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은 대한민국에서 유례없는 판매고를 올린 책이다. 흔히 알려진 바에 따르면, 광고와 홍보활동 없이 150만 부의 판매고를 올린 책은 대한민국에서 “난쏘공”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쯤 되면 “난쏘공”을 대한민국 문학의 고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이란, 문학이 쓰인 시대상에 관계없이 계속해서 읽히는 문학을 말한다. “난쏘공”은 과거 인권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리 만큼 무지했던 독재정부하의 노동자의 상황을 묘사한 글로 특정한 시대상을 반영한다. 대한민국은 민주화를 통해, 독재정부가 민주정부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인권과 노동권 또한 발전했다. 52시간제, 최저임금 그리고 다양한 노조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삶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는 것이 지금의 시선이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독자들은 “난쏘공”을 선택하고 이를 고전의 반열에 올리고 있는 것일까?
노동자들의 객관적 처우가 눈에 띄게 긍정적으로 바뀐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쓰이고 버림받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노동현실은 좋아졌지만 여전히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다. 서울 한강변 아파트는 30억 40억이 넘어가고 있고, 서울 빌라 가격은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2020년 기준 자산 분포를 보면, 상위 10% 가구가 전체 자산의 43.7%를 차지하는 반면, 하위 60% 가구가 가진 자산은 16.7%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열 가구 중 한 가구가 자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나머지 여섯 가구가 힘을 합쳐도 20%조차 갖지 못하는 구조입니다. 게다가 계층 이동성마저 제한적이다. 2017~2022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해마다 소득 계층이 바뀐 사람은 전체의 34.9%뿐이었고, 65.1%는 같은 계층에 머물렀습니다. 특히 하위 20% 가구의 69.1%*는 다음 해에도 여전히 하위 20%에 머물렀고, 반대로 상위 20% 가구의 86%는 안정적으로 상위 계층을 유지했다. 요컨대 상층은 잘 내려오지 않고, 하층은 좀처럼 올라가지 못한다.
조세희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난쏘공”이 아직도 독자들의 선택을 받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자신의 혼을 담아 만든 작품이지만, 조세희는 시대가 바뀌어 그의 작품이 사장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은 여전히 읽히고 있다. 나는 사람들의 부정적 평가와 다르게 나는 “난쏘공”이 희망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사람들의 부와 인간에 대한 생각을 교정하고 사랑으로 채우려는 작품이다. 따라서, 조세희 작가의 염원이 지금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미래에는 그의 희망의 끈이 반드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줄거리
난장이는 그의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딸과 낙원구 행복동 재개발 지역에 살고 있다. 그들의 집은 재개발로 인해 헐어질 것이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시에서 보상금이 나오지만 이는 새 아파트에 들어가기에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다. 이에 난장이는 입주권을 팔 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입주권을 어느 사업가에 판다. 이에 격분한 딸 영희는 사업가를 따라가 며칠 동안 그의 집에서 같이 지내다 입주권을 훔쳐 집으로 돌아온다. 영희는 훔쳐온 입주권으로 그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파트를 구입하지만, 난장이가 굴뚝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이후 난장이의 가족은 은강공장 지대로 이주한다. 은강공장에서 영수 영호 영희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 영수는 그곳에서 노동운동에 눈을 뜨게 된다. 그는 지섭과의 만남을 통해 노동법을 배우고 그를 무기 삼아 공장관계자와 교섭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결국 분노한 영수는 은강 그룹 회장을 찾아가지만 회장이 아닌 그의 동생을 착각해 살해한다. 영수는 법정에 세워지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3.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의미
“난쏘공”은 노동자의 열악한 삶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실제로 난장이가 사망한 후에, 작품은 영수 영호 그리고 영희의 삶과 사건 그리고 그를 둘러싼 재판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면 난장이를 작품의 상징/표상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난장이는 자본주의의 최하계층에서 고통받는 노동자를 상징한다. 난장이는 육체적으로 비난장이들 보다 약하고 이는 선천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보통 우리는 차별이 나쁜 이유를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어떤 특징”을 기반으로 불이익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차별, 종교차별, 인종차별등 이러한 특징은 본인이 선택하지 않았다. 