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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희 Apr 17. 2021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는 치욕

이준익. <자산어보>.

인간은 역사 속에 구성된 존재다. 자신이 탄생하기 전에 있었던 역사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이란 없다. 그래서 역사를 배우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많은 서사가 역사를 원전으로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역사를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서사는 역사를 그 자체로 소비해 버린다. 반면에 역사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상상력을 덧입혀 자신만의 서사를 창조하는 데 성공한 텍스트는 독자에게 역사의 교훈과 함께 새로운 인물과 마주하게 한다. 그 인물은 역사 속의 인물임과 동시에 창작자가 만들어 낸 인물이기도 하다. 『흑산』에서 김훈이 “이 이름에 많은 허구의 이야기들이 얽혀 있어서, 소설 속의 인물들은 누구도 온전한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한 이유는 어떤 기록도 온전히 한 인간의 내면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준익 덕분에 우리는 또 한 명의 정약전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속에 비교적 잘 설명되지 않은 부분부터 얘기해 보자.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네 형제가 각기 어떻게 천주교를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후대의 우리가 알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들이 단순히 종교로만 서학(西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서학은 주자에서 강조하는 법도를 무시하고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하는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삿된 학문이었다. 그래서 서학은 사학(邪學)이 된다.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는 자신들을 아끼던 정조 서거 후 사학을 섬겼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정약종은 천주의 품으로 가는 것을 선택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자신들이 서학을 알려준 큰 형님의 사위 황사영 등 여러 인물을 적극적으로 밀고하여 목숨을 부지한다. 옥골선풍의 선비들이 자행한 이 적극적 밀고와 배교 행위에 대해 정약전, 정약용은 침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세들은 이에 대해 다만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스포일러가 전혀 중요한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하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밝힌다. 영화 <자어보>는 정약전(설경구 분)이 흑산도에 가게 된 배경보다는 흑산도에 간 이후의 삶을 다룬다. 주자의 뜻을 섬기고 그를 통해 입신양명하고자 했던 창대(변요한 분)와 정약전 사이의 관계가 영화의 얼개를 이룬다.     


약전은 흑산에 와서 동생 약용과 달리 철저히 실사구시에 몰두한다. 실사구시의 유용성을 중시하기도 했거니와 본인이 가지고 있는 급진적 사상을 세상에 알릴 수도 없었기에 그는 물고기에 대해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창대를 통해 물고기 연구에 집중하고자 한다. 반면, 주자의 뜻이 제대로 서지 않아 나라가 바로 서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창대는 주자의 뜻을 어긴 약전에게라도 주자를 배우고자 한다. 양반의 서자였던 창대는 약전에게 학문을 배워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그리도 꿈꾸던 출사에 성공하지만 당대 조선의 현실에서 주자의 뜻을 펼 수 없음을 깨닫고 좌절하여 다시 흑산도로 돌아온다. 그 사이 약전은 유배지에서 숨을 거둔다.     

   

정약전은 주자의 좋은 점과 서학의 좋은 것을 같이 취해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던 현실주의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 주자는 너무 힘이 셌다. 정약전이 구현하고자 했던 현실 자체가 당대 사회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이상이다. 그 이상과 현실 사이에 발생하는 간극을 메운 것은 조카사위를 밀고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치욕이다. 치욕을 감당한 그가 남긴 결과물들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 수는 없으나 후대의 우리에게는 큰 의미를 지닌 귀한 자료로 남아 있고, 이준익은 이를 바탕으로 영화 <자산어보>를 만들어 냈다. 좋은 사극을 찾기 어려운 환경에서 오랜만에 만난 좋은 사극이다. 좋은 사극은 결국 당대의 우리가 어떤 모순 속에 놓여 있는지 묻는다. 나는 <자산어보>가 그 일에 성공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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