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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희 Nov 27. 2019

방송이라는 오래된 제도, 낡지 않은 통찰

레이먼드 윌리엄스. 『텔레비전론』. (박효숙 역, 서울: 현대미학사)

음성이나 영상을 전파로 내보내는 일을 의미하는 ‘방송’이라는 용어는 시대 변화에 맞지 않는 낡은 용어임이 분명하다. 엄밀히 얘기하면 방송이라는 용어는 지상파 방송에 국한되어 사용되어야 할 용어이다. 미국에서는 법적으로 broadcasting이라는 단어는 지상파에 국한해서만 사용되며, 영국에서는 융합법 체계를 마련하면서 broadcasting이라는 단어를 법에서 드러내 버렸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방송이라는 용어를 지상파뿐 아니라 케이블TV, IPTV 같은 유료방송을 지칭할 때도 사용하고 관습적으로 팟캐스트와 같이 법적으로는 방송이 아닌 매체 형식을 지칭할 때도 방송이라는 단어를 거부감 없이 사용하고는 한다.      


방송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간에 대한민국에서나 다른 국가에서나 방송이라는 문화적 제도가 강력한 영향을 가진 시스템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 강력한 체계는 인터넷이라는 대항 제도에 도전받고 있다. 이제는 기존의 방송 체계와 인터넷 체계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 지고 있다. 기존의 방송 시스템이 구축된 제도였다면 OTT로 대변되는 새로운 생태계는 이용자가 중심이 되어 구축해 나가는 제도이다. 이와 같은 시각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지만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훨씬 이전인 1974년에 이용자를 거대한 무리로 보는 대중(mass)이라는 시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방송은 “개별 수상기를 통해 제공(63쪽)”되기 때문에 각각의 능동적 주체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윌리엄스가 시청자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윌리엄스는 텔레비전이 기술적 산물이긴 하지만 “사회의 요구에 부응(48쪽)”하는 구성물이라는 점에 주안점을 둔다. 윌리엄스는 방송을 “사회적 경향을 근거로 한 ‘사회적 산물(66쪽)’”로 본 것이다. 윌리엄스가 경계한 것은 기술결정론적 시각이 방송과 같은 기술 발전의 산물이 가진 사회정치적 효과를 간과하거나 그 의미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윌리엄스가 방송의 내용과 형식에 대해 비평하였던 1970년대 방송이라는 제도가 가지고 있는 모순은 “중앙집권식 송출과 사적인 수신이라는 형식(71쪽)”에서 파생되었다. 이는 시청자를 다수의 집단은 대중으로 보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모순이 극복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전송경로는 다양화되었고, 언제든 이용자의 참여가 가능할 뿐 아니라 이용자가 제작하는 것도 가능해진 것이다.      


『텔레비전론』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방송이 편성을 통해 ‘흐름’을 만들어 낸다는 통찰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윌리엄스는“‘배분(distribution)’이라는 정적인 개념을 극복하고 ‘흐름’이라는 유동적인 개념으로 진일보하는 일(133쪽)”을 강조하였다. 『텔레비전론』이 나온지 45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럼 지금의 동영상 이용환경을 관통하는 용어는 무엇일까? 윌리엄스가 방송에 대해 비평하고 글을 쓰던 70년대와는 달리 지금의 동영상 이용환경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흐름보다 보다 다양한 용어가 필요하지도 모른다. 윌리엄스가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문화적 형식으로서의 텔레비전(87쪽)”을 연구한 것처럼 문화적 형식이자 제도로서 미디어 생태계를 연구하기 위한 필요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텔레비전론』은 지금의 미디어 생태계를 연구하기 위해서 참조해야 할 여전히 낡지 않은 통찰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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