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채식주의자”는 한강 작가가 2007년에 쓴 작품이다. 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으로,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와 같은 작품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를 가진다. “채식주의자”는 폭력에 대한 소설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을 폭력적으로 만드는가? 폭력은 극복할 수 있는가? 등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게 한다. 뿐만 아니라, 독특한 문체와 주인공이 관찰되고 타자에 의해 묘사되는 방식을 통해 독창적인 작품이다. “채식주의자”의 독창성과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맨부커상이라는 영예를 작품과 한강 작가에게 안겨 주었다.
작가들의 초기 작품은 다듬어지지 않고 저항적이며 난해한 것으로 유명하다. 헤겔의 초기작 “정신현상학”이 그랬고,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 또한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채식주의자”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한강이 가지고 있는 폭력에 대한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 날것의 작품이지만, 그녀의 폭력에 대한 깊은 분노에 비해 아직 철학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워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후설은 타인에 대한 이해는 간접경험이 최선이라고 이야기했다. 각자의 자아는 타인의 신체를 보고 그가 자아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은 파악할 수 있으나, 각 인간의 내면에는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이해는 결국 나를 기반으로 한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채식주의자”가 지닌 스타일과 문체는 오히려 한강 작가의 의도를 더욱 드러내는 장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채식주의자”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하는 것은, 사회적 폭력에 억압된 개인과 그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또 다른 폭력 그리고 거기서 오는 고통이다.
채식주의자’는 어떤 책이며, 한강이 그리고자 한 폭력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제 그 물음 속으로 들어가 보자.
2. 줄거리
“채식주의자”는 3장으로 나뉘어 있다. 하지만 “채식주의자”가 독특한 점은, 주인공이 소설을 이끌어 나가며 감정을 서술하기보다 철저하게 타자화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각 장은 “남편”, “형부”, 그리고 “언니”라는 타자들이 주인공을 관찰하고 자신의 감정을 서술한다.
1장 채식주의자
첫째 장은 남편의 영혜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남편은 영혜가 평범하다는 이유로 결혼 상대로 선택한다. 영혜는 남편의 기대대로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은 채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만, 독특한 꿈을 꾼 뒤 채식주의자가 되기를 선언한다. 그 후 둘의 부부 생활은 사장 부부와의 저녁 식사 이후 엉망이 되었고, 남편은 도움을 얻고자 장인과 장모에게 전화를 건다.
장인과 장모, 그리고 영혜의 언니 부부와 동생 부부가 모인 자리에서 영혜의 아버지는 영혜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평소에도 베트남 참전을 자랑스러워하고 쉽게 폭력을 쓰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아버지였던 그는, 영혜의 뺨을 때리고 강제로 탕수육을 입에 쑤셔 넣는다. 괴상한 비명을 지르고 탕수육을 뱉어낸 영혜는 손목을 칼로 그어버리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2장 몽고반점
둘째 장은 형부의 시선에서 영혜를 묘사한다. 형부는 비디오 아티스트로, 별다른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정에도 무심하다. 가정에 금전적인 도움도 주지 않고 집안일에도 무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내, 즉 영혜의 언니가 헌신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슬럼프에 빠진 예술가이며, 창작의 열정이 식어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지 못하고 있다.
남편과 이혼한 영혜가 자취방을 구하는 동안 그의 집에서 머무르던 시기에, 형부는 영혜의 몽고반점 이야기를 듣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미 사라진 몽고반점이 그에게 새로운 작품의 영감을 준다. 그는 자신의 영감을 작품화하기 위해 영혜에게 작품에 출연해 달라고 부탁한다. 언니에게 비밀로 한 채, 영혜는 형부가 자신의 알몸에 꽃을 그리고 비디오로 촬영하는 것을 허락한다.
작품 활동 중, 형부는 영혜와 성관계를 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고, 자신의 몸에도 꽃을 그린 후 영혜와 성관계를 맺는다. 그날 영혜의 언니가 이 사실을 발견하고, 성관계 영상이 담긴 비디오를 보고 충격에 빠진다. 그녀는 충격 속에서 정신병원에 전화를 걸고, 두 사람을 입원시키려 한다. 형부는 잠에서 깨어 아내와 대화를 나누던 중, 영혜가 베란다에 멍하니 기대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베란다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결국 행동하지 못한다.
3장 나무 불꽃
셋째 장은 영혜의 언니 시점으로 진행된다. 동생(영혜)과 남편(형부)의 사건 이후, 영혜는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영혜와 연을 끊고, 큰딸인 영혜의 언니와도 절연한다. 막내 동생 또한 마찬가지다. 영혜를 돌봐줄 사람은 언니밖에 없기에, 언니는 새로운 병원에 영혜를 입원시키고 꾸준히 병문안을 간다.
