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사랑을 믿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 파주: 문학동네.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긴다는 건 일상생활에는 재앙일지 몰라도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다(45쪽).”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사랑을 믿다」를 내가 처음 읽은 것은 2008년이었다. 당시 나는 28살이었고, 이 단편을 읽고 사랑이라는 것이 믿을 만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생각했었는지 아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권여선의 문장만큼은 믿을 만 하구나 탄식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마치 이 소설에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면 내가 “오 그래?”하듯이 문장 하나하나에 탄복하며 이 단편을 읽었다. 한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단편이 생긴다는 건 흘러간 세월을 돌아보며 회한에 젖게 만든다는 점에서 정신건강에는 해로울지 몰라도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다.
20대 청춘남녀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일은 흔하디 흔하고, 그것을 소재로 다룬 이야기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보다 조금 덜 흔한 이야기는 20대에 연인이었던 헤어진 남녀가 30대에 재회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35살이 된 남자가 20대에 자신을 좋아했으나 자신은 끝내 그것을 모르고 지나쳤던 어떤 여성에 대해 술집에서 혼자 회상하는 얘기는 흔치 않다. 더욱이 그것을 씁쓸하게 회상하는 이유가 인연의 아련함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었던 삼층 짜리 건물 때문이라면? 이쯤 되면 「사랑을 믿다」는 사랑을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사랑에 있어 경제관념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한 얘기가 된다. 물론, 권여선의 소설이므로 문제가 그리 간단치는 않다.
이 단편이 가진 서사의 백미는 그녀가 자식을 잃은 큰고모 부부에게 문제의 삼층 건물을 상속받을 목적으로 어머니가 떠밀다시피 하여 잼단지를 건네주러 가는 대목이다. 거기서 그녀는 불행한 세 명의 여자를 만난다. 그들은 삼층 위 옥탑에 있던 철학관의 위치를 착각하고 큰고모 댁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그녀는 거기서 그들의 불행을 엿듣는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다. 자신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못마땅하여 다른 이를 선택한 한 남성과 무거운 잼단지를 두고 큰고모 부부가 죽은 이후 건물을 상속받기를 하염없이 기원해야 하는 이제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청춘의 만종에 대하여.
「사랑을 믿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술 마시는 장면들이다. ‘나’가 혼술하는 장면도 인상적이고 삼년 만에 만난 그녀가 제육볶음과 해물볶음을 반반씩 시켜 안동소주와 맥주를 말아 마시는 것을 묘사하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여기서 나는 그녀에게 실연을 안긴 당사자가 바로 나이며, 그녀가 이제 삼층 짜리 건물의 소유주가 되었음을 듣게 된다. 큰고모 부부가 죽은 것이다. 만약 그녀의 추론대로 나가 경제적 이유로 다른 사람을 선택한 것이라면 나의 선택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사랑을 믿다」에서 나와 그녀가 잃은 것은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그녀는 경제적 이유로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한 남자의 영악함과 남은 생이 불행하지 않도록 누군가에게 속절없이 빌 수밖에 없는 삶의 이치를 깨닫고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나는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의 마음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로 선택한 누군가에게 실연을 당했다. 그리고 자신이 삼년 전에 잃어버린 것이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이었음을 깨닫고는 씁쓸해하는 자신을 보고 사랑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여기서 나와 그녀가 진정으로 상실한 것은 무엇일까? 그건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상징되는 청춘이다.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겼다는 건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지만 청춘에 대해서는 만종과 같다. 사랑을 믿던 한 시기가 끝났으며, 뒤를 돌아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지금 서른다섯이라는 인생의 한낮을 지나고 있다.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이글거리지만 이미 저묾과 어둠을 예비하고 있다. 내 생애의 조도는 여기가 최대치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