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황정은 작가는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마더”로 한국 소설가로서 등단한 후, 대한민국 소설계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그녀는 『야만적인 앨리스 씨』, 『파씨의 입문』 등 많은 소설을 발표했으며, 작품 속 폭력과 약자에 대한 독특한 시각으로 독자들의 열렬한 기대를 받아왔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며, 황정은은 『디디의 우산』이라는 깊이 있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녀는 “세월호 사건을 경험하고 ‘죽음’이라는 주제를 쓰지 않으면 다시는 소설을 못 쓸 것 같았다고” 고 말했다. 그리고 ‘디디의 우산’을 집필했다. 이는 “디디의 우산”이 죽음과 상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디디의 우산”은 d와 dd의 사랑 그리고 dd를 잃고 난 후의, d의 모습 속에서 자본주의와 그 안에서의 상실과 애도에 대해 쓰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와 거기서 변질되어 버린 우리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지만, 끝내 d를 통해 사람이 가진 희망을 쓰고 있다. 그녀의 사물과 육체에 대한 독특한 철학적 해석은 다른 작품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여운과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서 절망뿐만 아니라 인간다움과 희망을 보여준 “디디의 우산”에 대해 같이 알아보도록 하자.
2. 줄거리
“디디의 우산”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목수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d는 어느 날 우연히 dd를 만난다. 그들은 비 오는 날 낙뢰를 같이 보고 같은 우산을 쓰고 집으로 간다. 몇 년 후, 사회생활을 하다 둘은 동창회에서 만나고 d와 dd는 교제하게 된다. 둘은 목동에서 집을 얻고 동거생활을 하던 중, dd가 버스에서 사고로 죽게 된다. 그 후 d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다가, 집주인 김귀자가 호스피스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가고 사위에 의해 쫓겨난다. d는 고시원으로 들어가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세원상가에서 택배 아르바이트를 한다. 거기서 여소녀와 교류를 하고 dd의 음반을 듣기 위해 빈티지 오디오를 사게 된다. 집에서 “혁명”이라는 책을 발견하고 책의 주인 박순조를 만나 광화문 일대를 걷는다. 그들은 세월호 시위대를 막기 위해 사용된 경찰버스 벽에 둘러 쌓여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작별한다. d는 오랜만에 본인의 집을 방문하고, 예전에는 혐오스럽고 역겹기만 했던 부모들의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게 된다.
3. “디디의 우산”의 의미
“디디의 우산”에서 유독 주인공만 d와 dd라는 소문자 이니셜로 표기되고, 나머지 인물들은 김귀자, 여소녀처럼 이름이 붙는다. 이 차이는 우연이 아니라 분명한 서사적 의도가 담긴 장치이다. 먼저, d와 dd의 만남은 번개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둘의 첫 만남에 번개가 쳤고 둘은 번개를 같이 본다. 그 후, d는 번개를 본 기억은 있지만, 누구와 봤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dd만이 번개와 dd가 d에게서 우산을 빌려 쓴 것을 기억하고 둘은 교제하게 된다. 이 설정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한 사랑의 기원을 연상시킨다. 헤드윅의 “The Origin of Love”에도 잘 묘사된 이 신화에 따르면, 원래 인간은 네 개의 팔과 다리,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완전한 존재였다. 그들은 360도를 볼 수 있고 매우 영특해 신들에 대항할 정도로 강했는데, 이에 제우스는 번개를 이용해 둘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사랑은 원래 하나였던 인간이 번개에 의해 잃어버린 반쪽 사랑을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d와 dd는 원래 하나였다. 하지만, d와 dd로 나누어졌다. 이들의 처음 만남에 번개를 보고 다시 서로의 삶을 사는 것이 “향연”과 유사하다. dd의 이름에 d가 두 번 반복되는 것은 그녀가 또 다른 d를 품고 있으며, 둘이 본래 하나였음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음을 암시한다. 기억이 더 많은 dd는 d에 호감을 느끼고 예전 이야기를 하면서 접근하고 둘은 교제하게 된다. d는 dd를 만나기 전까지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조차 몰랐다. 그러나 반쪽을 찾은 이후, dd와의 시간 속에서 처음으로 삶의 고귀함과 충만함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dd가 죽자, 다시는 자기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반쪽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진다. 이처럼 d와 dd는 떨어진 반쪽과 인연 그리고 그 반쪽을 잃었을 때의 상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제우스가 인간의 능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번개로 반으로 가르는 것은 자본주의의 억압을 표현한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을 비효율적이라는 명목으로 배제하거나 소외시킨다. 그들은 자본주의하의 교육과 사회 그리고 문화를 통해 부적응자의 꼬리표를 달고 사회에서 소외된다. 이는 제우스가 완전한 사람들의 능력이 두려워 그들을 반으로 가르는 것과 유사하다. d와 dd라는 인물을 통해 황정은은 “사랑이란 무엇인가?” 와 우리를 가두는 체제에 대한 묘사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산은 무엇인가?
