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의 『레몬』에서 태림과 다언이 묻는 것
종교가 없는 나는 종종 묻는다. 삶은 왜 이러해야 하느냐고. 이 질문에 답을 해주는 사람은 없다. 삶에 대한 질문은 문학적인 질문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삶이 내게 왜 이러한 고통을 주는지 묻는 것은 많은 좋은 작품이 품고 있는 근본적 질문이다.
문학은 삶을 다룬다. 삶을 살아내는 것은 누구인가? 주체이다. 그럼 주체는 무엇을 열망하는가? 이것이 질문의 시작이다. 자아가 추구하는 가치야말로 문학의 영역이다. 자아가 추구하는 가치는 ‘삶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언제 묻는가?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가혹한 형벌이 가해 졌을 때이다. 이 형벌을 극복하려고 할 때 자아는 정치적이 된다. 부당한 형벌을 내린 자와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형벌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우리는 ‘신’과 같은 절대자를 찾는다. 『레몬』에 등장하는 이들은 고통을 받으면서 삶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묻는다.
권여선의『레몬』은 불행을 겪고 그 불행의 불가해성을 이해하려는 인간에 대해 다룬다. 그것은 결국 고통에 대한 이해로 나아간다. 2002년 아름다운 한 소녀가 끔찍하게 살해당한다(‘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 둔기로 머리를 가격 당해 두부 손상으로 사망한 것.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고 사건은 미제로 남는다. 하지만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당시 고3이었던 부유한 회계사의 아들이었던 신정준은 아름다운 윤태림과 교제 중이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김해언 때문에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월드컵 폐막식 날이었던 2002년 6월 30일 신정준은 김해언을 차에 싣고 어딘가로 향한다. 윤태림은 신정준의 차를 쫓기 위해 치킨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는 한만우의 스쿠터를 탄다. 그리고 다음날 김해언은 사채로 발견된다. 경찰은 한만우가 김해언이 입고 있었다는 반바지를 목격했다는 이유로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동시에 차에 태웠던 신정준도 용의 선상에 오른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한만우에게 무게의 축이 쏠리고 이건 학교에서의 여론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들은 모두 학교를 떠난다. 김해언은 저 세상으로, 신정준은 미국으로, 한만우도 학교를 그만둔다.
문제는 남은 사람들이다. 김해언에게는 어머니와 동생 다언이 있었던 것. 다언의 증언처럼 누군가의 죽음은 세상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한다. 떠난 자와 남은 자. 이 소설은 남은자의 고통이 무엇인지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다.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남편 역시 두부 손상으로 사망했다), 첫째 딸의 미모에 모든 것을 걸었던 어머니와 예쁘기만 할 뿐 속옷조차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는 언니의 모든 것을 챙겨야 했던 다언에게 남은 삶을 받아들이기란 가혹할 뿐이다. 여기 끔찍하게 죽은 다언만큼이나 끔찍한 삶을 살아야 했던 한만우가 있다. 군대에서 발견된 육종으로 다리 한쪽을 절단한 한만우는 결국 육종으로 죽는다. 다언이 삶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사건 중 하나이다.
인간이 애초부터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일은 없다.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건 삶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한자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이다. 삶의 의미를 묻지 않은 자는 이러한 판단조차 할 수 없다. 그러면 인간이 이러한 판단을 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 소설에서 다언에게 삶의 의미를 묻게 만드는 계기는 삶에서 결정적인 무언가를 잃어버린 시점부터다.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 인과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결정적인 결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결여가 발생한 원인이다. 세상의 불의를 바로 잡고자 하는 동력을 정치라고 표현한다면 발버둥쳐도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을 때 개인의 정치적인 대응으로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찾게 되는 영역이 바로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일 것이다.
『레몬』에서 발생하는 불행은 신의 영영과 인간의 영역 모두에 걸쳐 있다. 해언의 가족에게 벌어진 일이 인간의 영역이라면 한만우에게 닥치는 불행은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동시에 의심하게 한다. 왜 의심하느냐? 해언의 죽음은 가해자가 있다. 사법적인 영역에서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 이후 한만우에게 닥친 불행은 인간의 영역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고통 받던 다언은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199쪽)”하여 다언의 죽음을 비로소 애도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신정준과 윤태림의 아이를 유괴하는 것으로 김해언에 대한 복수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이보다 중요한 것은 불가해한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며, 여기서 김다언은 한만우의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의 불행과 죽음을 목격하면서 김해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다언은 언니 김해언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고통 받지만 그 과정에서 삶의 의미와 고통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태도를 취한다. 나아가 자신의 고통 뿐 아니라 한만우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고통에 대해 성찰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레몬』에서 다언이 던지는 질문은 인간에게 삶은 왜 이리도 가혹한 것이어야만 할까하는 것이다. 나는 『레몬』을 읽고 이 질문에만 사로 잡혀 있었다. 『문학동네』가을호에 실린 권여선과 박민정의 대담 「검열하나, 그로 인해 자유롭다면」에는 다언과는 또다른 고통을 겪고 있는 태림의 고통이 재조명된다. 권여선은 『레몬』이전에 연극화된「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레몬』은 이 중편을 개작하여 장편소설로 출간한 것이다)에서 태림 역을 맡은 우정원 배우의 연기를 보고 태림이 겪는 고통에 대해 본인이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얘기한다. “태림이 영악하고 얇고 현실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그런 만큼 유리처럼 부서지기도 쉬운 인물인데, 그 고통에 대해 제가 쉽게 생각했어요(141쪽).”
『레몬』에서 다언이 시를 쓰는 주체라면 태림은 신의 섭리를 따르려는 자이다. 권여선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태림은 신의 섭리를 믿는다는 철두철미한 광신의 형식을 갖고 있지만 그안의 내용은 텅 비어 있고 아무것도 없는 폐허예요. 그런데 다언은 신을 믿지 않는, 형태적으로는 무신론자이지만, 신에게 이러저러한 납득 못할 현실이 있는데도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겠느냐 하면 계속 묻죠. 그러니까 형식은 없지만 내용은 질문으로 가득차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태림과 다언이 시와 신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반대인 형국이지만, 또 그 마음은 역설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둘 다 지옥을 산다는 점에서(144쪽).”
『레몬』에서 태림이 믿는 신의 섭리는 본인의 삶을 신이 포용해 주고 이해해 줄거라고 믿는 광신이라는 형식을 지니고 있다. 반면, 다언은 종교라는 형식은 없지만 언니의 죽음과,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하여 삶의 고통에 대해 절실한 질문을 던진다. 신의 섭리에 충실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고통스러운 태림과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하여 간신히 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된 다언. 결국 이 소설은 삶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