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을 위해 함께 해온 시간을 긍정하기

김연수, 「벚꽃 새해」, 『사월의 미, 칠월의 솔』. 파주: 문학동네.

by 노창희

경영자가 사진부를 외주로 돌리는 바람에 졸지에 프리랜서가 된 성진은 4월 봄날 경주 남산의 사계를 촬영하고 있었다. 거기는 그는 목이 잘린 불상을 보며 정연과 함께 봤던 방콕의 고도 아유타야의 폐사지인 왓 마하탓을 떠올린다. 성진은 그 곳에서 목 잘린 석불을 처음 봤던 것이다. 감상에 빠질 틈도 없이 이미 오래전에 헤어진 정연이 대뜸 전화를 걸어 자신이 선물했던 태그호이어 시계를 돌려 달라고 한다. 황당한 것도 황당한 것이지만 성진은 정연에게 태그호이어 시계를 돌려 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그 시계를 팔아 버린 것이다.


성진이 태그호이어 시계를 팔아버린 사연은 2012년 대선이 치러졌던 그날 밤 거짓말 같이 시계가 12시 54분 49초에 멈추어 버린 데서 출발한다. 수리하는 것도 번거롭고 선물해 준 정연과는 30살이 된 감상을 청산하지 못한 채 충동적으로 이별을 통보해 결국 진짜 헤어진 지 오래인 상황. 성진은 태그호이어를 팔아 버린 것이다. 억지를 부리며 태그호이어를 다시 내놓으라는 정연에게 성진은 민법까지 들먹이지만 다음의 한마디를 듣고 어쩔 수 없이 태그호이어를 찾는 여정에 돌입한다. “그 잘난 민법에 내가 죽는다는 얘기는 안 나온대?(13쪽)”


성진이 태그호이어를 팔았던 시계방으로 찾아갔더니 이미 그 시계는 팔린 상태고, 주인은 어디에 팔았는지도 기억해내지 못한다. 이번에는 성진이 주인에게 억지를 부린다. 그런데 주인은 그 태그호이어가 짝퉁이라며 성진이 기절초풍할 얘기를 한다. 그리고 짝퉁을 매매하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사기 혐의로 3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을 수도 있다고 쿠사리를 먹는다. 결국 성진은 정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시계방 주인에게 되돌려 준다. “그 잘난 법에 내가 죽는다는 소리는 안 나오던가요?(15쪽)”


그 과정을 거쳐 시계방 주인은 황학동의 정시당이라는 가게를 알려주고 성진과 정연은 그곳으로 향한다. 하지만 거기서 발견한 것은 시계가 아니라 토용이고 그 토용으로 인한 정시당 주인의 사연이었다. 토용을 지인에게 선물 받은 주인은 흙으로 더럽혀져 있는 토용을 깨끗하게 씻어서 정시당에 방문한 지인에게 자랑한다. 하지만 토용은 원래 더럽혀서 파는 물건이라고 핀잔을 듣게 되고 그와는 의절하게 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정시당의 주인은 진시황과 중국과 관련된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다. 아내와 중국에 가려고 준비했던 그는 아내가 갑자기 저세상 사람이 되어 가게를 정리하고 혼자 가야 할 처지이다. 정연은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태그호이어를 돌려받는 것을 포기한다. 정연이 태그호이어를 돌려 받는 일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주인의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이런 구석까지 찾아왔대도 그게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는 것이라오(28쪽).”


정연이 성진으로부터 태그호이어 시계를 돌려받고 싶게 된 계기는 뜻하지 않게 실직을 하고 서른이 되면서 자신의 과거도 같이 정리하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태국의 설날인 4월 13일 쏭끄란이 생각났고, 성진과의 과거를 정리하고 새 인생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이 생각을 했던 것은 정연만은 아니었다. 태그호이어를 돌려달라고 떼를 쓰던 정연과 통화하던 중 성진도 “벚꽃이 피기 시작했으니 말하자면 오늘은 벚꽃 새해(18쪽).”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벚꽃 새해」에 등장하는 목 잘린 불상들은 과거의 폐허를 상징한다. 인생의 상당 부분은 사실 폐허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를 먹을 때마다 계기를 만들어 다시 시작해 보자고 마음먹는다. 「벚꽃 새해」는 그러지는 말자고 완곡하게 얘기한다. 지나간 날들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고 헤어진 연인과는 이제 헤어진 연인 사이에 불과하지만 함께한 나날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그러니 과거가 폐허처럼 느껴질지언정 부정하지는 말자고 그렇게 우리에게 얘기한다.


이제 벚꽃 새해가 아닌 진짜 새해가 온다. 다가올 새해에는 새 마음가짐으로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고픈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거쳐온 세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통과했다면 그 시간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헛되지 않은 시간을 긍정하며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어떤 소설은 당연한 명제를 입증하는 데에 서사를 온전히 집중하는데, 「벚꽃 새해」가 바로 그렇다. 함께 해온 세월은 부질없지 않다는 것이 바로 그것. 서른이 된다는 건 한 시절을 통과해 낸다는 의미다. 성진은 통과의례로 바보같이 정연과 이별하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정연이 성진을 떠나보내려 성진에게 찾아온다. 정연이 성진에게 선물해준 테그호이어 시계는 이제 없다. 하지만 부질없지는 않다.“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는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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