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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수단이 아니다: 『1984』와 실존의 윤리

(1) 서론

조지 오웰이라는 작가와 《1984》 그리고 《동물 농장》은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동물 농장》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어린 시절에 본 기억이 있다. 다른 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게걸스럽게 그려진 돼지들, 그리고 힘들지만 묵묵히 일하는 말, 위협적인 어금니를 드러낸 사냥개는 기억이 난다. 《동물 농장》과는 다르게 《1984》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지 않았다. 영화로 제작된 것 같긴 하지만, 나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이가 《동물 농장》은 어딘가에서 본 듯하지만, 《1984》는 ‘읽지는 않아도 알고 있는’ 소설로 남아 있다.” 책을 읽은 사람이 많아서인가?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1984》의 내용이 친숙한 이유는 《1984》가 1948년에 쓰인 소설이지만 현재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의 상황이 아직까지 《1984》가 그려놓은 세상에 남아 있고, 그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미디어에서 《1984》를 소환하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에서 "이데올로기의 전쟁은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라고 선언한 이후, 《1984》의 무대가 되는 전체주의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중국, 러시아 등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국가들이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면서 후쿠야마의 자신에 찬 선언이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 이후의 세상은 그다지 녹록지 않다. 잠잠하면 나오는 습한 오래된 집의 기운처럼, 전체주의는 다시 힘을 가지고 있고 이는 지금의 중국과 러시아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의 보루라는 미국에서는 프리즘이라는 감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히 밝혀졌다. 중국은 소셜 크레딧 시스템(Social Credit System)이라는 새로운 버전의 빅 브라더를 만들고 이로써 시민들을 통제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시민에 대한 억압은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4》가 자주 소환되고 있고, 이는 우리가 읽고 보지 않았어도 《1984》의 내용을 알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1984》의 내용은 단순히 체제에 대한 비판에 그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처절한 인간성에 대한 고찰이자 인간성에 대한 수준 높은 논의가 《1984》에 묻어나 있다. 조지 오웰은 《동물 농장》으로 이미 큰 명성을 얻었지만, 《1984》를 집필할 당시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큰 병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개인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1984》를 완성했다. 인간성을 파괴하고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정치 체제와 싸우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조지 오웰에 대해 우리는 그의 작품을 읽고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존경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조지 오웰이 《1984》를 통해 어떠한 메시지를 보내고자 했는지 같이 알아보자.


(2) 줄거리

《1984》는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1984》의 배경이 되는 나라와 주인공 윈스턴에 대한 설명이다. 《1984》에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그리고 동아시아 이렇게 3개의 대국이 존재한다. 윈스턴은 오세아니아에 사는 외부 당원이다. 오세아니아는 3개의 사회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상부에는 내부 당원, 그다음에는 외부 당원, 마지막으로 프롤이라고 불리는 노동자 계급이다. 내부 당원은 지도자 계급으로 전체 인구의 2%를 차지하는데, 이들은 온갖 특권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 외부 당원은 당의 유지를 위해 요구되는 일을 하는 계급으로 전체 인구의 13%를 차지한다. 외부 당원은 철저한 감시 속에서 생활한다. 당이 생각했을 때, 당에 위협이 되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는데 특히 감정적일 수 있는 행동을 박탈당한다. 프롤은 전체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노동자 계급이다. 이들은 감시와 통제에서 자유롭지만 국가가 제공하는 교육은 받지 못한다. 당은 이들의 잠재적인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최소한의 필요만 충족시킨다.


윈스턴은 진리부란 곳에 소속인데, 이 부서는 역사를 왜곡하고 과거의 기록을 수정하는 일을 담당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라는 당의 슬로건이 유지되도록 일하는 부서다. 이들은 당이 예전에 잘못된 내용을 전달했거나 혹은 당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는 사례를 지우고 고친다. 예를 들어, 당이 예전에 추앙하던 인물이 반역으로 처형되어야 한다면 이 부서는 당이 추앙했던 증거를 지운다. 또한, 당이 특정 물건의 생산량을 900으로 잡고 이번에 500만 생산했다면, 당의 생산량을 성공으로 만들기 위해 예전 예상 생산량을 400으로 고치는 따위의 일을 한다. 윈스턴은 다른 외부 당원과 같이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받는다. 텔레스크린은 외부 당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기계로 만약에 텔레스크린에 잘못된 점이 적발되면 사상경찰에게 처벌받게 된다.


