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선.『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하루키의 글을 의도적으로 읽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가끔씩 하루키의 책을 만지작거리며 또 하루키의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에 휩싸일 때가 있다. 그러다가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을 때 단언컨대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하루키의 글을 폄하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땅찮은 생각이 들다가도 돌아서고 나면 그들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 나 또한 하루키를 대하는 태도에는 망설임이 있으니까.
이 망설임은 하루키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작가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인 것 같다. 그래서 하루키를 읽는다는 행위는 무언가 왠지 모르게 있어 보이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 이런 면에서 하루키는 너무 책이 많이 팔려서 폄하되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의 모든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거의 20여년에 걸쳐 꾸준히 그의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나의 편견은 어느정도 극복되었다. 나에게 하루키만큼 신뢰를 주는 고유명사도 드물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은 임경선이 쓴 하루키에 관한 책이다. 임경선이 쓴 하루키의 책이라니. 임경선이 쓴 하루키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느정도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 기대감은 여지없이 충족되었다. 최근 몇 년간 새로 알게 된 작가 중 임경선은 삶을 대하는 태도라는 면에서 가장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가다. 임경선은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 면모가 임경선의 글에도 그래도 드러난다. 임경선이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요조와 임경선의 교환일기> 팟캐스트를 통해 들은 바가 있고,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책에서든 팟캐스트에서든 그전에도 들은 바가 있다. 성실함과 솔직함이라는 두 가지 삶의 태도는 하루키와 임경선 모두에게 발견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과 같은 책은 기본적으로 성실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하루키와 같이 잘 알려진 작가라고 하더라도 그 작가의 작품과 삶을 쫓는 일에는 만만치 않은 품이 들 것이다. 임경선은『어디까지나 개인적인』을 쓰기 위해 상당한 분량의 일본 자료와 영문 기사를 참조하였다. 임경선이 일본에서 유년생활을 보낸 것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과 같은 책을 쓸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을 읽기 전에도 하루키가 작가된 배경이나 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소명의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기는 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일고 당시 내가 느낀 소회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루키가 어떠한 방식으로 소설을 쓰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어떻게 자각하고 있는지는 우리나라에서 문학에 어느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 알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축이다. 하루키는 직업으로서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며 건강을 유지해 나가며 (그러기 위해 운동을 하고 식생활에 신경을 쓰면서) 피지컬 하게 혼자 소설을 묵묵히 써 나간다. 이 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것은 동아시아적 공동체 문화에서 벗어나 있는 철저한 개인으로서의 하루키의 면모이다. 이 면모는 하루키의 소설과 자연인으로서 하루키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여겨진다. 하루키의 일생은 공동체가 요구하는 폭력적인 윤리에 대한 저항이라고 요약할 수도 있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저항의 결과 지금의 하루키라는 거인이 탄생했다.
하루키는 대학시절 와세대대학교에서 극작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책을 좋아해서 책을 많이 읽었을 뿐이다. 하루키가 다른 일본의 독자들과 달랐던 점은 미국 소설을 원서로 많이 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독서는 하루키라는 작가의 가장 결정적인 자양분이 된다. 하루키가 배타적인 일본 문단과 평생 거리를 두게 된 것도 이러한 방식의 독서가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전세계의 독자에게 읽힐 수 있을 만큼 문화적 장벽이 높지 않은 것도 미국 소설을 읽어 가며 일본의 정서에 매몰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내와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재즈를 틀며 바를 운영하던 하루키는 야구장에 갔다가 날아가는 타구를 보고 작가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이 일화에 대해서는 다소 냉소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다. 가령, 소설가 김중혁은 하루키는 원래 소설을 쓰고 싶었던 사람인데 그 경험을 극적으로 에세이에 썼을 것이라는 식으로 말한다(이런 취지로 얘기했을 텐데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왜곡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힌다). 나도 거기에 동의하는 축이다. 재즈 바를 운영하면서 힘들게 소설 한 편을 완성하고 그 소설을 투고한다. 그리고 그 소설이 상을 받았다. 그렇게 하루키는 소설가가 된다.
전업 작가가 된 하루키의 삶을 결정적으로 뒤흔든 것은 『노르웨이의 숲』이 큰 성공을 거두고 난 이후이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성공이지만 태생적으로 외부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렸던 하루키에게『노르웨이의 숲』이 준 성공은 큰 시련을 안겨주게 된다. 가까운 사람들이 시기 질투로 그에게서 멀어지는 한편 하루키에 대한 문단의 멸시는 더욱 심해지게 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하루키의 자전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는 『노르웨이의 숲』을 많이 팔리기 위해 일부러 대중적으로 쓴 것처럼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오랜기간 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게는 자전적인 요소가 깊게 투영되어 있는 작품이 있다. 그 작품을 써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고 독자인 나는 생각하는데, 『노르웨이의 숲』이 하루키에게는 그런 작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키는 좌절하지 않고 일본을 떠나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고베지진과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은 하루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인으로서 자신의 사회적 책무를 이행해야겠다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하루키는 일본 우익이 표방하는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무척 비판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이 나고 자란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는 모른 척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팟캐스트 <문학 이야기>에서 하루키의 소설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지점에 대해 융의 사상과 하루키의 소설이 유사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인간이 상실을 겪은 후에 회복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는 온전한 나가 되는 과정을 하루키가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하루키의 소설이 융의 심리학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신형철은 얘기한다. 최근 하루키의 장편인 『기사단장 죽이기』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역시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들이다.
하지만 하루키가 인생을 무조건 긍정하는 낙관주의자는 아니다. 임경선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관적 현실주의자(242쪽)”라고 얘기한다. “그에게 인생은 ‘어차피 지는 게임’이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늘 뭔가 자신이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되찾기 위해 방황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가능성을 잃어버린다. 그야말로 불확실하고 불안한 보통의 삶을 반영한다(242).” 하지만 하루키와 하루키의 소설 속 인물들은 루틴을 지키며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인 인생을 잘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이들에게 인생은“계속 뭔가를 잃어가기만 하는 절망의 여정이다. 하지만 어차피 허무하게 지는 게임이라면, 기왕이면 규칙을 지키면서 제대로 지는 것이 후회없는 삶이 아닐까(2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