뒤에 설명하겠지만, “디디의 우산”에서 묘사되는 우산은 낭만을 대표하는 물체다, 자본주의는 효율성을 추구하고 효율적이지 않은 인간은 단죄한다. 비효율적인 인간은 사회에서 소외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혐오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d와 dd가 함께 쓴 우산은, 비를 막는 기능을 넘어선 타인을 위한 젖음을 감수하는 행위, 즉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사랑의 윤리를 상징한다.
결국 “디디의 우산”은 제목을 통해 존재의 결핍에서 시작된 사랑이 어떻게 개인을 충만하게 하는지 그리고 상실을 경험한 인간이 체제에 의해 어떻게 억압하는지, 그리고 그 억압을 어떻게 벗어나는지를 이야기함을 보여준다. “디디의 우산”은 단순한 연애서사가 아니라, 인간이 사랑과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 자기를 채워가고 성장하는 인간의 여정이다.
4. 자본주의의 억압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결합을 통해서 성장하는 정신의 여정을 보여준다. 의식의 단계로 시작해서 자기의식으로 가고 이를 넘어 이성과 정신의 단계로 다다른다. 모든 단계에서 진리의 보편성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그 안에 피어나는 특수성에 의해 좌절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인간 정신 여정의 정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보편성과 특수성의 대립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에는 보편적 인간에 선호되는 특수성이 성공으로 가는 조건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특수성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품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원이 유한하기에, 모두가 가질 수 없는 ‘희소한 제품’은 선호의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는 이 희소성을 기회로 삼아, ‘특수한 효용’을 갖춘 상품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보편성 즉 효율적이지 않은 특성은 도태된다.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가장 보편적인 자연법칙화 되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상은 모두를 불쾌하게 만든다. 이것이, 자본주의 억압의 특징이다.
“디디의 우산”에는 자본주의로부터 버림받은 특수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소설의 주를 이룬다. d의 아버지 이상근은 목수라는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지만, 효율적인 목수는 아니다. 이상근의 제품을 사간 소비자들은 항상 이상근에게 불만을 표한다. 모든 인간이 같은 제품을 보더라도 다른 관념을 가지기 때문에 결과물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집중력, 정신 그리고 손가락의 섬세함 모두 다르다. 따라서, 노동은 획일적일 수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획일적 가치를 요구한다. 화폐라는 보편적 척도가 모든 사물의 가치를 균일한 가격으로 매기기 때문이다. 내가 준 5천 원은 5천 원의 가치를 가져야 하고 이는 모든 물건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평가 방식은 이상근의 특수성을 무시할 뿐 아니라, 그가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서 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당하는 원인이 된다.