윈스턴은 당의 통제에 불만을 느끼며 살아가지만, 직접적으로 당과 마찰을 일으키려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사건과 두 명의 인물이 윈스턴을 뿌리부터 흔들기 시작한다. 윈스턴은 암시장에서 일기장을 구입하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이 담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줄리아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져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내부 당원인 오브라이언과의 짧은 감정적 교류를 통해 오브라이언이 당을 전복하려는 형제단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


2부에서는 윈스턴과 줄리아 그리고 오브라이언과의 만남이 주를 이룬다. 줄리아는 윈스턴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쪽지를 보냈고, 윈스턴은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줄리아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그들의 육체적 관계는 쾌락을 넘어서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발전한다. 윈스턴은 또한 오브라이언의 자택을 방문해 자신들은 당에 반대하는 반대자라고 이야기하고 오브라이언이 형제단의 소속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또한 그들에게 큰 위험을 동반한 행위이지만, 윈스턴은 꼭 해야 하는 행동이라고 느낀다. 오브라이언은 자기가 "형제단"의 소속이 맞다고 이야기하고 그들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3부는 사상경찰에 잡힌 윈스턴과 줄리아 그리고 그들을 고문하는 오브라이언의 이야기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그들의 밀회 장소에서 사상경찰에게 체포된다. 알고 보니, 윈스턴은 몇 년 전부터 사상경찰이 감시하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윈스턴은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하는데, 처음에 저항한다. 오브라이언은 단순히 윈스턴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당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한다. 줄리아만은 배신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가진 윈스턴은 당에 저항하지만 101호에서 쥐를 이용한 고문에 굴복하고 줄리아를 배신한다. 그 이후 윈스턴은 풀려나고 줄리아와 길거리에서 만나지만 그들의 감정은 전과 같지 않다. 줄리아와 이별 후, 카페에서 오세아니아의 승리를 축하하는 방송이 나오고 그 방송을 들으면서 윈스턴은 당에 대한 사랑을 느낀다. 윈스턴은 풀려난 다른 사상범과 같은 방식으로 처형당하고 소설은 끝을 맺는다.


(3) 전체주의와 억압

소비에트 연방, 지금의 러시아와 중국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국가는 민주주의에서 용납할 수 없는 방법으로 국민들의 삶을 통제하고 억압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전체주의와 억압은 불가분의 관계인가?"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단연코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전체주의 국가의 국가관이 억압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전체주의 국가는 특정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매우 논리적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국민의 다양성과 개인성을 무시하고 그들을 전체의 일부분으로 취급하는데,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권리를 희생한다. 개인의 권리는 보장되고 보호되는 것으로 사회 대다수가 인정한다는 가정하에서는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성과 다양성을 요구하는 사회에서는 사회에서 배격하는 권리가 보호되어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국가와 법의 보호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가 긴 시간 동안 특정 문제에 직면했고, 그 문제가 주는 고통이 크다면 문제 해결의 욕구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한다. 이런 국민은 소수의 권리를 억압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한다는 지도자에게 힘을 몰아주는 경향을 보이고 민주주의 하에서도 그들에게 헌법을 능가하는 권력을 주기도 한다. 1차 세계대전 후, 전쟁 배상금에 허덕이던 독일 국민들은 나치당에 전권을 주었고 나치당이 유대인, 동성애자 등 소수의 권리를 억압하는 데 눈감았다.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은 조금 다르다. 소비에트 연방은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볼셰비키 혁명이라는 쿠데타를 통해서 권력을 잡은 경우다. 하지만 이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과학적 유물론과 노동자 해방이라는 관념을 통해 나치와 마찬가지로 국민들의 억압으로 이끌었다. 과학적 유물론이란, 역사의 약속과도 같은 개념이다.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완성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정치 체제로 지구의 중력과도 같다. 어떠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역사의 끝은 공산주의 유토피아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희생되는 개인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체제를 지지하는 지지자들의 생각은 같다. 경제적 불평등과 착취에 억눌렸던 노동자들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 전권을 주었고 그들이 소수의 권력을 억압한다고 하더라도 용납했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본질적으로 억압적인 체제다.


