서울에서만 살았고 앞으로도 서울에 살고 싶지만 <접속>에서 재현된 서울에서는 살 수 없다. <접속>의 서울 역시 나에게는 잃어버린 랜드스케이프이다.      


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은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20년대의 랜드스케이프는 대체 무엇으로 기억될까 하는 심정에서였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매체와 관련된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를 제작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영화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를 통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이다. “중요한 것은 사라지거나 숨은 사건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가 지속된다는 것이다(28쪽).”2020년은 재난의 이미지만으로 남을까? 왠지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 언젠가는 상실될 랜드스케이프가 될 것이 분명한 2020년 역시 부정되어야 할 시기만은 아닐 것이다. 타자는 계속 지속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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