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를 읽고 by 알베르 카뮈
1. 서론
“페스트”는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로 유명한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의 작품이다.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 이전 작품인 “이방인”에서 이미 실존주의 작가로 명성을 날렸고, “페스트”를 출판하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러한 명성을 바탕으로 알베르 카뮈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알베르 카뮈는 노벨 문학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상업성도 인정받았다. “페스트”는 번역본을 제외한 프랑스어 판만으로 5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처럼, “페스트”와 “이방인”은 고전일 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의 선택을 받은 소설이다. 그렇다면 “페스트”의 매력은 무엇일까?
우선 “페스트”와 “이방인”은 소설의 전개 방식에서 매우 다른 점을 가진다. “이방인”은 뫼르소라는 인물의 행동을 통해서 인간 실존의 의미를 탐색한다. “이방인”은 매우 읽기 어려운 소설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미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는 뫼르소가 극을 이끌기 때문이다. 빛의 반사 때문에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어머니 장례식에서도 슬픔을 느끼지 않는 뫼르소의 행동은 독자가 공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뫼르소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통해 우리는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게 되고, 결국 그의 입장에 공감하게 된다.
“페스트”는 우리 일상의 이야기가 소설을 전개한다. 타인의 불편함을 이용하는 코타르, 끝없는 신에 대한 신념을 보여주는 파늘루, 그리고 자신을 돌보지 않고 환자를 돌보는 리유 등은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 봉쇄 시기에 이미 경험했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페스트”와 “이방인”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리 다르지 않다. 다만 차이라면, “시지프 신화”가 개인의 반항을, “반항하는 인간”이 연대를 통해 인류의 반항을 보여줬듯이, 개인과 연대한 인류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페스트”는 어떠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는지 같이 알아보자.
2. 줄거리
“페스트”는 역사가가 역사를 서술하듯이 특정 인물이 서술하는 형식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그는 오랑시에 대한 묘사로 소설을 시작하는데, 다소 부정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오랑은 도대체 무엇 하나 튀는 것이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프랑스령 알제리의 한 도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평범한 장소도 아니고, 정원과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 도시도 아니다. 이곳은 일종의 중간 지대에 위치한 무미건조한 도시다."
"도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상업 활동과 돈에 대한 관심이다. 주민들은 거의 매일 일에 바쁘고, 여가라고는 상점에서나 집 안에서 즐기는 것이 전부다."
이처럼, 중립적 입장에서 오랑시를 묘사하는 듯싶지만, 실제로는 다소 부정적이다. 평범하고 무미건조하지만 자본주의에 종속된 도시의 모습이 오랑시다. 이러한 오랑시에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갑작스레 들이닥친다. 오랑시의 의사 리유는 자신의 병원에서 죽어있는 쥐들의 모습을 보고 불안감을 느낀다. 이러한 불안감이 현실로 나타나 예상치 못한 전염병의 재출현에 시 당국은 혼란에 빠진다. 시 당국은 전염병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지만, 외면하지 못하는 순간 다른 도시의 안전을 위해 오랑시를 봉쇄한다.
봉쇄된 오랑시는 불안에 휩싸인다. 시에서는 오랑시 내에 최대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충분치 않다. 이에 오랑시에 머물던 타루는 의사 리유에게 봉사대를 꾸릴 것을 건의한다. 리유는 흔쾌히 허락하고 이들의 봉사대에 하급 관료 그랑이 합류한다. 그랑은 부당 계약으로 하급 관료로 머무르는 인물로, 밤에는 소설을 쓰는 인물이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같이 살고 있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내를 떠나보내고 고독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랑은 의료 봉사대의 서기로 일하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한다.
오랑에는 랑베르라는 신문기자도 있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오랑시를 떠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자기는 오랑시와 관계가 없고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오랑시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갖가지 편법으로 떠나려 했지만 실패하고 좌절하던 중, 리유의 아내 또한 외부 요양원에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던 중,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지만 “나만 행복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며 오랑시에 남아 봉사대의 일원이 된다.