김귀자 또한 마찬가지다. 김귀자는 한국전쟁 피난민으로 피난당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녀는 자기 등뒤에 싸맨 아기의 머리가 폭탄에 터져 죽은 것을 경험했고 남편과 생이별했다. 이를 경험한 그녀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녀와 d의 첫 만남은 d가 그녀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게 했다. 은행거래를 통해 방세를 지불하는 보통의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직접 돈을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서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김귀자는 문뒤에서 돈을 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d가 김귀자에게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기 아버지처럼 김귀자도 자본주의에 초대되지 않는 특수성을 가진 것이다.
dd의 죽음으로 이별한 d 또한 사회로부터 외면당한다. d에게 dd는 반쪽이나 다름없었다. 반쪽을 잃은 d는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사회와의 단절을 택했고, 곧 해고라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해고란 자기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할 수 없음을 말한다. 반쪽을 잃은 사람에게 3일간의 휴가 후, 직장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은 잔인하다 못해 비 인간적이다. 칩거한 d에 대한 부정적 사회의 시선은 d가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게 했고 그는 버스에서 버스기사에게 운전을 똑바로 하라면서 욕설을 퍼붓는다. d는 체제에 순응하지 않아 아픔을 치유하지 못했고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d가 더욱 사회와 멀어지게 만든다. 그는 새로운 보금자리인 고시원에서도 문제를 겪는다. dd와 즐겨 듣던, 음악으로 스스로 치유하고자 했지만 고시원에서 음악생활은 허용되지 않는다. 음악을 틀고 주변사람들이 벽을 친다. d는 웃었지만, 끝내 그는 오디오를 세원상가로 가져오게 된다.
4-1. 노동이란?
노동이 인간에게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가?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노동은 정신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노예는 주인이 시킨 노동을 하지만, 자신의 관념이 실재화되는 것을 본다. 노예가 가지는 생각과 사회의 차이는 인간을 노동하게 하고 스스로 변화를 일구어 내는 사회변화의 주역이 된다. 반면에, 한나 아렌트에게 노동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 헤겔이 산업혁명기의 참혹한 노동 현실을 보았다면, 노동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계를 위한 필사적인 노동은 발전의 원동력이기보다는 생명을 갉아먹는 행위로 느껴진다.
오늘날의 노동은 변화의 원천일까, 아니면 생명을 좀먹는 소모적 행위일까? 우리 시대의 노동은 이 둘의 중간쯤 되는 것 같다. 만약, 내가 좋은 교육을 받아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의 주역이라면, 변화의 원동력이다. 나의 발명품이 세상을 변화시키면 부와 명예를 얻게 된다. 이는 사람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반면에, 저임금 노동자들은 비록 산업 혁명 초기보다는 나은 상황이지만 그들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일을 해도, 존경은커녕 삶에 쪼들리고 주변과 가족의 원망을 사게 된다.
산업 혁명 후, 불타오르는 공산주의의 물결을 본 서방의 정부들은 사회보장제도를 탄생시킨다. 사회보장제도는 지금의 최저임금, 연금, 건강보험 등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는 어떤 직업을 선택하더라도 기본적인 삶은 영위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하지만, 육체적 만족이 인간을 풍요롭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적 만족이 결핍된 육체적 만족은 인간을 병들게 한다. 멀쩡한 육체가 주는 가능성을 포착하지만,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밑바닥에서 허우적 대는 인간의 절망감은 이루말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체제 모든 사람들이 스티브잡스나 일론 머스크처럼 세상을 바꾸는 노동을 할 수 없다. “디디의 우산”은 d가 dd를 만나고 나서 변화를 통해 긍정적 노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작은 해답을 내놓는다.
