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이 환기하는 목격자의 윤리와 시심

권여선의 『레몬』에서 ‘상희’의 존재가 갖는 의미

by 노창희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그 사건은 피해자가 존재하는 끔찍한 사건이다. 그 사건에는 가해자 혹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고 그로 인해 회복되기 어려울 만큼 손상을 입은 피해자와 피해자의 주변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피해자와 가해자 혹은 책임져야 할 사람들 이외에도 다른 존재들이 있다. 바로 목격자들이다. 세월호와 같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라면 미디어를 통해 대부분의 국민이 이 사건을 접하게 되므로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반 국민들도 간접적으로나마 목격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 이 목격자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타인의 고통을 지켜봐야 하는가?


얼마 전 권여선의 『레몬』에 대해 「내용 없는 신의 섭리와 형식 없는 문학적 질문(https://brunch.co.kr/@nch0209/34)」이라는 글을 쓴 바 있다. 여기서 내가 다루고자 했던 것은 언니의 죽음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로 인해 다언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문학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인데 그것이 얼마나 종교적인 행위와 닮아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앞의 문장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어려운데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피해자의 주변인이(물론, 다언 그 자신도 피해자다) 피해자를 어떻게 애도할 수 있느냐 혹은 애도하는 것은 가능한가가 나의 질문이었다. 그 글을 쓴 이후 종종 마음에 걸리는 등장인물이 있는데, 바로 상희이다.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상희의 존재이다. 상희는 해언, 태림과 사건이 발생한 그해 같은 반이었고, 다언의 문예반 선배였다. 왜 상희라는 존재가 필요할까? 해언이 살해당하고 4년이 지난 후 상희는 우연히 다언을 목격한다. 그때 상희는 다언의 표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그녀의 무표정은 표정의 부재가 아니라 표정의 불가해성이었다(40쪽).”상희는 그즈음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다고 느끼는데 다언을 우연히 만나고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한때 내 시에 열광했던 다언이 아직도 시를 쓰느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사범대학에 진학한 후로 나는 시를 그만두었다. 이제껏 내게 시를 쓰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다언은 내가 계속 시를 썼으면 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언만이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67쪽).”


상희가 잃어버린 것은 시심이다. 시심은 무엇인가? 여기서 시심은 단순히 글을 쓰는 행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자 하는 마음을 포함하는 그 무엇 어떤 윤리이다. 이 소설의 제목인 레몬이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시심이기도 하다. “레몬…… 동그란 노른자의 선명한 빛이 내(다언)게 다시 시를 쓰고 싶게 했다(95쪽).” 레몬은 “복수의 주문(97쪽)”이기도 하지만 시심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 상희는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과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권여선은 고통의 목격자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면에서 상희는 다언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간접적으로 멀리하고 싶어하는 듯 하다. 이를 재난을 맞이한 타자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로 대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세월호라는 재난에 이를 대입해 보자. 다언, 다언의 어머니를 유족이라고 가정하고, 상희를 유가족을 바라보는 일반 국민으로 분류해 볼 수는 없을까? 즉, 신을 찾다가 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존재들을 어쩔 수 없이 목격해야 하는 일반인들이 취해야 하는 윤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희와 같은 관찰자를 배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의 고통과 무관한 타자의 고통을 바라보는 이들의 윤리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 이 소설은 답을 주지 않는다. 어쩌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이들이 타자의 고통을 운운하는 것은 오만한 것이라는 작가의 준엄한 침묵처럼도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레몬』을 포함한 권여선의 소설들이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최소한 독자에게 타자의 고통을 이해해 보라고 꽤나 설득력 있게 권유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의 구조가 상희가 잃어버린 ‘시심’과 닮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 현재의 매체 환경에서 이것만큼 소설에게 기대되는 덕목은 없을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타자의 고통 맞은 편에 놓여 있는 나의 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