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공생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가장 오래된 논쟁 중 하나는 인간이 원래부터 선한가, 악한가 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질문 자체가 그리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선할 때도 있고 악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아마도 인류가 지속되는 이상 계속될 것이다(심지어 최근 나영석 감독이 연출한 <신서유기>에서도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인간은 왜 감수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는가? 인간이 때로 선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악한 존재가 되는 것도 무엇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극한 생존의 조건에 내몰리면 감수성이 아닌 육체적 필요에 의해 판단을 내리게 된다. 7살 이전의 아이들이라면 그렇게 판단을 내리지 않을까?
아이들의 감정을 번역해 내는 연구를 진행하던 <뇌의 해석 연구소> 연구원들은 7살 이하의 아이들이 느끼는 감수성이 예측보다 복잡해서 혼돈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더 윤리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114쪽)?”와 같은 반응을 아이들이 보인 것. 더욱 놀라운 사실은 어떤 행성의 존재를 주장하며 그것을 그려 명성을 누리다 사망한 류드밀라의 행성을 보며 아이들이 그곳을 고향처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연구팀은 결국 오래전에 사라진 류드밀라의 행성에서 온 ‘그들’과 ‘인류’가 공생해 왔으며, 그들이 인간의 감수성을 형성하는데 기여 했을 것이라는 공생가설을 내놓기에 이른다.
인간이 감정을 가진 존재이며, 그것이 어디에서 형성되었는지 후천적인 영향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인지 선천적인 영향에 의한 것인지는 늘 흥미로운 주제다. 특히, 유년기에 기억이 흐릿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생가설」이 제시하는 문제는 흥미롭다. 그들이 떠나면서 유년기의 기억은 상실되고 인간은 독자적인 판단하에 윤리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 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과학의 영역이지만 그들이 떠나고 난 후 우리의 감수성을 들여다 보는 일은 문학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