또한, 이 특징은 개인의 능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차별에 대한 해결책은 능력주의 즉 능력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성이 남성과 비슷한 능력을 가지거나 혹은 더 좋은 능력을 가진다면 그녀는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임금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임원이라는 자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지적했듯이, 능력주의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능력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씨앗이다. 각자가 다른 IQ를 가지고 태어났듯이 능력의 크기 또한 다양하다. 뿐만 아니라 능력이 발현되는 환경 또한 주어진다. 엄마의 자궁에서부터 차별적 환경은 시작된다. 태아기의 환경은 곧 아이의 출발선을 결정한다. 영양이 부족한 아기는 저체중으로 태어날 확률이 두 배 높고, 성장 과정에서 학업 성취와 건강 수준도 낮아진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 기근을 겪은 태아들은 성인이 되어 평균 학력이 0.5~1년 낮았고, 기대수명도 5년 이상 짧았다. 임신 중 모성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면 아이는 정신건강 문제를 겪을 확률이 1.3~1.5배 높다는 연구도 있다. 결국 태아기의 미세한 격차가 평생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어떠한 교육을 받는지가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중고등학교에 적절한 공교육과 사교육을 받아 유명한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의 미래 임금은 당연히 차이 날 수밖에 없다. 사교육이 아니라 노력과 능력으로 같은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하더라도 생활고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의 차이는 커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능력주의는 아무리 평등하다고 주장해도 절대적으로 평등하지 못하다. 영수는 가정사정으로 교육을 받지 못해 노동자가 되었지만, 누구보다 똑똑하다. 독학으로 노동법과 다양한 노동사상을 깨우쳤고 스스로의 힘으로 노동단체를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은강 그룹 회장을 만나러 간다는 행동성 마저 갖췄다. 영수가 노동자가 된 것은 개인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구조가 기회를 빼앗았기 때문임이 명백하다.
결국 최하층 노동자 역시 난장이처럼 선택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차별받는다. 그들의 능력 부족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바꿀 수 없는 환경의 결과다. 그렇기에 그들이 받는 차별은 우리의 기준에 비해도 정당하지 않다. 하지만, 능력에 의한 차별은 정당하다는 자본주의식 판단에 따라 그들은 차별받고 희생되고 있다. 난장이 역시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능력주의적 잣대 속에서 끝없이 멸시와 핍박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그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모순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이다. 이것이 조세희가 난장이를 그 책의 상징으로 만든 이유라고 생각한다.
4. 능력주의의 문제(2)
능력주의가 여러 문제를 낳았지만, 그 긍정적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첫째, 과거 신분제 사회의 차별은 출생으로 정해진 지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불평등했다. 또한 본인의 능력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개인이 능력을 발휘할 유인이 없다. 따라서, 사회전체적인 개발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떨어진다.
둘째, 능력주의에서는 능력발휘가 사회의 목표가 되기 때문에 법과 제도 또한 개개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정된다. 과거에는 국가 주도형 공교육의 의미가 없었지만, 현재는 공교육과 능력발휘의 바탕이 될 수 있는 삶을 보장해 주는 사회보장제도가 거의 필수적 요소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능력주의가 표방하는 능력 자체는 문제없어 보인다. 위에 언급한 차별로서 이용되는 능력은 능력 기원의 인식에 대한 문제이지 능력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능력을 강조하는 사회가 어떠한 발전방향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명확하다. 하지만, 능력이 가치 평가의 기반이 되는 사회는 벗어날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능력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는 자부심은 능력의 결과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드러난다. 실제로, 자본주의는 능력주의가 발현되기 위해 필수적인 경제체제다. 능력주의는 능력에 대한 차등지불을 그 뼈대로 삼으며 또한 차등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능력발휘 또한 수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아담 스미스가 말한 “이기심은 인간 활동의 원천”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개념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능력과 결과물의 결합과 그 부여된 신성함은 절대적 사유재산 제도라는 관념으로 이어진다. 이는 사유제도는 우리 사회에서 본질로 생각되며, 사유재산을 빼앗는 것을 불합리한 것이라는 지배적 생각이 된다. 물론 사유재산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기본이 된다. 모든 개인은 스스로의 선택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뿌리 깊은 생각으로 사유재산 없이는 이런 생각이 실현될 수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보다 근본적이며, 인간의 삶은 부보다 앞선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현할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선택한 것이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일한 가치로 치부하지 않는다.