둘째,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전권을 위임받은 지도자들은 문제 해결의 효율성을 위해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한다. 민주적인 절차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말한다. 민주적인 절차는 방법 그리고 목적에 대한 수정도 용납한다. 하지만 전체주의의 지도자는 국민들의 문제 해결의 열망에 기대어 힘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효율성을 추구하고 이를 국민들이 용납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지도자들은 민주주의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면서 권력 자체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1984"에 나온 것처럼, 권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다. 권력 추구의 원인이 특정 문제 해결을 위함이라면 수단이겠지만, 권력의 단맛을 본 정치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문제를 수단으로 이용한다. 민주적인 절차 없이 권력을 추구하고 자기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은 무결점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 정보의 통제가 필수적이다. "1984"에 나온 것처럼, 정책의 실패를 감추기 위해 처음에 발표된 목적을 수정한다. 중국의 사례를 보고 알 수 있다. 시진핑이 집권하고 중국의 경제는 예전에 비해 저조한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시진핑은 자신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문제를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은폐한다. 중국은 실업률, 정부 부채 그리고 부동산 관련된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숨기고 있다. 정치인들은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보를 은폐하고 조종한다. 이 과정에서도 억압은 발생한다. 개인의 발언의 자유를 억압하고 조작된 정보를 바탕으로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한다. 이토록 숨겨진 정치 체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이 퍼지는 것으로, 국가는 진실을 퍼뜨리려는 자에게 철퇴의 형벌을 가한다. 이들은 필연적으로 사법제도 또한 장악하기 때문에 형벌을 내리기도 쉽고, 형벌은 매서워야 한다. 왜냐하면 매서운 형벌은 당에 대항하는 세력을 막는 데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가 말한 것처럼, 형벌은 규율 권력의 일부로 변화했다. 전권을 장악한 지도부는 형벌과 함께 교육 또한 적절하게 사용한다. 매서운 형벌에 저항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기본적 욕구의 박탈과 육체적 고통에 취약하기 때문에 특정 행동을 그만둔다. 특정 행동을 그만두는 것이 많은 사람이 동참하면 관습으로 변한다. 관습은 사회구성원의 행동을 제약하기에 처벌의 존재만으로 시민들의 행동을 교정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들은 전체주의 국가의 폭력적 지도에 순응하게 된다.



(4) 2분 증오와 감정 그리고 정보의 통제


《1984》에는 '2분 증오'라는 개념이 나온다.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제한다. 《1984》에서 허용되는 감정은 분노밖에 남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전체주의 정부가 국민을 통제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전체주의 정부 또한 국민들의 눈치를 본다. 국민들이 한 번에 들고일어나면 정부는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국민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군인들이 국민의 편에 서게 된다면, 러시아에서 황제에 반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따라서 전체주의 정부는 형벌이라는 강압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당에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요소를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2분 증오와 정보의 통제다.


첫째, 사람들은 사회적 동물이자 적응의 동물이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현 상황에 만족하고 내가 사는 삶이 타인의 삶보다 더 풍족하다면 인간은 그 환경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를 위해 전체주의 정부는 정보를 통제한다. 타국의 정보를 알지 못하면 스스로 비교할 비교군이 없기 때문에 정부가 제공하는 내러티브를 따를 수밖에 없다. 소비에트 연방에 살던 국민들은 정부가 만들어낸 자본주의의 폐허와 이 체제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듣는다. 북한의 현실 또한 마찬가지다. 남한의 지옥 같은 현실을 되풀이해서 선전하고 사람들을 세뇌한다. 《1984》에서도 마찬가지다. 외부 당원은 프롤의 고통스러운 삶과 자기를 비교할 뿐만 아니라 다른 대륙에 사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지 못한다. 따라서 싸구려 담배와 진을 가질 수 있는 현실에 만족하고 정부를 지지한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의 경우는 인터넷을 통제하려고 애쓴다. 이와 함께 미국을 악마화하고 지금 우리가 못살고 있는 이유가 미국이라는 증오에 기반한 선전을 통해 국민의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