존경받는 신부 파늘루 또한 봉사대에 합류한다. 하지만 파늘루는 강력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 “페스트”는 신이 내린 형벌일 수 있기에 우리는 받아들이고 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신념과는 무관하게 그는 봉사대의 일원으로 타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의사와 봉사대의 노력과 무관하게 페스트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그러던 도중 예심판사 오통의 아들이 페스트에 걸리게 되고 리유는 치료할 가망이 없게 되자 그에게 새로운 혈청을 실험한다. 오통의 아들은 새로운 혈청을 투여받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에 리유는 분노하고 파늘루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파늘루는 어린아이의 죽음을 경험하고 “과연 신부는 의사에게 진찰받을 수 있는가?”라는 논문을 쓴다고 리유에게 말한다. 그리고 리유에게 자신의 예배에 참여하기를 권하고 리유는 참여한다. 파늘루는 예배 연설에서 “인간은 신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 모른다. 불합리한 일도 벌어진다. 하지만 신의 의도를 의심치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다. 따라서, 신을 믿어야 한다”라고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 후, 파늘루는 결국 페스트에 걸리고 의사의 진료를 끝까지 거부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페스트에 사람들은 지쳐가고 끝내 페스트는 그랑마저도 침상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다음 날, 그랑은 호전되고 어떤 여성 또한 페스트에 걸렸다가 호전된다. 다음 날 길거리에 다시 쥐들이 나타난다. 예전에는 더럽고 불결한 존재였던 쥐들이 살아 돌아다니는 것에 오랑 시민들은 환호한다. 페스트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페스트가 사라지고 오랑시의 봉쇄가 풀리면서 좋은 소식들이 들려오지만, 의료 봉사대의 일원 타루가 페스트에 걸린다. 그는 끝내 페스트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타루를 끝까지 간호하던 리유에게도 불길한 편지가 전달된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요양원에서 끝까지 병마와 싸웠지만 이겨내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지게 된 것이다. 리유는 타루와 그의 아내의 죽음에 슬퍼하지만, 오랑시에는 기쁨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3. “반항하는 인간”과 “페스트”
“반항하는 인간”은 알베르 카뮈의 철학책이다. “반항하는 인간”은 세상에 반항해 왔던 인류의 역사를 그려낸다. 하지만 “반항하는 인간”은 인류 반항의 역사에 비판을 가한다. 대부분 인류 반항의 역사는 인간을 수단으로 삼고 역사의 약속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 힘없는 타인을 살해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반항과 폭력을 수반하는 반항의 모순을 고발했다. 특히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공산주의는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생각하에 인간을 수단으로 생각하고 타인에 대한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한, 타인의 목소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절대적 진리라는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을 상정했기에 인간 그 자체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카뮈는 오히려 인간 개개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서로 연대하는 것이 정치적 부조리에 맞서는 진정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페스트”는 “반항하는 인간”의 비판 의식을 소설 안에 녹이고 있다. “페스트”는 부조리다. 어느 날 눈뜨고 일어났더니 거부할 수 없는 병마가 내 주변을 휩쓸고 내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페스트”는 억압적 정치제도, 모순적 신분제도와 같다. “페스트”에 대항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파늘루는 종교적 대항을 선택했다. 시 당국은 관료제를 이용한 반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리유, 타루, 랑베르 그리고 그랑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서로 연대하는 방법을 택했다. 알베르 카뮈가 봤을 때, 반항이란 체제의 변화나 새로운 사상의 도입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라고 해석한다. 체제의 변화는 많은 희생을 동반하고 새로운 사상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부정한다. 알베르 카뮈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인간적이다. 모든 인간이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협력하는 반항, 그리고 그 안에서 꽃 피우는 유대가 유토피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정치적 억압은 항상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다. 특정 이데올로기를 처음부터 추종한 창립 멤버들은 사상적 정통성을 이유로 더 큰 특권을 누리게 된다. 이데올로기는 사상적 정통성을 추구한다. 우리의 이데올리기가 다른 이데올리기보다 뛰어나기에 우리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사회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공산주의를 예를 들며, 공산당의 이데올로기는 프롤레타리아를 유토피아로 인도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험하고 어렵기에 이데올리기를 추종하고 정통한 사람이 당의 지도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지도자 그리고 특권층이 된다.) 특권을 경험한 인간은 그 특권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승자는 자기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생각을 억압하고 필요하다면 폭력을 사용한다. 이미 스탈린식 공산주의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모인 정치 세력은 체제의 변화와 함께 체제를 공고한다. 따라서, 정치적 부조리에 대한 진정한 반항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유대와 자유에 기반이 되어야 한다.
4. 종교적 구원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과 “페스트”에서 종교적 구원에 대해 비판한다. “시지프 신화”에서처럼 종교에 귀의해 부조리를 벗어나려는 것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적 구원은 두 가지 면에서 모순적이다.
첫째, 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한다. 파늘루 신부 또한 마찬가지다. “페스트는 우리에게 내리는 신의 형벌이다. 받아들여라.”라는 그의 첫 연설은 어떠한 논리적 설명도 없다. 우리가 만질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절대자 신이 내린 형벌에 어떻게 우리가 질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조건적인 믿음은 자유와 의지를 가진 인간이 주체적으로 행동할 자유를 박탈한다. 우리의 행동은 어떠한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 파늘루 신부는 두 번째 연설에서 이것이야말로 신앙심이라고 말한다. 특히 “신부는 의사의 진찰을 받아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내린 “노”라는 대답은 그를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만약 신부가 살아있고 이전처럼 봉사대에 남아있었더라면 더 많은 축복을 우리에게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믿음과 결합한 부조리는 인간의 주체성을 파괴하고 인간 스스로 만든 축복을 걷어간다.
