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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희 Nov 23. 2019

잔혹한 유년의 우물

<벌새>

은희는 수희, 대훈 삼남매 중 막내이다. 대치동에서 자영업을 하는 부모님은 은희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들인 데다 공부를 잘하는 대훈은 부모의 편애를 받는다. 하지만 은희에게는 폭력적이다. 은희에게는 남자친구가 있고 친한 친구가 하나 있다. 유년기는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해 줄 하나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건너갈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 존재가 자신을 배신할 때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는 시기다.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는 은희가 겪은 1994년의 상실에 관한 영화다. 이하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에서 첫 번째 주목할 만한 사건은 은희(박지후 분)가 남자친구인 지완(정윤서 분)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다. 은희는 연락이 뜸하던 지완이 다른 아이와 다정하게 있는 것을 목격한다. 방황하던 은희는 유리(설혜인 분)라는 후배와 가까워지게 된다. 은희는 절친인 지숙(박서윤 분)과 문구점에서 절도를 하게 되는데 지숙이 은희의 부모님이 하는 떡집의 상호를 얘기하게 되고 문구점 주인이 그쪽으로 전화를 걸어 절도 사실을 알리면서 지숙과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은희와 지숙은 한문 학원을 같이 다니고 있었는데, 이 수업은 은희와 지숙 둘만이 듣는 수업이다. 한문 학원의 강사는 은희가 따르는 영지(김새벽 분)다. 절도가 발각된 뒤 지숙은 어떠한 사과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은희 혼자 학원에 간다. 지숙과의 절도 사건에 대해 영지에게 말한 은희는 영지의 따뜻한 태도에 감화되어 속으로 영지를 깊이 따르게 된다.      


이후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성수대교 붕괴이다. 언니인 수희가 성수대교를 통해 등교하기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힌다. 하지만 수희는 버스를 늦게 타서 간신히 화를 면하게 된다. 문제는 영지가 성수대교 붕괴사고의 피해자였던 것. 스케치북과 편지를 보내온 영지의 집에 찾아간 은희는 영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나는 <벌새>를 보는 내내 위태로웠다. 1994년에 중2였던 은희와 마찬가지로 나도 중2였다. 서초동과 양재동에서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나왔다. 외아들로 자라긴 했지만 바쁜 부모의 무관심 때문에 상처를 받았던 적도 많다. 나보다도 훨씬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는 은희가 당장에라도 잘못될 것 같은 불안함이 느껴져 긴장을 놓지 못한 채 영화를 계속 보게 되었다. 무척이나 정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긴장감을 느낀 이유는 <벌새>가 불안한 은희의 내면을 잘 포착해 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유년의 우물이 존재한다. 그 우물에 너무 깊게 발을 담그면 성인으로 성장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된 사회생활이 어려워지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그 우물을 잘 건너오지 못한 20대들의 이야기다. 나는 과연 그 우물을 잘 건너왔을까? 요즘도 가끔씩 그 우물을 들여다보는 나를 본다. 나나 은희나 이제 40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 우물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은희는 과연 잘살고 있을까? 같은 시대에 물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에서 유사한 경험을 한 동년배로서 그녀의 안부가 진정으로 궁금하다. 그 이후에 성수대교 붕괴 못지않게 끔찍했던 삼풍백화점 붕괴, IMF 같은 사건들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다(정말 세속적인 궁금증은 그녀의 부모가 운영하던 떡집이 과연 그 파고를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녀가 잔혹한 유년의 우물 속에 완전히 침잠하지 않고 잘 성장했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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