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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희 Dec 08. 2019

슈가맨이 소환하는 90년대

태사자에서 양준일까지

2009년 초여름이었으니 10년도 넘은 일이다. 박사과정 때 당시 듣고 있던 수업에서 포럼을 개최하였고, <디지털 시대 음악산업에 대한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조악한 글을 거칠게 요약하면 당시 대중음악의 문화적 동질성과 질적 수준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Horkheimer & Adorno, 1947/2001)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지적했던 문화적 획일성과 퇴행성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청중 중에는 문화연구를 전공하고 계신 분들이 다수 있었고, 그중 한 분이 매우 정중하게 위와 같은 나의 의견이 좀 지나친 것 아니냐는 취지로 코멘트를 주셨다. 뭐라고 답변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기분이 좀 상했던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적절한 코멘트였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락처라도 받아 둘 것을.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 이후로 강산이 바뀔 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다시 기회가 생겨 같은 주제로 글을 쓴다면 전혀 다른 얘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당시 내 추측이 빗나간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한국 대중음악이 여전히 활력을 잃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이후 10년 동안 음악을 열심히 듣지 않았으므로 말을 보태는데 조심스럽기 하지만 현재 한국 대중음악은 산업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90년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활력을 찾은 것 같다. 물론, 10년 전에 내가 우려를 표명했던 것처럼 플랫폼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된 것은 맞지만 다양성이나 질적 수준은 당시 내가 걱정했던 것처럼 퇴행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10년 전에 내가 앞으로 10년 이후에는 똑같은 아이돌 음악만 듣게 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전망했다면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아이돌의 음악도 들을 만한 상황이 된 것 같다.      


당시 내가 크게 의식하고 있지 못했던 것은 나의 준거가 90년대였다는 것이다. 90년대는 아마도 대한민국의 역동성이 가장 폭발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대중문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그 역동성 이면에 있는 모순이 적나라하게 그 민낯을 드러낸 시기이기도 하다. 김보라 감독이 연출한 <벌새>의 배경은 90년대가 드러낸 민낯이라고 할 수도 있다. 9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내게 한국 대중음악을 향유하는 일은 과장을 조금 보태어 얘기하면 내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열심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취향은 015B나 토이 같은 한국적 발라드에 편중되어 있었고, 지금의 내 취향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이고 경제적으로는 가장 호황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여전히 엄혹한 면이 많았다. 사전 검열이 남아 있고, 정부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표절곡을 지정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활력을 그 어떤 시기도 뛰어넘기 어려워 보인다. 적어도 나에게는. 015B, 이승환, 신승훈, 김건모, 토이, 이소라, 이적, 김동률 등 지금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수들이 있고, 서태지와 아이들을 비롯해서 본격적인 아이돌 음악이 산업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매해 100만부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는 음반이 나왔다. 물론, 불법 복제된 길보드 테이프가 아무 거리낌 없이 돌아다니기도 했고, 표절의 기준 같은 것도 명확히 확립되어 있지 않아 표절의 책임을 아티스트에게 온전히 돌리기 어려운 시기이기도 했다. 

     

서론이 본론보다 길어져 버렸다. 내가 이글을 쓰게 된 것은 JTBC에서 11월 29일부터 방영하고 있는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3> 때문이다. 오랜만에 접한 태사자는 너무 반가웠다. 특히, ‘아예 태사자 인 더 하우스’를 들을 때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1집과 2집을 다 사기는 했지만 그렇게 좋아하던 뮤지션도 내 취향도 아니었는데 그저 반가웠다. 최연제의 <너의 마음을 내게 준다면>은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발라드였다. 빌보드식으로 분류하자면 꽤 세련된 어덜트 컨템포러리 장르에 속할 것이다. 슈가맨3 출연자 중 가장 내 취향에 가까운 뮤지션인 이소은은 방송을 접한 후 멜론으로 계속 듣고 있을 정도로 반가웠다.      


<가나다라마바사>를 들은 기억은 있지만 그 존재를 잘 몰랐던 양준일의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천재라는 표현이 그 이상으로 맞는 한국 뮤지션도 없을 것 같았다. <가나다라마바사> 가사에 자조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지만 외양적으로 성적 정체성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국적도 확실해 보이지 않는 이 뮤지션을 90년대 초반 여전히 경직된 면이 많았던 대한민국 사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본인에게도 뜻깊은 무대였겠으나 90년대 대중음악의 광 팬을 자처하는 내가 챙겨 듣지 못한 뮤지션이었기에 나에게는 거의 선물 같은 무대였다.      


2010년대가 산업적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최전성기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개인적으르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K-POP이 성공한 브랜드가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201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동력을 설명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을 벗어남은 물론,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대중음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겠지만 201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은 여전히 90년대적 에너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21세기에 태어난 지금 활발히 활동 중인 10대 뮤지션이 방송인 유희열은 알아도 토이는 모르지만 유튜뷰를 통해 90년대 음악을 찾아 듣는 10대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슈가맨이 소환하는 것은 90년대다. 90년대 토이로 활동했던 유희열은 말할 것도 없고 유재석도 90년대에 데뷔했다. 이들은 90년대를 그리워하는 세대와 90년대를 학습하여 알고 있는 세대를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해줄 수 있는 최적의 사회자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사자는 지금은 잊혀진 90년대식 아이돌들의 전형적인 그룹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부터 싹을 틔운 한국식 아이돌들은 K-POP이라는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양준일은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논의되던 시기에 등장한 전위적 뮤지션이다. 태자사와 양준일이라는 두 뮤지션은 90년대라는 시기가 갖는 풍부함을 상징한다.      


긍정적인 의미이건 부정적인 의미이건 2010년대 한국 대중음악은 여전히 90년대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방송에서 그 활력을 소환하는 것도 그때 데뷔한 뮤지션들이 음악인으로든 방송인으로든 현역으로 활동하는 것도 90년대적 활력이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 판단에는 90년대적 자장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나의 편애와 편견이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90년대적 활력과 2010년대 활력이 적절히 조화된다면 여러 가지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음악산업은 여전히 독특한 에너지를 창출할 수 있을 것 같다. 10년 전의 나의 판단이 잘못되어 다행스럽다. 여전히 우려도 남아 있지만 우려를 잠재울 희망도 존재하므로.        


참고문헌     

Horkheimer, M. & Adorno, T. (1969). Dialektik der Aufklȁrung: Philosophische Fragmente. 김유동 (역) (2001).『계몽의 변증법』. 서울: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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