“d는 dd를 마나 자신의 노동이 신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길수 있는 마음으로도 인간은 서글퍼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d는 자신의 노동을, 희망도 가치도 느낄 수 없던 아버지의 노동과 동일시했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어떤 가치도 없는 노동. 하지만, dd와의 사랑은 d가 자신의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게 했다. d의 노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dd와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d에게 돈이나 명성이 목적이 아니라, dd와의 사랑을 유지하고 삶에 활력을 주기 위해 노동이 사용되는 것이다. 이 경험은 사회보장제도나 금전이 줄 수 없는 깊은 정신적 충만감을 d에게 안겨주었다.. 현재사회에서 노동의 의미란, 여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노동이 돈과 명예를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인간의 목적은 돈에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에서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될 수 없다. 민주주의와는 다르게 자본주의는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에서 유지된다. 모두가 부자가 된다면, 그 누구도 부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이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시스템인 것이다. (대형차를 타는 사람이 우월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비교 대상으로 삼는 누군가가 열등한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다르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 혼자 사랑할 수 있는가? 내가 사랑해서 행복하면 나의 상대 또한 사랑하기에 행복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상대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의 상대의 주변인물들 또한 행복해야 한다. 이처럼, 노동이 돈을 벌고 성공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랑이란 개인적 감정을 충만하게 했을 때 의미가 생긴다.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시장에서의 보상은 도덕적 가치 판단과 무관하다고 말했다. 누군가가 부자가 되는 이유는 절대적 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적으로 지금 상황의 수요에 충족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그리고 죽음은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유한하고 우연적 운명의 속박에 사는 인간이 우연적인 가치를 자신의 최고 가치로 두는 것은 모순적이지 않은가? 이러한 가치는 인간을 온전하게 만들지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지도 않는다.
d는 가족을 방문하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d는 dd를 잃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 속에서 자본주의적 삶의 무상함을 느끼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느낀 것이다. 찌른내, 작은집, 비벼 먹는 밥등 어떤 것도 물질적으로 충분하지 않지만, 전혀 다른 두 인 간이 서로에게 부대끼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그 인간의 흔적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노동의 가치이다.
4-2 자본주의의 자연법칙화
체제는 자신을 의심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연’의 이름을 빌린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변할 수 없다’는 뜻으로 바뀌고, 그 순간 어떤 체제도 ‘운명’처럼 받아들여지게 된다. 자본주의는 아담스미스 이후로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라고 간주했다. 그리고 이기심은 나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돌아가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명명했다. 인간 자체가 이기적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승자와 패자는 존재할 수밖에 없고, 패자를 비참하게 하는 경제 또한 정당하다.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권은 자본주의의 핵심 가치로 떠받들어졌고,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주의가 소련과의 냉전에서 승리하면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하나의 선택지가 아닌 ‘역사의 종착점’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바닥에서부터 새로 만들 수는 없고 수정자본주의처럼 뼈대는 유지하고 조금의 변형만 가능했다.
또한, 자본주의는 자연법칙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 종착점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변화를 추구하기 힘들다. 북한군 전투기 조종사 이응평은 불량품을 교환해 준다는 라면 봉지의 글을 보고 북한 체제에 분노와 환멸을 느낀다. 우리는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남한은 라면을 쌓아두고 산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다. 그리고 그 분노와 환멸은 이응평이 남한으로 귀순하는 이유가 된다. 체제에 대한 분노와 환멸은 비교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역사의 종착점이라면 그리고 자연법칙에서 유래했다면, 환멸을 느낄 수도 없고 느꼈다고 하더라도 갈 곳이 없다.
“디디의 우산”은 자본주의의 자연법칙화에 균열을 낸다. 유정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를 “낯설게 하기”라고 명명했다.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개념이나 현상을 낯선 시선에서 봄으로서, 친숙함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d는 김귀자가 호스피스 치료를 위해서 병원으로 떠나고 사위로부터 원래 이랬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d가 느낀 ‘원래 그랬어요?’라는 말에 대한 불편함은,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의심하지 않게 된 자본주의의 사유 개념에 작지만 뚜렷한 균열을 가한다. 루소는 자본주의가 아무도 없는 토지에서 대범하게 “나의 소유”라고 외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폭력적 기원은 이후, 제국주의와 강대국 간의 땅따먹기로 전락하고 만다. 국가 내에서도 정치와 결탁한 세력들 그리고 현대식 자본주의 법이 세워지기 전에 법을 무시한 부자들이 불법적으로 취득하고 형성한 것임을 의심할 수 없다. 물론, 합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취득한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기원과 생성에서 폭력적인 방법이 사용되었다면, 이자체가 정당성을 얻기는 어렵다.
