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칼과 입술』.
처음부터 쓰지 않으면 제목에 대한 언급 없이 글을 마칠 것 같아 제목에 대한 얘기부터 하고 넘어가야 겠다. 이 책의 제목이 『칼과 입술』인 이유는 갈치 때문이다. 갈치는 모양이 긴 칼과 같다(정약전의『자산어보』에 나오는 말이다)하여 칼치라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갈치의 비늘은 립스틱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고 한다. 갈치에 관한 글인「칼과 입술」에 나오는 내용이다.
윤대녕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윤대녕이 음식과 관련된 에세이를 썼다는 것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원래 제목인 『어머니의 수저』를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듣다가 알게 되었다. 이 책 때문에 먹게 된 음식이 복불고기다. 어머니와 함께 복 집에서도 복불고기를 먹은 기억이 있고, 회사 옆에 복불고기를 파는 집이 있어 회사 동료들과 먹기도 했다. 기대한 만큼 인상적인 맛은 아니었다. 맛이라는 것은 개인의 추억과 결부된 것이다. 물론, 『칼과 입술』에서도 나와 있는 것처럼 맥주가 잘 맞는 사람이 있고, 소주가 잘 맞는 사람이 있다. 이건 개인의 체질과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음식을 적게 먹는 편이지만 가리거나 탈이 잘 안나는 편인 나는 솔직히 몸에 잘 맞는 음식 같은 것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나이가 좀 더 들거나 호된 경험을 겪고 나면 생각이 바뀌게 될는지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찌개의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대목부터 옮겨본다. “우리의 정서에는 타자성이란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성이란 무엇보다도 각자의 고유함을 배려하는 행위다. 그러나 찌개 문화에서는 애초에 개별성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헤어지고 나면 대개 원수지간이 된다(28쪽).” 찌개는 두 명 이상 같이 먹을 경우 흔히 공유의 대상이 된다. 어느 작가인들 그러지 않겠느냐마는 윤대녕은 개인의 고유성을 중시하는 작가다. 그 때문에 작가가 겪어 온 고통은 그의 소설들에서는 물론 『칼과 입술』에도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찌개 없이 못 사는 사람이지만 찌개가 은유하는 공동체 문화는 딱 질색인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 역시 누군가에게 함께하기를 강권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생선보다 육고기를 월등히 선호사는 사람이고 특히 돼지고기를 좋아한다. 닭고기도 좋아하지만 내가 직접 요리를 시작하면서는 돼지고기를 예전보다 더 좋아하게 되었다. 『칼과 입술』에서 윤대녕은 소, 돼지, 개, 닭과 같은 육고기부터 명태, 고등어, 갈치, 조기와 같은 생선까지 각각이 가지고 있는 맛과 의미에 대해 다루고 있다.
『피에로들의 집』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윤대녕은 육고기보다는 생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글인 「황복 먹고 배꽃을 보다」에 대해 얘기하면서 마치련다. 다시 읽어도 내 평소 선호와는 무관하게 이 책을 읽고 나니 ‘복’을 먹고 싶어진다.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누구나 좋은 기억보다는 아픈 기억이 많은 것이 인생이다. 장소, 시간, 사람 이 세 가지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삶은 없다. 거기에 맛이라는 것을 양념처럼 얹어 놓은 다면 아픈 추억도 조금은 다르게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맛의 기억이란 이렇게 모성처럼 질기고 강한 것(160쪽)”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