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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희 Nov 03. 2019

제목이 질문이 되어 버린 고유 명사, 82년생 김지영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영화  <82년생 김지영>

텍스트 안의 김지영과 텍스트 밖의 김지영     


미투, 강남역 살인사건 등으로 인해 여성혐오와 차별은 사회적으로 가장 중대한 의제가 되었다. 사회적으로 중대한 사건들은 문화적 텍스트들과 상호작용한다. 가령, <5.18 민주화운동>은 여전히 이와 관련된 중요한 문화적 텍스트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장훈의 <택시 운전사> 등의 문화적 텍스트들이 여전히 광주를 소환하는 이유는 그에 대한 충분한 애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물론,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 문제는 <5.18 민주화운동> 같은 사안과 비교할 때 훨씬 더 큰 보편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의 폭을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광범위하다. 뒤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논하겠지만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 김지영 씨를 보편적인 여성의 전형으로 그리고자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성에 대한 차별 문제가 갖는 보편성 때문일 것이다.      


이미 백만 부가 넘게 팔린 『82년생 김지영』은 영화 개봉 후 다시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할 만큼 폭발적인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 국내 독서 시장의 규모를 가늠해 볼 때 이 열풍은 어마어마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작품은 텍스트 밖에서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여성혐오와 여성 차별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활성화시키는 데 이 작품이 기여한 부분이 크다는 것 이외에도 이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과연 어떻게 봐야 하는 것과 같은 비평적 논의까지 『82년생 김지영』은 실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소설『82년생 김지영』의 텍스트가 갖는 의미와 가치에 집중하면서 텍스트 밖의 논의는 『82년생 김지영』을 비평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아울러, 『82년생 김지영』과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어떠한 상호작용을 창출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학적 보고서는 소설이 될 수 없는가?     


소설『82년생 김지영』은 첫 장인 「2015년 가을」을 제외하면 연대기적으로 이어져 있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에 대한 회상을 통해 김지영이 겪은 일들을 중간중간 틈입시킨 반면, 소설『82년생 김지영』은 김지영 씨의 유년기, 청년기, 20대, 결혼 이후로 나누어 장을 구성하였고, 에필로그 식으로 2016년 현재의 시점에서 정신과 의사의 서술로 이루어지는 에피소드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복잡한 플롯에 대한 이해가 필요 없이 소설에 바로 몰입하는데 이 연대기적 서사가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서른네 살이다(9쪽).”라는 첫 문장을 통해 드러나듯이 이 소설의 문체와 등장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르포 형식의 글이나 인물을 다루는 사회학 보고서와 닮아있다(조남주 작가가 사회학과 출신이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겠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각종 통계와 신문기사를 적극적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바로 이 부분이 『82년생 김지영』의 미학적 가치를 논할 때 논쟁이 되는 지점이다.      


『82년생 김지영』이 미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소설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아마 이 소설이 사회적으로 이렇게까지 주목받는 작품이 되지 않았더라면 비평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작품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미친 사회적 영향력이 커졌고, 조남주 작가가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 이른바 문단에서 활동하는 작가라는 점에서 『82년생 김지영』이 취하고 있는 사회학 연구 방식의 도입을 두고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 될 수 있다.     


나는 『82년생 김지영』이 취하고 있는 접근방식이 조남주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는 효율적인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계급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해온 한 연구자가 자신의 SNS를 통해 장강명의 『산 자들』을 읽고 봉준호의 <기생충> 보다 우리 사회가 처해 있는 계급 구조의 문제점을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고 지적한 걸 본 적이 있다. 나는 『82년생 김지영』이나 『산 자들』과 같이 취재를 기반으로 한 사회소설이 더욱 많이 창작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미학적 가치 판단은 다른 층위에서 이루어졌으면 한다. 여전히 영상 매체가 충분히 제공하기 어려운 현실을 소설을 통해 묘사할 수 있는 영역이 남아 있다면 그 일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IMF와 대한민국의 사회변동은 젠더 및 가족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82년생 김지영』에 관한 사회적 논의에서 그 중요성에 비해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영역이 IMF를 전후로 한 대한민국의 사회변동이라고 생각한다. IMF가 대한민국에 준 충격은 분명히 젠더 및 가족 문제에 영향을 미쳤다. 경제회복이라는 담론이 다른 중요한 가치에 대한 논의를 우선순위에서 배제하는 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에서는 김지영 시의 언니 김은영 씨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교대로 진학해야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IMF다. 김지영 씨의 아버지는 비교적 안정적인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명예퇴직을 해야 했다. 물론, 김지영 씨의 집안은 오미숙 씨의 시의적절한 대응으로 가족이 죽집을 운영하면서 위기를 잘 극복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김지영 씨의 집안에도 IMF의 영향이 남아 있다. 