5. 세운상가와 인간의 영혼
세운상가는 저물어 가는 한 세대를 상징한다. 한때는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와서 개회사를 할 만큼, 번영의 상징이었으나 지금은 한물 간 기술자들이 남아있는 건물이다. 건물은 낡고 그 안에 기술들은 세련되지 못하며, 시장에서 찾지 않는 물건들만 팔린다. 여소녀에 따르면, 세월의 변화에 적응한 사람들은 떠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만 남았다고 한다. 이는 인간의 몸과 영혼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의 몸도 늙고 변화한다. 여소녀가 몸이 약해지고 이빨이 빠져 임플란트를 한 것처럼, 젊음은 영원하지 않다. 건물이 낡고 유행에서 지나면 사람들은 떠나지만, 인간의 영혼은 그러지 못한다. 인간의 영혼은 늙고 쇠퇴하는 몸과 함께 평생을 같이 한다.
떠나지 못하는 인간의 영혼과 늙어가는 몸이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듯싶지만, 오히려 “디디의 우산”은 희망을 말한다. “디디의 우산”을 관통하는 주제인, 상처받은 인간의 화해와 구원은 오직 상처받은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상실을 경험하지 못한 인간은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상처받은 인간의 영혼은 비정상으로 만 보인다. 하지만, 상처를 받은 인간은 육체를 떠나지 못하는 영혼처럼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비정상적인 사람에게서 그것을 촉발한 상처를 본다. 자신이 타자에게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싶은 것처럼 그들은 타자의 상처를 보려 하지 않고 단지 듣고 교류하려고만 한다. 이는 유한한 육체에 갇혀 끊임없이 변화를 겪어야만 하는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병들어 가는 육체를 떠날 수 있다면, 상처는 극복해야 할 것이지 보듬고 같이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d에게 손을 내민 김귀자와 여소녀 모두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들이었고, d는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상처를 품고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된다.
하지만, 세운상가의 재생프로젝트가 세운상가의 기술자들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소비자에게 소비되는 것처럼 상처 입지 않은 인간은 상처 입은 인간을 지금 사회에 맞게 변화시키려고 한다. 이에 여소녀는 분노했던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청계천 재생 프로젝트”는 청계천을 시민들에게 돌려준 것이 맞다. 하지만, 청계천은 이제까지 그곳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자기 몸으로 부대낀 사람들을 소외하고 새로운 청계천으로 변했을 뿐이다. 이는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방법이 아니라, 단순히 상처를 없애고 새 살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재생”은 본래의 것을 되살리는 의미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지워내는 방식의 재생은 인간의 흔적을 지우고, 과거와 현재의 이어짐을 파괴한다. 세운상가의 먼지 낀 기계들과 사라진 기술자의 손길처럼, 그것은 누군가의 과거를 잊은 채 미래를 독점하려는 폭력이다.
6. 인간의 사물화와 사물의 인간화 그리고 낭만
인간은 상실을 경험하고 사물화 된다. 여기서 말하는 사물화란 인간이 감정과 생각을 잃고 단지 살아있는 물체로 전락함을 뜻한다. 상실은 인간의 정서와 존재를 잠식하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상처에 압도된 인간은 감정과 생각을 버리면서 그 기억을 지우려고 한다. d가 dd를 잃고 처음 몇 달은 칩거하고 그 후에 하루 12시간 동안 강도 높은 육체적 노동을 한 이유도 기억을 지우려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또한 인간을 사물로 만든다. 위에 언급한 대로, 자본주의는 인간의 특수성을 말살하고 자본주의적 보편성을 따르는 인간을 중시하다. 그리고 이런 보편성에 어긋나는 감정과 생각은 시장 참여자들이 지우기를 바란다. 사회보장제도가 효율성 논리 앞에 인간의 생명을 살릴 가능성을 외면하는 사례가 바로 그 예이다. 그리고 획일화된 인간은 획일화된 욕망을 사물로 채우려고 한다.
