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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누리 Jul 24. 2023

술 없는 외식은 돈이 아깝습니다.


매일 관 청소를 하는 청량한 생맥주 전문점에서 크림 거품이 두텁게 덮인 생맥주를 원샷원킬 하는 것은 일상 최대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런 재미를 잃은 지 어언 7개월이지만, 지금도 저는 그때의 그 기분을 대체할 무언가를 찾아 헤맵니다.


오늘 점심엔 소중한 내 몸에 정제 탄수화물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혼자서 무려 탕수육 짜장면 짬뽕 세트를 클리어하고 나니 죄책감이 슬그머니 얼굴을 쳐들었습니다. '알코올 섭취를 제한하는데 왜 뱃고래가 커지는 걸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정갈한 마음으로, 아침나절 불려둔 국내산 콩을 삶았습니다. 그리고 곱게 갈아 콩물로 만들어 냉장고에 쟁였습니다. 이따 저녁은 건강하게 오이 콩국을 먹을 요량입니다.


온라인에는 술을 끊고 뭐가 좋아졌다, 이게 나아졌다, 저게 달라졌다는 성공담들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별로 모르겠습니다. 그러 방금 발견한 차이가 있으니, 그건 바로 냉장고의 상태입니다.




원래 저는 언제 먹을지 모를 정체불명의 것들을 냉장고에 쟁여놓는 행위를 거의 하지 않는 편입니다. 어디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모른 채 사는 방식을 딱 질색하는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7년 동안 사용했던 중고 냉장고를 당근 마켓을 통해 사 가 아주머니는 새 냉장고가 거저라며 엄청나게 좋아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살림을 살다 보면 부모님께서 살뜰히 챙겨서 보내주시는 각종 국, 생선, 문어, 아귀포, 된장, 햇고춧가루, 들깻가루, 참깨, 마늘, 대파 같은 식재료들과 간편하게 요리하기 만만한 냉동 새우, 날치알, 불고깃감, 만두, 돈가스 그리고 아이스크림, 건망고, 곶감, 견과류, 떡, 빵, 약과 등의 간식거리로 냉동실의 70퍼센트는 늘 채워져 있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텅텅 비어있습니다. 냉장실엔 과일과 채소, 치즈와 각종 드레싱류, 몇몇 장아찌류와 방금 갈아 놓은 콩물이 서로 거리를 두고 널찍널찍 떨어져 있습니다. 냉동실에는 마늘, 대파, 고춧가루같이 장기저장이 필요한 것들 몇 가지와 고모께서 주신 자잘한 조기와 울진에서 모셔 온 귀한 몸 반건조 오징어 몇 마리 말고는 든 게 없습니다.


냉장실이나 냉동실 문을 열었을 때 광고에서처럼 하얀 냉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풍성함이 고급스럽게 느껴져서 좋습니다. 크림 생맥주의 거품보다 더 크고 웅장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외식 횟수가 줄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저는 술을 마시기 위해 외식을 했습니다. 감성적인 날은 사케를 마시기 위해 은은한 조명의 일식집을 찾았습니다. 축하할 날은 와인을 마시기 위해 스테이크 전문점이나 화려한 샹들리에가 인상적인 비스트로를 방문했습니다. 화이트 와인을 마시기 위해 태국 요리 집엘 가기도 했습니다.


우리 동네 구도로 치즈 폭탄 그릴 통닭과 생맥주의 궁합은 환상이었습니다. 중국집 최애는 향기로운 공부가주와 감칠맛이 일품인 유산슬이었습니다.


장마철엔 밥 대신 막걸리를 걸치러 전집이나 홍어 삼합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1급 발암 물질인 알코올을 그렇게나 애정 하면서도 최근 한창 이슈였던 아스파탐은 거르겠다고 느린 마을 막걸리를 싸 들고 다니며 마시기도 했습니다.


가을에는 칠링 와인을 보랭병에 담고, 치즈와퍼를 포장해서 올림픽공원으로 피크닉을 갔습니다. 까슬까슬한 햇살과 와인이 내 안에서 한꺼번에 부서지는 고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술을 마시지 않으니, 밖에 나가서 먹을만한 게 없습니다. 밖에 음식은 다 그저 그렇습니다. 지나치게 니다. 식재료 품질도 직접 장만한 것들과 비교하면 초라합니다. 게다가 시끄럽습니다. 조용한 식당은 쓸데없이 비쌉니다. 집만큼 프라이빗 한 공간이 없습니다.


술 없는 외식에서 메리트를 느낄만한 구석을 찾기 어렵습니다. 술도 없는데 굳이 피크닉을 나가기도 귀찮습니다. 집에서 편안하게 식사하고 공원에 나가 걷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정리하자면, 술 없는 외식은 재미없어서 돈이 아깝습니다. 그러다 보니 냉장고 파먹기가 시전 되었습니다. 게다가 알코올을 제한한 후부터 당질 킬러가 되어 냉동실에 주전부리가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아주 넉넉하고 신선한 냉장고를 갖게 되었습니다.


내일은 부모님께서 직접 농사지어 보내주신 튼튼한 유기농 가지에 통통한 새우를 곁들굴 소스로 간을 한 볶음 요리를 해 먹을 예정입니다. 그러면 냉장실 야채 칸이 더 여유로워지겠네요. 단주 7개월 차의 저는 냉장고를 품위 있게 사용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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