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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앞에서: 카프카 『소송』과 부조리의 윤리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서론

프란츠 카프카는 실존주의 소설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관료주의와 그 속에서 소외되어 가는 노동자들을 그려낸 작품으로 유명하다. 성, 변신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지만, 이번에 내가 읽은 소송(심판) 또한 인간의 소외와 실존성을 그려낸 작품이다.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소송(심판)은 미완성 작품이다. 미완성 작품이긴 하지만, 시작과 끝을 써놓고 중간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쓰였기 때문에, 시작과 끝은 명확하다. 하지만 다른 카프카의 작품처럼, 이 작품 역시 난해하며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회 현실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든 책이다. 카프카는 인간의 소외를 그리기 위해, 일상에서 벌어질 법하지만 매우 어두운 세계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소외된 인간을 보여준다. 아마도 카프카는 그런 세상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작품 속 주인공이 겪는 일은 우리 모두가 겪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그렇다면 소송(심판)은 어떤 세계관을 통해 우리를 자각의 길로 인도하는 것일까?


줄거리

『소송』의 줄거리는 얼핏 보면 단순하다. 은행업계에서 나름 성공한 위치에 있는 K는 어느 날, 자신이 소송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K가 휘말린 소송은 매우 독특하다. K는 누가 자신을 고소했는지, 혹은 죄명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K가 소송에 걸렸다는 사실은 그의 주변 모두가 알고 있다. 또한, 그에게 조언해 주는 사람들의 반응도 수상하다. 증거를 찾아 무죄를 입증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맥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거나, 완전한 무죄를 받을 수 없으니 하급 재판에서 사건을 지연시키거나 부분적으로 유죄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K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소송에서 벗어나 보통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그의 노력은 헛수고가 된다. 새로운 조언자들은 비슷한 말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소송에서 무죄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K는 끝내 삼촌이 소개해준 변호사도 해임한다. 그러던 중, 은행 지점장으로부터 비즈니스차 방문한 이탈리아인들을 대성당에서 만날 것을 부탁받고, 그곳에서 감옥에서 일하는 신부를 만난다. 그로부터 농부와 문지기, 그리고 법에 대한 일화를 듣고 집으로 돌아간다. 며칠 후, K는 사형집행인들에게 인도되어 사형장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 어느 때보다 발걸음은 가볍고, 사형장으로 향하는 K는 저항 없이 사형집행인을 도와 움직인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다.


실존주의

소송(심판)의 내용은 매우 난해하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재판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또한 보통 범죄 소설에 중요한 정보인 소송의 주제나 주체, 재판장, 범죄 사실은 끝내 독자에게 드러나지 않는다. 변호사와 판사, 그리고 주변의 조언도 독특하다. 일반적인 소설은 부족한 정보를 소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채워주거나, 세계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통해 독자들이 정보를 채워 넣게 한다. 그러나 소송(심판)은 끝까지 정보의 불완전성과 낯선 세계관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예술은 저자의 배경과 관념에 의해 좌우된다는 관점이 있다. 작가를 지배하는 무의식은 그의 어린 시절과 트라우마, 그리고 신념에 의해 형성되며, 이러한 무의식이 작품 속에 은연중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부유한 아내와 결혼한 후 삼손을 자주 그렸고, 아내가 사별한 후에는 다른 주제가 그의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렘브란트의 불행한 결혼생활이 그의 작품 속에 투사되었다고 한다. 삼손이 자주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의식적일 수도, 무의식적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작가의 생각이 작품에 반영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삼손의 아내는 지속적으로 삼손의 미래를 방해했고, 머리카락을 자름으로써 삼손에게서 힘과 생명을 빼앗았다).


