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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희 Nov 12. 2019

마블이 만든 만신전, 팬들에 의해 빛나는 성좌

안소니 루소, 조 루소, <어벤져스 엔드게임>

현상학자 휴퍼트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와 숀 켈리(Sean Kelly)는 ‘모든 것은 빛난다’(김동규 역, 고양: 사월의 책)에서 왜 현대인이 허무에 빠지게 됐는지 묻는다. 근대는 이성과 합리 속에 구축된 체제이고 종교는 여전히 중요한 기능을 하지만 근대 이전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떠받들어졌던 신의 존재는 더 이상과 과거와 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 신과 같은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현대인의 삶은 이로 인해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펼치는 논지 중 하나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작가의 작가(writers’ writer)로 불리는 제임스 설터(James Salter)의 대표작‘가벼운 나날’(박상미 역, 서울: 마음산책)에 대한 추천사에서 근대인들은 “모든 초월적인 버팀목들과 자발적으로 단절”했다고 표현한다. 신형철은 이로 인해 근대인들은 “시간은 가차 없이 흐르는데 삶의 의미는 드물게만 찾아진다”는 대가를 치룬다고 적고 있다.


다시 ‘모든 것은 빛난다’로 돌아와 보자. 저자들은 다양한 신들이 존재했던 그리스 시대의 다신성이 삶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일종의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본다. 호메로스 서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이 당시 그리스인들이 처해 있는 무수한 삶의 문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비추어주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개봉 11일 만에 천만관객을 넘어선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흥행과 관련된 각종 기록들을 갈아 치우고 있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봐야 한다는 21편의 영화를 단 한 편도 보지 않았었다. 내 취향도 한몫했지만, 이 어마어마한 계획이 끊임없는 영토확장을 꿈꾸는 제국 마블의 무한질주처럼 느껴져 거부감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거기다 마블의 주인이 누군가. 디즈니 아닌가. 한 식사자리에서 이러한 내 소회를 밝혔다가 눈총을 받았다. 마블의 ‘마’자도 모르는 주제에 거부감을 드러냈다가 생긴 일이었다.

마블의 <어벤져스> 기획이 갖는 차별성은 영웅들이 팀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다른 히어로물들처럼 악이 존재하지만 악에 대응하는 방식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나타나는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갈등은 이 서사가 특정한 가치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10여년 간의 장구한 서사의 결말은 타노스로 대변되는 악의 패배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마블에 열광하는 팬 입장에서 응원하는 영웅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현실의 피로에 지친 팬들에게 마블이 만들어낸 <어벤져스>라는 만신전은 각기 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어벤져스> 기획의 또다른 특징은 한 서사가 다른 서사와 조밀하게 혹은 느슨하게 엮여 있다는 것이다. <아이언맨>으로 시작한 마블의 기획은 <캡틴 마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웅들을 탄생시켰고 무수한 이야기들을 생산하고 엮여 왔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고 눈시울 적시었던 팬들이 받은 감동은 어쩌면 10여년간 켜켜이 쌓여온 시간이 준 선물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 물리고 물리는 서사가 관객을 다시금 포획하는 미끼가 된다는 점 역시 마블의 상업적 의도라고 하지 않기는 어려워 보인다.

호메로스의 서사에 등장하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을 마블의 영웅들이 대체 한다는 식의 발상은 지나쳐 보인다. 하지만 대중문화의 기능이 일상에 매몰돼 자칫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 일상을 잠시나마 달래주고 위안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마블, 그리고 마블의 주인인 디즈니가 글로벌화된 미디어 환경에서 끝없이 영토를 늘리고 있는 제국임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제국이 만들어낸 만신전에서 영웅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성좌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건 팬들의 몫이다. 마블의 영웅들이 빛을 발한다면 그건 10여년의 시간 동안 영웅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팬들이 그들에게 빛을 불어 넣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엔드게임>은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제목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몇 년 후 마블이 내놓은 신작을 보기 위해서는 21편이 아니라 30편이 넘는 영화를 보고 극장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도 마블이 구축한 만신전의 성좌는 빛날 것인가?

이미지 출처: Fredrick john https://unsplash.com/photos/TnXsLbvP2Qs

이 글은 '어벤져스 엔드게임, 팬들에 의해 빛나는 성좌' 라는 제목으로 신아일보에 2019년 5월 15일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7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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