둘째, 2분 증오와 감정 통제 또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모든 행동에서 감정을 느낀다. 인간만이 극대화할 수 있는 감정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동물은 자기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데(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이타적인 동물은 없다), 감정은 사람들이 이타적 행동을 하도록 허락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비로소 국가의 문제가 보인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 나를 희생하더라도 국가에 저항할 수 있게 한다. 연인, 친구 그리고 가족에 느끼는 모든 연민이 반동의 씨앗이 된다. 이러한 감정을 없애기 위해 《1984》에서 당은 당에 봉사할 수 있는 아기를 낳는 것을 목적으로 한 성관계만 허락한다. 또한 친구, 가족 등이 반동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신고하는 것을 바람직한 현상으로 만들어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연민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감정은 생겨야 하고 표출되어야 한다. 당은 당에 바람직한 감정을 생성하고 표출하게 하기 위해 '2분 증오'라는 행사를 조직한다. 그리고 일기장과 같은 개인의 감정을 담을 수 있는 물품을 제한하고 모든 예술 작품을 폐기한다. 왜냐하면 예술 작품은 감정의 저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 모호성과 상징성으로 인해 새로운 상상력을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술 작품을 통해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과 감정적 공감을 하고 그 사람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다. 백인들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소설을 통해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던 흑인에 대한 감정적 공감을 했고 이를 통해 흑인 인권 운동에 참여했다. 예술 작품은 모호하고 상징적인데, 이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어떤 존재를 생각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따라서 《1984》에서 당은 모든 예술 작품을 폐기한다. 그리고 '2분 증오'를 통해 다른 증오라는 감정을 일으키고 마음껏 표출할 수 있게 해 준다.


(5) 교육의 중요성


외부 당원과 프롤에 대한 당의 입장 차이는 매우 흥미롭다. 프롤은 인구의 85%를 차지하는데, 그들에 대해서는 크게 제재를 하지 않는 반면, 전체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외부 당원의 대부분의 자유를 빼앗는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과 생각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외부 당원은 내부 당원만큼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은 당의 유지를 위해 두뇌를 사용해야 하는 일을 담당한다. 이는 필수적으로 교육이 제공되고 생각을 해야 함을 뜻한다. 교육을 받고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은 자기의 처지에 대해서 고뇌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나는 왜 내부 당원과 같은 특권을 누릴 수 없지?", "왜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해야 하지", "전쟁은 있는 건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억압하고 사유의 자유를 빼앗는다. 반면에 노동만 요구되는 프롤은 교육을 받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여유조차 없다. 하루 종일 힘든 노동에 시달린 프롤에게 자유와 평화에 대한 사유는 사치 아닌가? 이들은 당으로부터 감정의 표출을 허락받을 뿐만 아니라 은근히 부추김 당한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힘든 하루를 잊을 수 있는 육체적 쾌락이다. 육체적 쾌락이 보장된다면 이들은 복잡한 사유는 거부하고 하루하루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교육의 중요성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 세상은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정치적으로 첨예한 대립 하에 살고 있다. 정치적 반대파를 증오하는 증오 정치가 대부분의 민주주의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민주당 지지자는 국민의힘 지지자를 무시하고 증오한다. 미국 또한 마찬가지다.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고 트럼프가 선거에서 패배한 후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증오 정치 하에서 정책에 대한 중요성은 줄어든다. 사람들은 정책의 효율성이나 진정성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내가 지지하는 지도자의 당선에 사활을 건다. 지도자들 또한 이러한 유권자의 무지를 이용한다. 정책은 대충 꾸며내고 이민자 혹은 부자와 같은 증오의 대상을 설정해 증오를 유도한다. 이러한 증오 정치를 탈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권자 스스로 사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사유를 허락지 않는다. 미디어 또한 자신들이 지지하는 지도자의 편에서 찬양하고 상대방은 공격한다. 각종 SNS에서 제공하는 숏츠 형태의 즐길 거리는 우리가 사유하는 능력을 갉아먹고 파괴한다. 숏츠는 짧은 순간 폭발적으로 만들어내는 도파민이 우리가 사유하는 데 드는 에너지를 두뇌가 낭비라고 판단하게 한다. 이는 정치인들의 자극적인 단어에 반응하고 투표하는 유권자를 만들 가능성이 크다. 우리 사회가 시민들의 사유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사유하는 능력의 배양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교육과 시민의 요구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아직 전체주의화 되지 않은 민주주의에서는 시민의 교육에 대한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 시민들이 정부당국에 인문학적 교육과 사유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요구한다면, 다음 세대의 사유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6) 전체주의의 경제적 실패


《1984》에 묘사된 전체주의 사회는 암울하다. 정치적인 억압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제 생활은 와인을 즐기지도 못하고 신선한 과일도 먹을 수 없다. 한마디로 경제적 발전은 없다. 이는 소비에트 연방의 상황과 같다. 자유 시장 경제를 받아들인 중국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시진핑이 전체주의 노선을 선택한 이후로는 비슷해지는 양상이다. 그렇다면 왜 전체주의 혹은 공산주의와 경제 발전은 양립할 수 없을까?