영혜의 언니는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과일, 차, 야채 등을 챙겨 간다. 처음에는 잘 먹던 영혜가 이내 모든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영혜는 점점 쇠약해지고, 먹는 것을 거부한 채 하루하루 힘없이 살아간다. 영혜는 언니에게 “이제 나는 나무가 될 것이며, 음식은 필요 없고 물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한다.
영혜의 언니는 그런 영혜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영혜가 이렇게 된 것이 자기 탓이라고 여긴다. 처음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 영혜를 원망하고 강제로 먹이려 했지만, 병원에서 영혜가 강제로 튜브 삽입과 진정제 투약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제발 그만하라”라고 울부짖는다.
영혜와 언니는 영혜의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냥 꿈일 뿐이야,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지만 깨어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무언가에 항의하듯 바깥을 쏘아본다. 그녀의 눈은 어둡지만 끈질기다.
“채식주의자”는 어둡다. 그리고 일상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폭력을 주도하는 것은 우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3. 폭력
“채식주의자”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폭력을 다룬 책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품 속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육체적 폭력은 많지 않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라면 영혜의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때리고 탕수육을 억지로 먹이는 장면, 그리고 영혜의 남편과 영혜 언니의 남편이 각자의 아내 의사와 상관없이 성관계를 맺는 장면 정도다. 그러나 육체적 폭력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 혹은 사회적 폭력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채식주의자”는 훨씬 더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3-1 가부장적 사회
영혜와 영혜의 언니는 가부장적 가족에서 자라고, 가부장적 남편과 결혼한 전형적인 대한민국 여성이다. 물론, “채식주의자”가 2007년에 쓰인 소설이기에 이런 일이 지금은 덜 일어난다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가부장제가 추구하는 사회적 구조는 여전히 존재한다.
영혜의 아버지는 베트남 참전 용사로, 자신이 사용한 폭력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한다. 그는 압도적인 신체적·사회적 권력을 휘두르며 가족을 지배한다. 딸들에게 손찌검을 일삼고, 개를 죽을 때까지 달리게 한 뒤 의사와 관계없이 영혜에게 보신탕을 강요한다. 영혜의 남편 또한 마찬가지다. 영혜의 남편이 영혜와 결혼한 이유는 그녀가 ‘평범’했기 때문이다. 평범함이란, 그의 시선에서 자신의 의도에 거스르지 않고 잘 따르는 ‘물건’과 같은 의미일 수 있다.
영혜의 의견과 상관없이 사장이 주관한 부부동반 모임에 영혜를 데려가고, 영혜가 겪을 상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장인이 딸(영혜)에게 손을 댈 때도 방관하며, 결국 이혼을 선택해 버린다. 형부 또한 다를 바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형부 역시 아내와 가족에 무관심하다. 가정일과 육아 등을 전부 아내에게 맡긴 채, 자신은 작품 활동이나 꿈을 좇는다. 심지어 금전적인 도움도 주지 않는다. 그래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가부장적 질서를 기꺼이 받아들인 아내가 그를 구박하거나 탓하지 않기 때문이다.
3-1-1 가부장제는 왜 생겼을까?
가부장적 사회는 남성이 가족과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사회를 뜻한다. 왜 우리 사회는 가부장적인 사회가 되었을까? 소스타인 베블런은 그의 저서 “유한계급론”에서 이를 야만사회의 습성이라고 말한다. 야만사회에는 크게 두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부족 밖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와 대적하는 사냥과 전쟁 같은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부족 안에서 농사·육아·토기 제작 등의 비교적 예측 가능한 생산 활동이었다.