둘째, 종교적 구원은 절망에 빠진 인간이 보는 세계가 아니라 다른 절대자가 봤을 것 같은 세계로 인간을 구원한다. 절망에 빠진 인류, 어떠한 행위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인간을 종교로 귀의시킨다. 이런 인간은 스스로 세상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보는 세상은 이미 절망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에 대한 구원은 절대자가 재창조한 세계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세상은 종교적인 행동과 이해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이는 매우 불합리하다. 애초에 인간을 자유와 주체적으로 창조한 절대자가, 절망이라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자유와 주체를 박탈한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자유와 주체성을 부여한 이유는 무엇인가? 혹자는 자유와 주체성이 있어야 인간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모순이다. 자유의지로 시험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이 자유의지를 이용해서 비도덕적 행위를 하느냐인 것이다. 하지만, 종교적 믿음은 도덕성에 대한 시험이 아니라 구원 가능한 세상을 보는 시선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종교적 구원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시각적 영적 능력을 부여하지 않았고 이는 그들을 절망으로 이끈다. 페스트와 같은 절망 속에서 종교적인 추구는 무조건적 믿음을 요구한다. 이는 여전히 종교적 구원의 세계를 볼 수없지만, 신의 생각하는 구원으로 귀의하는 것이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신은 인간에게 구원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지 않은 채, 절망만을 준다. 그리고 여전히 그런 능력은 없지만, 무조건적인 믿음을 통해 대리로 구원되는 것이다. 이는 신이 인간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신의 창조물 또한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신의 능력이 모자라든가, 아니면 인간에게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5. 부조리에 대처하는 자세
위에 설명한 것처럼, “페스트”는 유대와 일상생활을 통한 “반항”을 부조리에 대항하는 우리의 자세라고 묘사한다. 리유, 타루 그리고 그랑은 깊은 유대와 일상생활에 전념하면서 페스트와 싸워나간다. 그리고 그들의 자세는 랑베르와 오통의 태도 또한 변화시킨다. 유대와 일상의 삶을 통한 “반항”이 반항이 되는 이유는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이기적이라고 표현한다. 남보다 더 잘살고 싶은 이 “이기심”이 인간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기적이기 이전에 이타적이다. 물론 특정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나와 관계있고 교류가 있는 존재들에 이타적이다. 따라서, 유대가 중요하다.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다른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공통된 목적을 가질 수 있는 유대는 어떠한 이데올로기보다 인간적이다. 유대는 타인과의 거리를 좁히고 타인을 이해하게 만든다. 타인의 기쁨에 웃고 타인의 슬픔에 슬퍼하는 존재가 된다. 어린아이의 죽음에 진정으로 슬퍼하고 그런 어린아이의 죽음을 당연한 희생양으로 받아들이는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에 반항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유대를 통한 반항은 효율적이지 않다. 유대를 통한 반항은 서로 이해하고 공통된 목표를 정하기에 폭력에 반대한다. 폭력으로 멀어지기보다는 유대를 통해 가까워지기를 원한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의 반항은 긴 호흡을 요구한다. 억압적 부조리의 긴 호흡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은 일상생활에 전념하는 것이다. 특별하지 않지만, 내가 이제까지 쌓아 올린 나의 일상생활은 단조롭고 정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특별하다. 나의 일상생활에서만 나를 발견할 수 있고 나의 일상생활이 개인을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개인의 역사는 일상생활이 쌓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책을 쓰는 그랑처럼 어려움을 견뎌내고 나를 발견하는 일상생활에 전념할 때만 긴 호흡으로 부조리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부조리는 우리에게 감당하지 못하는 슬픔을 선사한다. 하루아침에 죽어버린 사랑하는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고 등은 큰 슬픔이다. 슬픔이 크면 클수록 그에 대한 반응 또한 커진다. 부조리는 감당하지 못하는 슬픔을 통해 우리의 반항하는 삶을 방해한다. 유대를 끊어내고 과격하고 효율적 행동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이용해 우리를 더욱더 옭아맨다. 아이러니하게도, 단조롭고 정적인 일상만이 우리를 부조리와 슬픔의 늪에서 보호할 수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은 우리의 개인적 역사의 지평에 서서히 스며들 뿐, 그 역사를 단번에 파괴하는 폭탄은 아니다. 일상생활에 집중하고 그 안에 녹아진 나를 존중할 때만, 슬픔에 좌초되지 않고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다.
6. 결론
“페스트”는 인간이 부조리에 대항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 소설이다. “인간은 유대와 타인에 대한 이해를 하고 묵묵히 현재를 살아갈 때만 부조리에 대항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 혹은 폭력을 동반한 영웅주의적 반항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퇴색시킨다. 그리고 페스트라는 부조리는 언제나 우리 근처에서 우리가 약해질 때만을 기다린다.”는 것이 그의 메시지다. 현대 사회에도 부조리는 항상 우리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연대가 쉽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자본으로 재단하고 판단하기에 다른 생각을 가진 인간이 타인을 공감하기 어렵다. 타인과 비교하고 타인보다 우월하고자 하는 우리의 이기적 본능이 유대라는 감정을 파괴하고 있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적 감정과 인간적 공감 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유하는 인간은 유대를 추구할 것이고 이는 우리의 희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