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利害)를 넘어선 가족의 연대는 가능한가?

황정은,「파묘」,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파주: 문학동네)

by 노창희

「파묘」는 4세대에 걸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78년 지경리에서 죽은 이순일의 아버지, 이 소설의 주인공 격인 이순일과 그의 남편 한중언, 장녀인 한영진, 이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 한세진, 그리고 남매의 막내이자 장남인 한만수, 그리고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이순일의 노동력이 필요한 장녀 한영진의 자식들. 이 4세대가 관여하는 시간은 해방공간에서 2016년에서 2017년 사이 촛불에 이르는 100여년의 시간을 포괄한다. 황정은은 작가노트 「…」에서 「파묘」를 포함한 『年年歲歲』에 실린 소설들에 대해 독자들이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175쪽)“ 궁금하다고 적고 있는데, 나는 당연히 가족 이야기로 읽었다.


파묘.jpg


’파묘‘라는 제목이 가지는 의미는 직접적인 동시에 상징적이다. 리뷰 「집단기억의 정체성을 향한 일곱 가지 시선」에서 김화영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순일에게 파묘는 ”자신의 죽음, 나아가 한 세대의 퇴장과 함께 찾아오는 정체성의 소멸을 의미한다(179쪽).“ 「파묘」는 짧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해방공간에서부터 2016년 촛불 광장까지 대단히 긴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의 시공간은 2016년 현재 시점의 대한민국이지만 이순일과 한세진 두 주요 인물을 포함한 모든 인물은 자신이 주요하게 점유하고 있는 시공간의 자장을 중심으로 사고 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순일과 한중언은 해방공간에서 살아남아 자수성가에 성공한 인물들이다. 그렇다고 대단히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다만, 힘겹게 삼 남매를 키워 냈을 정도를 성취했을 뿐이다(이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순일과 한중언은 한영진의 시가 재산인 빌라에서 손주들의 양육을 포함한 가사를 돌봐주는 대가로 그 집에서 살고 있으며 사위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 처지다. 이 소설에서 배경 설명으로 묘사될 뿐인 한영진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제적 기반이 엄마가 중시하는 할아버지 성묘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배경으로 작용할 것이다. 한만수는 어리다는 이유로 성묘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소설에서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는 않으나 남성이라는 이유로 이순일이 무의식적으로 이 의무에서 면제했을 수 있다는 추정을 해보는 것은 어느정도 타당성을 지닌다. 또한, 한중언이 이순일의 성묘에 취했던 냉소적인 태도도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대목이다(딱 한 번 성묘에 동참했던 한중언은 처가에 성묘 온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냈고 여기에 상처받은 이순일은 이후 한중언에게 성묘를 함께 가자고 제안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서사적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왜 한세진이 이순일과 성묘를 함께 가는 대상으로 선택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개인적인 성정과 깊은 관련이 있겠지만 계급적으로 보자면 부모가 언니인 한영진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다는 점, 한만수는 외국에 나가 있어 올 수도 없지만 기왕에 그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남성이라는 것이 그 이유일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럼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는다. 실질적인 역학 관계가 없이도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온전히 유지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이 소설은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한세진의 다음과 같은 고민이 남을 뿐이다. ”한세진은 가끔 이순일의 피로에 책임을 느꼈지만 (……) 대개는 그 이야기들을 그냥 들었다. 그래 엄마, 그래요 하면서(159쪽).“ 한세진이 느끼는 책임감은 가족의 순수한 연대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소설을 다 읽은 독자는 거기에 확신을 가질 수 없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성'과 '속'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로서의 동그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