첫째, 공산주의는 물질적 가치보다 다른 중요한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 체제다. 물질적 가치는 본질적으로 모순적이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없고 나의 행복은 타인의 불행에 기반한다. 예를 들어, 벤츠를 타는 운전자가 행복한 이유는 옆에서 국산 소형차를 타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한강 뷰가 행복한 이유? 달동네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공산주의와 특정 부류만 행복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결별은 자석의 N극과 S극의 관계만큼 강력하게 반대로 작용한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획일화된 가치의 적용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과 성향에 따른 다른 가치에 기반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시민을 유도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전체주의 체제하에서는 절대 달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체주의는 생각과 개인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가치 이외의 다른 가치를 찾기 위해서는 개인성이 필수적이다. 다른 곳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개인적 감정이 선행되어야 남과 다른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위에 이야기한 것처럼 개인성은 철저하게 억압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전체주의의 국민은 우울하고 불행하다.


둘째, 슘페터가 이야기한 것처럼 창조적 파괴는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이다. 자본주의의 팽창은 새로운 투자를 요하는데, 투자자는 기술 발전이나 창의적 경영 방식을 통해 자본의 확충을 볼 때만 투자를 진행한다. 이러한 창조적 파괴는 이제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창의적 행위에 따라 발생한다. 하지만 전체주의는 창의성 또한 억압한다. 위에 이야기한 개인성의 말살이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정부 지도자의 생각에 따라 돌아가는 경제 체제 또한 큰 원인이 된다. 전체주의에서 지도자는 자신의 무결점을 주장하는데, 이는 자신이 세운 경제 체제가 최고의 결과를 낼 것이라고 주장하게 만든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중앙집권적 명령에 따라 경제를 조직한다. 이런 체제에서 자본은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는 분야 혹은 개인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가 선택한 분야 혹은 개인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창조적 활동은 불가능하고 이는 민간의 투자와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


셋째, 독재자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남용을 용인해 주는 권력자들의 존재는 필수다. 이러한 권력자들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전체주의 독재자를 인정하기도 하지만, 개인적 이익을 얻기 위해 용인해 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독재자는 금전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산업의 독점권을 보장해 준다. 러시아의 기름 혹은 천연자원의 사용권을 이러한 권력자들에게 부여하는 것이 그 예다. 문제는 시장에서 가장 효율적인 사업가에게 사업권을 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비효율적 자본의 분배가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경쟁의 부재는 사업체가 효율성을 추구할 유인을 제거하고 국민들은 저퀄리티의 상품을 비싸게 주고 살 수밖에 없다. 이는 국제 시장에서의 경쟁에서도 패배를 일으키기 때문에 예상되는 일자리보다 적은 일자리를 생산한다.


(7) 결론


《1984》는 대표적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대부분 디스토피아 소설과 마찬가지로 미래를 예측하기에 시간이 지나면 소설의 연관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전이 그러하듯 《1984》가 가지는 현실 세계와의 연관성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만 같다. 전체주의의 부활이 그렇고 심지어 민주주의의 전체주의화는 연관성이라는 불꽃에 불을 붙이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SNS와 인터넷 그리고 ChatGPT 같은 생성형 AI의 발달은 사람들의 생각하는 능력에 종말을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4》의 존재는 매우 특별하다.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가능한 상황을 보여주면서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조지 오웰의 탁월한 소설적 감각은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소설로서도 쉽게 다가가기 때문에 그 존재의 특별함은 다른 소설에 비해 훨씬 탁월하다.


권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그의 분석은, 권력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항상 살아있어야 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권력은 항상 수단이라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에게 혹할 만한 목적을 던져준다. "나에게 권력을 주면 가난을 해결해 줄게.", "나는 인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권력이 없어, 그래서 나에게 권력을 줘."와 같이 모든 것이 달성되면 권력은 버리고 목적을 달성한 유토피아에서 민주주의로 회귀할 거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고 《1984》는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권력은 권력 추구가 목적이기에 권력 추구에 최선을 다한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권력을 견제하고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적 절차를 위한 견제가 작동하는지 또는 잘못된 정보는 없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또한 우리를 속이기 위한 정책은 없는지 그리고 그러한 정책을 알아챌 수 있는 사고 능력을 기르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전체주의에 권력을 넘겨주었던 시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고 그 칼끝은 끝내 권력을 넘겨준 사람에게 겨누어진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항상 깨어있고 의심하는 자세" 그리고 "개인성과 감정 그리고 타인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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