농사나 육아, 토기 제작 등은 씨를 심으면 열매가 맺고, 아이는 돌보면 자라며, 정해진 절차를 따르면 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비교적 예측 가능했다. 그러나 전쟁과 사냥은 다르다. 동물들은 사냥꾼의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고, 예상치 못한 위험이 닥치기도 한다.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은 사냥꾼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베블런은 부족 밖으로 나가는 활동이 자연스럽게 ‘용기와 경외감’을 동반했으므로, 이런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더욱 존중받았다고 말한다.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니 더욱 경외시 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런 사냥과 전쟁은 남성들이 맡았으며, 그들은 부족 안에서 더 큰 권력과 존경을 얻게 되었다. 잉여생산물이 생기자 이들은 노예를 잡아오기 시작했고,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반항 위험이 낮다고 여겨진 여성들을 주로 노예로 삼았다. 그렇게 권력을 쥔 남성들이 여성들을 전리품처럼 다루었고, 이것이 고착되면서 가부장제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남성이 사냥과 전쟁에 참여하고, 여성은 부족 안에 남았을까? 가장 널리 알려진 이유는 남성의 신체적 우월성이다. 그러나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첫째, 신체적 우월성은 상대적이다. 남성 대부분이 힘이 세다고 해도, 더 힘센 여성도 존재한다. 둘째, 사냥과 전쟁에 필요한 능력은 근력뿐만 아니라 집중력, 참을성, 활·함정 등을 이용할 때의 정확성인데, 이런 능력은 여성이 더 뛰어난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언급한다. 인간이라는 종은 “종의 이득을 위해 여성이라는 개체를 희생”해 왔다는 것이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 육아를 위해 매달 생리를 하게 되는데, 이러한 특성이 여성을 외부 임무에서 배제시켰고, 결과적으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형성되었다는 설명이다. 즉, 여성이 부족 안에 머문 것은 능력의 부재가 아닌 ‘희생’이며, 이러한 희생 없이는 인류가 존속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3-1-2 가부장제의 지속성
인간은 문화와 경제가 발전하며 인권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고, 인권 보호가 곧 사회 발전의 척도가 된 문화를 일구었다. 그런데도 가부장제가 쉽게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 권력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남성 역시 마찬가지다. 초기 민주주의는 여성에게 참정권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정치적 참여를 막았고, 교육권까지 제한해 남성의 권력을 유지했다.
둘째, 초기 자본주의에서 가부장제는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자본주의가 기존의 생산양식을 대체하려면 새로운 정치 제도와 사회 질서가 필요했는데, 이는 사실상 ‘혁명’에 가까운 변혁을 요구했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던 새 기득권층은 “인권”과 “평등”을 내세워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완전한 평등이 아니라 성과에 따른 차별에 기반을 두었다.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과 분노를 달래기 위해, “집에서만큼은 남성들이 가부장적 권위를 누릴 수 있도록” 묵인해 준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성 노동자들은 밖에서 착취당해도, 집에서는 가부장으로서 존경받을 수 있었고, 이는 자본주의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가부장제는 인권이 강조되는 시대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여전히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다
3-2 사회적 억압
“채식주의자”는 고정관념에 따른 사회적 억압과 폭력도 여실히 보여 준다. 르네상스 이후 인본주의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이성과 자유 의지를 통해 해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후설과 하이데거에 이르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세계와 관습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부각된다. 후설은 ‘지평성과 습관성’을 통해, 하이데거는 ‘익명의 세계’ 개념을 통해 우리가 완전한 주체가 아님을 증명한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변 인물들에게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고, 심지어 정신병원에 갇히는 과정을 보여 준다. 반면 영혜 아버지의 폭력이나 남편·형부의 성적 폭력은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 비교적 ‘묵인’된다. 즉, 사회가 이미 정해 둔 고정관념(고기를 먹는 게 정상, 가부장적 폭력은 어느 정도 용인 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가 비정상으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사회 제도는 사회 안정을 위해 시민들에게 ‘규범’을 내면화하도록 요구한다. 대중은 안정성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기도 하고, 오히려 소수자를 통제한다. 이런 과정에서 개인의 다양성과 본능이 억압당한다. 가족은 생물학적으로 가장 가깝지만, 모든 가족이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겪는 폭력은 오히려 가족 내에서 더 깊어지고, 피해자는 도망가기조차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인간에게 더 인간다운 삶을 주기 위해 제도가 존재한다면, 왜 이런 폭력이 발생하는가? 후설과 하이데거가 말했듯 ‘유럽 학문의 위기’처럼, 인간을 오직 “객관화”하고 “효율성”으로만 판단하는 관점이 문제일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의 효율성 논리에 길들여져 있으며,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은 쉽게 ‘비정상’으로 낙인찍힌다. 영혜 같은 인물이 정신병원에 갇히는 것도, 그러한 사회적 억압의 결과로 볼 수 있다.
4. 몽고반점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파트는 ‘몽고반점’이다. 이는 영혜의 몽고반점에 영감을 받은 형부가 영혜와의 작품 활동 이후 성관계를 가지는 장면을 담고 있어, 근친상간적이고 외설적이라고 느낄 여지가 있다.
형부는 제도권 밖에서 예술가로 살아가지만, 가부장제의 이점을 은밀히 향유하는 인물이다. 그는 작품 활동에 영혜를 활용하고, 아내에게는 무심한 태도를 보인다. 결국 영혜와 성관계가 발각되자 자살 충동을 느끼지만, 그마저도 실행하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사라진다. 작가는 이런 형부를 통해 “기성 규범에 저항하는 예술가조차 가부장적 폭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라는 모순을 보여 준다.