본질이란 흔들리지 않는 가치를 뜻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져도 없어지지 말아야 할 가치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다. 이는 논리적으로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 또한 우연적이기보다는 본질적이기를 요구한다. 만약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우연적이라면 우리는 그 본질에 따라 번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자체가 사회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권 또한 우연적이 아니라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떠한 상황에 태어났든 어떤 직업을 가지던,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인권은 동일하다. 그리고 그 동일성에 따라 인간이라는 본질이 형성된다. 반면에, 부와 능력은 우연적이다. 그것들은 태어난 가정과 환경, 그리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그리고 부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주변상황과 운에 따라 부가 결정될 수 있다. 따라서, 부와 능력은 사회의 본질이 될 수 없다. 이는 사유재산에 대한 신성시함의 모순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 우리 사회는 인간의 본질을 훼손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5. “난쏘공”이 희망의 작품인 이유
조세희는 “뫼비우스의 띠”, “잘 다듬어진 칼” 그리고 “안상길의 고뇌”에서 희망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간략하게 설명하면, 모순과 비극을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 그리고 그것이 발현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양심적인 인간으로 요약될 수 있다.
5-1) 뫼비우스의 띠
“난쏘공”은 뫼비우스의 띠를 설명하는 수학선생님으로 시작한다. 수학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두 명의 굴뚝 청소부가 있는데 청소 후 한 명은 얼굴이 검어졌고 다른 한 명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세수를 하러 갈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검은 얼굴을 한 굴뚝 청소부라고 대답하고 수학선생님은 틀렸다고 한다. 수학선생님은 상대방이 얼굴을 보고 자기를 판단하기 때문에 얼굴이 하얀 청소부가 세수를 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순간, 아이들은 선생님의 명석한 대답에 환호한다. 바로 다음 선생님은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두 명의 굴뚝 청소부가 있는데 청소 후 한 명은 얼굴이 검어졌고 다른 한 명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세수를 하러 갈 것인가?”
이에 아이들은 선생님이 전에 했던 대답과 똑같은 대답을 하지만, 선생님은 틀렸다고 한다. 두 명의 청소부가 청소를 했다면 당연히 둘 다 얼굴이 검을 것이기 때문에 둘 다 세수하러 가는 것이 맞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선생님은 뫼비우스의 띠에 대해 설명한다. 한쪽을 180도 비틀어 양 끝을 붙인 하나의 띠(뫼비우스 띠), 안과 밖의 구분이 없고 계속해서 띠 안을 맴도는 무한성을 상징한다. 조세희 굴뚝 청소부 우화와 뫼비우스 띠로 “난쏘공”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그의 희망을 담은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먼저, 굴뚝 청소부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고 나에 대해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은 타자를 기반으로 자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심연 깊은 곳까지 알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이 외화 된 실체나 물체 혹은 타자의 마음을 보면서 자기를 판단한다. 이것이 함의하고 있는 바는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타자의 인정에서만 자기의식이 성립할 수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타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기도 한다. 굴뚝 청소를 열심히 했다면 얼굴에 검둥이가 묻을 수밖에 없다. 비록 얼굴이 검은 청소부가 타자의 얼굴에서 검둥이를 보지 못했을지라도 내가 청소를 열심히 했다는 확신이 있다면 나는 세수하러 갈 것이다. 그리고 얼굴이 하얀 타자는 얼굴이 검은 타자의 얼굴을 보고 자기를 판단하기 때문에 둘 다 세수하러 간다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대답 중 무엇이 정답인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저 상황에 처해있지 않고서는 청소부들이 어떻게 청소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얼굴이 검은 청소부는 평소에 피부가 민감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보지 않고도 느낌으로 얼굴에 검둥이 묻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수 있다. 아니면 얼굴이 하얀 청소부는 평소에 손거울을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얼굴이 하얀 것을 손거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은 삶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단순한 논리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학생들의 판단이 결국 ‘선생님’이라는 권위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사회에서 지식인과 지배적 사상이 대중의 인식을 형성하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상징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인간의 삶은 중지되지 않고 무한히 지속되기 때문에, 지금은 어렵더라도 언젠가 선생님과 같은 현명한 지식인이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헤겔이 말한 ‘생명’과도 통한다. 생명은 자기 안의 모순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극복하면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유기체다. 마찬가지로 뫼비우스 띠는 모순을 안고 순환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낳는 삶과 사회의 구조를 상징한다. 결국 권위는 인식을 매개한다—그러므로 순환 속에서도 변화의 가능성은 남는다.