카프카 또한 마찬가지일 수 있다. 카프카는 독일에 거주하는 유대인, 그리고 작가가 아니라 사업가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정체성으로 인해 고통받았다. 독일에서 유대인은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천대받았으며, 억압적이고 거친 아버지의 교육관과 그로부터 투사된 꿈은 카프카를 억눌렀다. 이러한 상황은 소송(심판)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K는 성공한 은행가이지만, 어느 순간 비논리적이고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소송에 의해 삶이 송두리째 바뀐다. 이 소송의 원인과 진행 상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지만, 주변 사람들은 K가 소송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를 예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취급한다. 일에 집중할 수 없고, 일상생활도 유지할 수 없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다. 인맥을 통해 재판관과 교류하고 유죄를 인정하거나, 계속해서 재판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해결책도, 탈출구도 없다. 이 체제에서 문제를 타파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이미 체제에 순응한 변호사나 화가일 뿐이다. 나는 나의 문제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타자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실존주의적 질문으로 연결된다. 과연 나의 실존이란 무엇인가? 알베르 카뮈가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에서 말했듯이, 세상은 부조리하다. 부조리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고, 우리가 극복할 수도 없다.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부조리와 맞닥뜨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K와 카프카의 삶 또한 부조리하다. K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고,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카프카 역시 자신의 인종도, 아버지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러한 재판이 K를 억누르고 짓밟으며, 결국 목숨까지 빼앗는 것도 부조리다. 카프카의 인종과 아버지가 그의 미래를 훼손하고 특정 방향으로 그의 의지를 이끄는 것 또한 부조리하다. 하지만 카프카와 카뮈의 대답은 사뭇 다르다. 카뮈는 반항하라고 말한다. 부조리에 순응하지도(자살) 절망하지도(포기) 말고, 반항하며 나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카프카는 반항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K의 눈을 통해, 주변 사람들이 부조리에 처한 K를 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이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는 부조리 속에서 피해자인 K는 보듬어지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K를 압박하고 그의 주체성을 빼앗으려 한다. K를 관찰하는 사람들은 그의 아침 식사를 빼앗아 먹고, 부당하게 명령하며, 부지점장은 K의 상황을 이용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 변호사와 재판부는 불쌍한 피고에게 선의를 베풀고 정의로운 과정을 만들기보다는, 어떻게든 그를 굴복시키고 주도권을 빼앗으려 한다. 이렇듯 우리의 사회는 타인의 부조리에 편승해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고 카프카는 말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카프카가 보는 실존은 카뮈의 실존에 비해 훨씬 어둡다.


K의 부조리에 대한 반응 또한 어둡다. K는 무기력하다. 원인을 알지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이유는 K는 아직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생각에서 부조리를 파악하려 하기 때문이다. “소송은 원인이 있어야 해, 나는 은행에서도 유능하기에 이 난관을 해결할 수 있어” 와 같은 인간의 이성적 세계관으로 부조리를 파악하려고 한다. 하지만 부조리는 인간의 세계관과 진짜 세계와의 괴리에서 발생하기에 이런 접근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무기력하고 절망적이다. 카뮈의 반항은 ‘그래도 살아감’의 선택이며, 『소송』은 그 선택이 좌절되는 구조를 노출한다.




본능에 대해

소송(심판)에서는 매우 기묘한 장면들이 묘사된다. 부조리한 소송에 휘말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K가 여자에게 집착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은행업계에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리어를 쌓았고, 변호사를 내쫓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K가 자신을 억압한 조사관들을 태형에서 구하려 했던 모습과는 매우 상반되는 장면이다.


K가 여성에게 집착하는 장면은 두 가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첫째, 개인의 실존을 완성하는 것은 사회 제도가 아니라 본능이다. 사회 제도는 오히려 개인의 실존을 억압하고 짓누른다. 미셸 푸코는 사법체계가 교정적 성격을 지닌다고 말했다. 사법체계는 부정하는 행동 자체를 거부하게 만드는데, 이는 사람들의 행동을 교정하려는 구조다. 또한,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인식이 아니라 경제체제, 즉 하부구조가 법과 교육 등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이처럼 개인은 상부구조를 ‘자연스럽게’ 따르도록 내면화하며, 그것이 곧 삶의 의미인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실존적 움직임이란 자신의 의식이 지향하는 바를 보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그 의식을 따르는 것이다. 사회체계는 사회 발전이나 안정을 위해 개인적 선택을 억압하므로, 본능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실존적 삶에 더 가까울 수 있다.


K는 성욕이라는 본능뿐 아니라, 변호사와의 결별을 통해 이성적 시스템을 거부하고 본능에 기초한 해법을 추구한다. 정해진 규범이 아니라, 본능과 내적 감각에 따라 움직이는 실존적 결단을 보여준다. 내가 짐 지워지는 모든 것들을 벗어던지고 현상학적인 이해와 해결책이야 말로 부조리에 대항해 실존을 찾는 인간의 치열한 몸부림이 될 수 있다.


