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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희 Dec 15. 2020

나의 시간 타인의 시간 그리고 사라진 시간

정진영 연출. <사라진 시간>.

시간만큼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개념은 드물다. 기준이 명확하다는 면에서 시간만큼 객관적인 개념은 찾기 어렵다. 문제는 지나간 시간이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관념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지나간 시간을 헤아릴 때 시간이라는 개념은 기억과 더욱 유사한 단어가 된다. 은희경의 『빛의 과거』는 같은 경험에 대해 각자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40년 지기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다. 경험의 상당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경험은 기록을 남긴다. 『빛의 과거』에서 김유경과 김희진이 같은 경험에 대해 다르게 기억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인간은 그 당연한 기억의 차이를 받아들이기 버거워하는 존재다. 이렇게 볼 때 타인과 함께한 경험에 대한 저작권은 온전히 나에게 있다고 보기 어렵다. 존엄한 개인이고자 하는 인간이 직면한 비극 중 하나는 내가 경험한 시간에 대한 권리가 온전히 나에게 있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하의 내용에는 <사라진 시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밝힌다. 수혁(배수빈 분)과 이영(차수연 분) 부부가 겪는 문제 그러니까 이영이 밤만 되면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얘기까지만 보면 <사라진 시간>이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일지 가늠하기 어렵다(게다가 조진웅이 분한 주인공 형구는 수혁과 이영이 화재로 사망하기 전까지 등장하지도 않는다). 수혁과 이영의 사망 원인을 조사하던 형구는 범상치 않은 마을의 분위기에 당황하다가 얼떨결에 동네 사람들과 술을 먹고 만취한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이다. 술에서 깬 형구는 형사가 아닌 교사(죽은 수혁이 맡았던 역할이다)가 되어 있고, 자신의 가족들도 사라져 버린다.     


현실을 바로잡아 보고자 노력하던 형구는 결국 뒤바뀌어 버린 현실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형구의 부인은 형사의 월급이 박봉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우연히 학생인 진규(노강민 분)의 아버지 해균(정해균 분)의 동창 모임에 따라간 형구는 그곳에서 서장의 부인이 되어 있는 아내를 만난다. 물론, 이제는 자신의 아내가 아니지만. 형구의 아내에게는 바뀌어 버린 현실이 형구의 아내이던 시절보다 행복하지 않을까? 형구의 정체성이 형사에서 교사로 바뀌어 버린 순간부터 <사라진 시간>은 리얼리즘 서사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된다.      


형구는 혼자서 온천에 갔다가 자신에게 뜨개질을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초희(이선빈 분)를 만나게 된다. 초희는 현실이 뒤바뀌기 전 이영에게 뜨개질을 가르쳐 주었던 적이 있다(그렇다면 형구는 수혁과 이영의 삶을 합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 된다). 형구의 원래 번호가 초희가 쓰던 번호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둘은 가까워지고 형구는 집으로 초희를 초대하는데 거기서 초희의 비밀이 드러난다. 초희도 이영처럼 밤이 되면 다른 사람의 영혼이 자신에게로 들어오는 일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초희의 에피소드까지 보고 나면 <사라진 시간>의 메시지는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도약한다.      


형구는 나의 시간을 잃어버린 인물이다. 형구가 잃은 것은 자신만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한 가족들과 또 다른 사람들의 시간이다. 기억은 개별적이지만 경험은 개별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영과 초희는 절반만 자신의 기억을 가질 수 있는 존재들이다. 밤에는 자신이 무엇으로 변할지 알 수 없고 그것을 기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라진 시간>의 이와 같은 설정은 영화적으로 말하면 판타지적이고 문학적으로 말하자면 모더니즘적이다. 나는 후자에 가깝게 활용된 장치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마모되고 훼손된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온전히 내가 원했던 나만의 시간 같은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 자체가 대체로 ‘사라진 시간’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다. 정진영이 다시 연출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걸 들은 바 있는데, 부디 그 생각을 바꾸시기를 바란다. <사라진 시간>은 내가 올해 본 영화 중 손에 꼽을 만큼 인상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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