영혜에게 형부와의 관계는 사회적 금기를 깨는 행위지만, 그녀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본능의 발현일 수도 있다. ‘몽고반점’ 자체는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 지니는 흔적이라는 점에서, ‘원초적 자유’와 ‘태초’를 상징한다. 형부가 영혜의 몽고반점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자신도 그 원초적 자유로 돌아가고 싶음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2장의 외설성은, 사실 사회 제도가 만들어 낸 ‘금기’를 독자에게 역으로 환기시키는 장치다.
5. 나무 불꽃
‘나무 불꽃’ 장(3장)은 영혜 언니가 영혜를 돌보는 내용이 주축이다. 가족 모두가 떠난 상황에서 언니만이 영혜를 챙긴다. 영혜가 극도로 쇠약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언니는 “내가 조금만 더 일찍 동생을 도울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라는 반성에 휩싸인다.
이는 과거에 마주한 폭력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눈여겨봐야 한다는, 작가 한강의 메시지와 닿아 있다. 이후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같은 작품에서 한강은 역사 속 폭력과 희생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운 과거와 결코 ‘작별하지 말라’고 말한다.
영혜는 자신의 젖가슴을 아끼고, 나무가 되고 싶어 한다. 젖가슴은 생명과 포용을 의미하고, 나무 역시 다른 생명을 품는 상징성을 지닌다. 동시에 자연 속에서 폭풍우를 견디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대항’ 해야 하듯, 영혜는 폭력의 세계와 맞선다. 물구나무를 서는 영혜는 비정상적으로 보이지만, 그 자체가 “사회가 정한 정상성을 뒤집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혹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있는 나무가 아니라 나를 희생하더라도 생명을 키워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나무의 모습 그리고 그 노력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작가의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후회를 안고 산다. 그러나 과거와 마주하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과거에 마주하고 용기 있게 나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영혜의 언니처럼 혹은 영혜처럼 자신을 해하더라도 과거에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
5-1. 정신병원
영혜가 입원해 있는 정신병원의 묘사는 무미건조하다. 의사들은 감정이 없고, 환자나 가족과 소통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떠올리면, 정신병원은 사회적 통제 기제로 작동해 온 역사가 있다. 중세 시대 광인이 예언자나 광대 같은 신비적 존재로 여겨지던 모습과 달리, 근대에 들어서는 비생산적인 사람들을 ‘격리’하는 공간이 되었고, 18~19세기 산업화 시기에는 ‘교화가 가능한 이들’을 다시 노동자로 써먹으려 내보냈다는 것이다. 푸코는 비이성의 치료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통제 기제가 정신병원을 만든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채식주의자” 속에서 다른 환자들도 사회에 ‘위협’을 끼친다기보다는, 단지 이해받지 못한 채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인물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폭력과 고정관념이 만연한 사회에서 그들은 ‘정상’ 밖의 존재로 쉽게 낙인찍히고, 가족에게마저 버림받는다.
6. 타자란
앞서 말했듯, “채식주의자”는 주인공(영혜)의 시선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후설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타자의 내면을 직접 알 수 없고, 간접경험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독자 역시 그녀의 언어 대신 다른 인물들의 묘사를 통해 영혜를 짐작할 뿐이다.
영혜는 아무도 이해해 달라고 호소하지 않는다. 언니가 “살기 위해 먹으라”라고 말했을 때, 영혜는 “언니도 똑같다”라며 절망한다. 그러나 3장에서 언니는 영혜를 조금이나마 받아들이게 된다. 영혜의 감정을 언어라는 틀에 맞춰 해석하거나 통제하려 하지 않고, 영혜가 원하는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려는 노력 말이다.
인간은 타자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고, 각자 가진 특성과 욕구가 다르다. 나의 욕구만을 강요하면 그것은 곧 폭력이 된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를 둘러싼 인물들은 모두 그녀에게 폭력적이지만, 영혜 자신 역시 언니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었다. 어느 한쪽만의 피해·가해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얽힌 삶 속에서 폭력이 재생산된다. 따라서, “상대방의 인간다움을 인정하고, 그들이 원하는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 폭력을 줄이는 길일 수 있다.
7. 결론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채식주의자”는 난해하다. 아니, 오히려 더 난해하다고 할 수 있다. “소년이 온다”나 “작별하지 않는다”처럼 역사적 참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폭력의 구조 아래 약자 중의 약자인 영혜를 중심에 둔 채 강렬하고 외설적인 장면들로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는 독자에게 큰 불편함을 안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한강 작가의 의도인지도 모른다. 극단적인 인물과 상황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부조리가 있고, 그런 부조리를 독자에게 직면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당연시해 온 세계를 뒤집어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채식주의자”를 끝까지 읽어 내려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불쾌감과 난해함을 직시해 보는 것은, 한강 작가가 독자에게 요청하는 도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도전의 끝에서 눈을 감지 않고 사회의 부조리와 나의 과거를 직시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이자 더 자유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