5-2) 잘 다듬어진 칼
신애는 3가지 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칼 중 하나는 아무나 만들 수 없는 특별한 칼이다. 신애는 매년 칼을 가는 사람을 불러 칼을 가는데, 솜씨가 없는 사람은 칼을 무뎌지게 하기 때문에 칼을 갈게 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 칼을 만들기 위해 대장장이는 수많은 담금질, 수없이 많은 망치질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난장이를 지키기 위해 장인의 칼과 생선칼을 사용했다. 난장이를 공격하던 이의 옆구리 꽂힌 것은 장인의 칼이 아니라 생선칼이었다. 그리고 그 칼은 신애의 의도대로 난장이를 구해낸다.
신애의 3가지 칼은 노동자를 상징한다. 각자가 처해있는 상황은 다르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노동자에게 희망을 선물하고자 한다.
장인의 칼은 수많은 담금질과 망치질 끝에 완성된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도 매일의 고난을 견디며 단련된다. 조세희는 이 모든 행위가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장인의 칼이 되어도 장인의 칼임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좋은 칼 취급을 받는다. 고난을 견딘 노동자가 여전히 비참하게 사는 이유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회와 사용자들의 책임이다. 이러한 생각에 실존주의자들은 맹렬히 저항한다. 노동자들이 겪은 고통과 모순은 지금이고 그들의 고통이다. 그것을 겪고 견디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의 고통에 대한 분석만 있을 뿐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대안을 말하지 않는다. 이에 카뮈는 견디고 삶을 살라고 했다. 조세희는 헤겔의 삶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헤겔은 개개인의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한다고 했다. 인간의 육체는 죽음으로 종결되지만 그 인간이 살아온 삶의 길은 역사로 정신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 보편성은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고 가족은 국가에 영향을 미친다. 누구보다 묵묵히 살아오면서 삶을 견디 난쟁이의 죽음은 의미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그의 죽음은 영수에게 행동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영수의 죽음은 그의 동지들과 안상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만들어진 세상에 내던져졌고 그리고 세상의 정해진 규칙에 따라 산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지시하는 도구를 예로 들었다. 예를 들어, 화살표 표지는 오른쪽을 가리키는 도구로 이미 정해져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또한 인간은 도구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 성격에 따라 변형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말한다. 신애는 급박한 상황에서 난장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남을 해칠 도구가 있어야 함을 파악했고 칼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녀가 사용한 것은 잘 드는 장인의 칼이 아니라 흔하디 흔한 칼이었고 그 칼은 난장이를 구할 수 있었다. 이는 그 어떤 도구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나를 못 알아 봐주는 사회일 수도 있지만, 내가 정말 능력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언가를 자르는 그 상황에만 내가 능력이 없는 것이지 나라는 인간 자체가 못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장인의 칼이 기능적으로 더 뛰어나지만, 난쟁이를 구한 것은 흔한 칼이었다. 이는 사회가 정한 유용성과 효율성을 넘어, 모든 인간은 상황에 따라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효율의 위계 바깥에서, 인간의 가치는 ‘상황 속 행위’로 드러난다.
5-3) 안상길의 고뇌
안상길은 은강 그룹의 후계자다. 안상길은 영수의 재판에 참석하고 다소 격양된 반응을 쏟아낸다. 변호사가 영수를 옹호하는 것을 보고 “살인자를 옹호한다”라고 놀란다. 또한, 많은 노동자들이 자기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겁을 먹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은강 그룹이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점, 아버지 세대가 큰 결정을 내려왔다는 점을 내세우며 가족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한다. 안상길의 고뇌는 단순히 부잣집 아들이 자기의 행동에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시도가 아니다. 이런 고뇌는 그 또한 다른 사람의 시선에 반응하는 인간임을 보여준다. 안상길은 내가 가진 것의 정당성을 이기적인 이유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득과 사회의 이득이 일치한다고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괴물로 변하지 않은 이상 타자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이에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희망인 것이다.
기득권은 재산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 법·교육·문화까지 장악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해 만들어진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이자 자본주의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기득권층을 형성하기 때문에 사유재산의 중요성을 공교육에서부터 가르친다. 그리고 부자의 재산 형성은 이기적 동기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보이지 않는 관념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폭력에 있어서도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폭력은 정당화되고 그에 반하는 폭력은 억압된다. 난장이의 집을 철거하러 온 철거반의 행위자체가 폭력일 뿐만 아니라 그에 반항하는 지섭에게 가해진 행위조차 폭력이다. 하지만, 그들의 단체 행동은 법에 의해 보호되었기 때문에 위법행위는 진행되고 지섭은 기절할 정도로 폭행당한다. 이처럼 기득권은 재산형성이 정당하다는 관념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은 온갖 힘을 쓰지만, 인간의 기본은 바꾸지 못한다.