이처럼, 상실과 자본주의는 인간을 사물로 취급할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실을 경험한 d 또한 사물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물화 된 인간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은 사물이다. d는 dd의 기억을 책과 음반에서 찾았다. dd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모든 짐들을 dd의 가족에게 돌려보냈지만, love me tender에서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dd의 흔적을 느낀 것이다. 대량 생산된 사물은 모두 같은 사물처럼 보이지만, 이를 사용하고 쓰고 품었던 인간에 의해 변형된다. d는 dd의 신발에서 dd를 찾는다. dd가 신어 주름지고 걸음걸이에 따라 굽이 다르게 닳았던 그 신발. 그리고 이는 상실을 치유하는 약이 된다. 자본주의의 사물화도 사물에 의해 치유될 수 있다. 오래된 사물을 통해 지속적으로 욕망을 충족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타자의 온기를 사물에서 느낀다. 그리고 온기로 인해 인간을 기억하고 사유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사물에서 타자와 자기의 온기를 느끼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그들은 소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속해서 신제품을 쏟아낸다. 휴대폰을 2년마다 바꾸기를 강요하고 그렇지 못한 인간들을 과거의 인간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속도에 반기를 들고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들은 항상 존재하고 우리는 이들을 낭만적인 인간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낭만이란, 효율적이지 못한 인간들 그리고 비효율성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을 말한다. 돈을 포기하고 자기에게 기회를 준 팀에 남는 운동선수들을 우리는 낭만 있다고 한다. 낭만은 사회가 제시한 빛나는 길을 포기하고 어두컴컴한 어둠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낭만적 인간만이 사물에서 인간을 발견할 수 있는 여유와 타자의 상처를 보듬는 여유를 챙길 수 있다. 여소녀, 김귀자, 박순조는 자본주의적 인간형과 거리를 두고, 상처 속에서 의미를 회복해 나가는 낭만적 인간들이다.
7. 결론: 그럼에도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
“디디의 우산”의 등장인물들의 삶은 비참하다. 자본주의의 성공과는 거리가 멀고, 고되고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 d와 dd 그리고 dd의 아버지, 여소녀는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디디의 우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디디의 우산”은 희망을 말한다. 상실하고 절망하고 상처받았지만,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이 상처 준 사람들을 이해하고 자기를 이해한다. d는 dd를 잃고 절망하지만, 김귀자 여소녀 그리고 박순조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자기가 가장 혐오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아름답게 여긴다.
인간은 인간으로 치유된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우리는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에 우리의 감정을 이해해 주는 다른 감정적 존재에게서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질문은 그런 존재를 만날 수 있냐?는 것이다. 한 번도 어른다운 어른을 만나지 못해 소년원을 전전긍긍하다 범죄자로 전락해 버린 청년부터, 끝까지 도움 받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까지, 자기들을 이해하는 인간을 만나지 못한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d처럼 김귀자, 여소녀를 만날 수도 있다. 어디 가서 만나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연이란 우연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인연이 귀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사회가 아무리 우리를 핍박하고 무시해도 살아가다 보면 우리를 이해해 줄 다른 인간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소중한 인연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디디의 우산이 비 오는 날 우연히 두 사람을 만나게 했듯이, 삶의 모든 소중한 인연은 예상할 수 없는 순간에 찾아온다. 이것이 “디디의 우산”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디디의 우산이 비 오는 날 우연히 두 사람을 만나게 했듯이, 삶의 모든 소중한 인연은 예상할 수 없는 순간에 찾아온다
필연은 반드시 실행되는 것이기에, 의미가 적다. 반드시 실행된다는 운명은 우리의 삶에 녹아 있기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그러나 우연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고 깊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우연만이 어둠 속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자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