IMF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급속히 변화한다. 고용형태가 변화하고 취업하기가 어려워졌다. 그 과정에서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다. 이로 인해 결혼한 신혼부부의 상당수는 시댁의 도움으로 집을 얻는다. 이는 효도 및 육아의 부담을 시부모가 당연스럽게 여기는 중요한 근거로 작용한다. 정대현 씨와 김지영 씨는 시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효도 및 육아에 대한 부담을 김지영 씨가 고스란히 떠앉게 된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 씨가 어떤 측면에서 어머니 오미숙 씨보다도 발언권을 얻기 어려운 이유는 오미숙 씨는 상당부분 자신이 성취한 세대인 반면, 김지영 씨의 세대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주거권조차 얻기 어려운 세대이다. 김고연주가 해설 「우리 모두의 김지영」에서 “적어도 어머니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입 밖으로 말할 수 있었(181쪽)”다고 지적하는 데에는 자신의 노력으로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었던 세대가 가질 수 있었던 권리가 배경에 자리하고 있다.      


김지영 씨의 ‘빙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소설과 영화를 다 보아도 김지영 씨의 ‘빙의’가 실재하는 정신질환인지 알기 어렵다. 다만, 영화 <82년생 김지영>만 봐서는 알기 어려운 정보가 있다. 김지영 씨가 빙의하여 얘기하는 정보 중 일부는 김지영 씨는 알 수 없는 정보라는 것(하지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 이는 빙의하는 김지영의 씨의 질환이 질환과 더불어 주술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영화 <82년생 김지영>에는 김지영 씨가 알 수 있는 정보만 가지고 빙의하는지 여부를 확인해 주지 않는다. 그것이 서사적인 결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김지영 씨의 빙의는 지극히 리얼리즘적인 소설에 판타지적 효과가 개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적 혹은 영화적 장치로 여러 가지 논란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김지영 씨의 빙의는 효과적으로 여러 여성 화자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 평소에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하기 어려운 처지인 김지영 씨가 본인의 목소리를 빙의를 통해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율적인 장치로 기능하다.      


뒤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지만 빙의 부분만을 보도라도 ‘82년생 김지영’은 가급적 소설과 영화 둘 다 보기를 권한다. 소설『82년생 김지영』과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서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서로가 채워주는 찾기 어려운 앙상블을 보여준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질문은 현재 진행형      


소설『82년생 김지영』에는 김지영 씨가 숨 쉴 구멍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도 나는 팔짱 끼고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마도 작가는 다소 인위적인 설정이라도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단호하게 전달하고 싶었으리라.      


소설과 비교할 때 영화 <82년 김지영>은 김지영이 회복될 수 있는 여지를 던져 준다. 경력이 단절된 회사 후배에게 흔쾌히 기회를 주고 싶어 하는 회사 선배가 있고, 주저하기는 하지만 흔쾌히 본인이 육아 휴직을 신청하겠다는 남편 정대현 씨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이 원래 가졌던 꿈인 글쓰기를 통해 탈출구를 찾으려 하는 김지영이 있다. 여기에는 다소 낭만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지만 영화가 김지영 씨에게 제공하는 이와 같은 희망은 소설『82년생 김지영』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이어서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효과가 있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질문은 현재 진행형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혐오와 여성 차별이라는 사회적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보편적인 질문을 던졌고, 많은 이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까지 성공했다. 이 질문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앞으로 ‘82년생 김지영’이 던지지 못했던 다른 질문들이 계속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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