인간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나와 같은 다른 인간과 교류한다. 양심은 개인이 즉흥적으로 꾸며내는 감정이 아니라, 인류가 역사 속에서 축적해 온 공감과 도덕의 발현이다. 다른 인간이 죽는 것을 슬퍼하는 것 그리고 타자를 죽음에 처하게 하면서 나의 이득을 취하는 것은 인류가 지향해 온 것들이고 역사가 양심의 형태로 그들을 반박한다. 그리고 기득권들도 타자와 교류하기에 타자와 나의 공통점을 인식한다. 내가 슬플 때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타자도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내가 아프거나 배고프거나 뭔가 결핍을 느끼면 타자도 같은 결핍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자와 교류하는 인간은 결국 측은지심을 느끼고 양심에 반응할 수밖에 없다. 안상길은 그의 사촌형과의 교류 그리고 재판장에 온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서서히 변화하는 것이다. 안상길이 회사의 책임자가 되었을 때 바로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고뇌는 그다음 세대가 변화하는 지반에 대한 거름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득권 내부의 양심의 동요는 다음 변화를 위한 토양이 된다.
6. 자본주의와 인간소외
“난쏘공”이 희망적인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인간소외라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첫째, 자본주의는 자본을 증식이라는 수치로만 대상을 파악한다. 수학선생님이 도덕선생님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도덕까지 수치로 변화시키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묘사한 것이다. 이는 젠트리피케이션에서도 드러난다. 난장이는 몇십 년에 걸쳐 자기 스스로 집을 지었지만, 자본의 눈에는 비효율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의 눈에는 수십 년의 삶이 담긴 집도 그저 ‘15만 원짜리 자산’ 일뿐이다. 인간의 땀과 기억은 숫자 뒤로 밀려난다. 여기서 쫓겨난 사람들의 생사는 자본이 신경 쓸 바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자본의 증식과 관계없기 때문이다.
둘째,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질을 이용해 인간을 소외한다. 인간은 많은 욕구를 가지지만 생존의 욕구가 가장 기본이다. 물론 자유와 권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기도 하지만, 내가 없어진다는 그 두려움은 인간이 쉽게 저항할 수 없다. 이에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변화한다. 생존에 필요하다면 더 강도 높은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비인간적인 처우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여기에 가족이라는 자기 생명만큼 중요한 대상이 포함되면 그들의 적응력은 놀랄 만큼 특별하다. 자본은 기계와 그것을 사용할 노동력을 산다. 이는 자본 산출에 투입되는 요소들인데, 투입대비 산출이 높다면 효율적인 행동으로 간주된다. 기계는 인간과 다르게 정적이다. 어느 정도 효율성을 높일 수는 있지만, 기술발전이 없다면 기계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산출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직업 없이는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리고 그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극한의 상황까지 자기를 바꿀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본은 인간을 착취한다. 그리고 이는 인간 소외로 이어진다.
바로 이런 이중적 소외에 오늘날 청년들이 반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수치라는 기준으로 소외되고 또 인간의 본질로서 소외된다. 이에 대한 반항에 대한 기득권의 대답은 단순한다. 예전보다 좋아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아이러니하다. 대한민국의 상황도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는가? 대한민국 기업들이 원하는 것은 미국 일본과 같은 선진국과의 절대적인 차이를 줄이고 경쟁에서 앞서 나가는 것이다. 기업은 스스로의 성과를 미국·일본과 같은 ‘절대 기준’으로 평가하면서, 노동자에게는 ‘상대적으로 괜찮지 않으냐’고 말한다. 이 이중 잣대야말로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이 우리 세대에게 “난쏘공”을 읽게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의 자본주의는 “”난쏘공”이 본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난쏘공’을 희망의 책으로 읽고 싶다. 인류는 여전히 진보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우리를 소외시키는 사회 역시 변화 가능한 대상이지 단순한 악이 아니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니라, 교육과 사상, 인간성 회복이라는 장작을 불태워 더 빠른 진보를 이끌어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