둘째, 그러나 K의 행동은 이 소설 안에서만큼은 억압적이다. K는 자신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을 자신의 본능을 위해 억압한다. 뷔르스토나가 사고라는 이유로 거부의사를 보였음에도 불쾌한 행동을 하고, 레니의 호감을 이용한다. 법정의 여성, 레니, 그리고 뷔르스토나가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그는 그들을 돕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이득을 위해 관계를 이용하려 한다. 이는 여성이라는 존재가 항상 남성에게는 타자요, 사회적으로도 존중받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말한 것처럼,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해야 하는 이유는 없으며, 그들의 성별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사회 체제가 K의 실존을 억압하는 것처럼, K 또한 여성들의 실존을 억압한다. 이는 후에 K가 자신이 죄를 지은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는 이유로도 보인다. 그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인생을 쭉 써 내려가지만, 소설의 마지막에서 사형집행인에게 순응한다. 자신은 무죄라고 믿었지만, 타자의 실존을 억압한 자신 또한 유죄라고 깨달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조리의 탈출은 인간끼리의 연대를 통해

부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무선택성은 부조리의 힘과 억압적인 성격을 설명해 준다.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힘은 더욱 강력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

어떻게?

카뮈가 그의 소설 페스트에서 보여준 것처럼, 인간과 인간의 연대가 답이 될 수 있다. 카프카의 소설들은 희망이나 해결책보다는 우울하고 부정적인 제삼자의 시선을 보여주지만, 연대라는 키워드는 소송(심판)에도 존재한다. 처음에 K를 억압했던 프란츠와 뷜럼이 K의 행동으로 인해 채찍을 맞는 장면에서 K는 인간적인 이유로 그들을 구해주려고 노력한다. 프란츠와 뷜럼, 그리고 K 모두 부조리의 희생자이기 때문에, K는 그 둘을 구해주며 부조리에 대항할 수 있다. 하지만 소송(심판)은 끝까지 부정적인 세계관을 버리지 않는다. K가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 자신의 일이라고 관료제에 기대어 행동을 정당화하는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 그리고 K의 행동이 인간적인 이유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비롯되었다는 감정 등이 연대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연대를 위해서는 관료제와 사회 체제에 맞서 싸우고, 그러나 『소송』에서는 연대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종교는 어떠한가? 종교가 억압받는 자들에게 연대의 장소가 될 수 있지만, 소송(심판)에서는 관료주의에 굴복한 부차적 정신에 지나지 않는다. 대성당에서 만난 신부는 구원을 주기는커녕, 소송의 결과가 좋지 않다며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거대한 관료제와 그 안에서 소외되는 개인은 카프카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거대한 관료제는 개인을 언제든지 소모할 수 있는 대체품으로 취급한다. 개인의 삶의 의미는 없고, 오직 관료제를 유지하고 관료제의 의미를 지키는 타자만 존재한다. 관료제에 의해 타자화된 개인은 주체를 스스로 찾을 힘과 용기를 잃고, 관료제 안에서 물화된 자신을 통해 주체를 찾으려 한다. 이러한 과정은 관료제의 영향력과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관료제에서 쫓겨나면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공포감이 큰 역할을 한다. 따라서 거대 관료제는 개인 실존의 적이다.


개인과 개인의 연대를 통해 부조리와 관료제에 대한 저항은 휴머니티로 돌아가야 가능하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실패에 대한 사회적 기준으로의 평가가 아니라 인간적 공감과 그 공감에서 나오는 교류야 말로 연대의 시작이 아닐까? 관료제에서 떨어져 나오는 사람은 2가지 결핍에 시달리는데, 그것은 물질적 결핍과 정서적 결핍이다. 물질적 결핍은 현대사회에서 생존과 관련 있지 않고 타인과의 관계성에 따른 인정과 관련이 있는데 연대로 해결이 가능하다. 물질적 성공이 아니라 정신적 성공에 대한 인정 그리고 결과가 아니라 특정 노동과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인정으로 해결 가능하다. 정서적 결핍 또한 마찬가지다. 관료제가 제공하는 그룹 내의 연대라는 가짜 편안함이 사람들에게 고독에 휩싸이지 않도록 하는데, 이는 개인을 좀 먹는다. 나를 포기해야만 그리고 내가 타자가 돼야만 가질 수 있는 편안함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달콤한 독약이다. 하지만, 연대에 기반한 무리와 거기서 오는 편안함은 독약이 아니라 쓰디쓴 건강약이다. 어렵고 무섭지만, 타인과의 연대 속에서 개인을 찾고 그로 인해 인간이 다시 번성할 수 있다면, 부조리와 관료제에도 맞설 수 있지 않을까?



결론

카프카의 소송(심판)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소설이지만, 어두운 소설이다. K는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소송에 휘말리고, 관료제에 굴복한 사회와 친구들, 그리고 주변인들로부터 소외된다. 빠져나갈 방법은 체제에 굴복하는 것밖에 없다. 이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특징 때문에 고통받는 개인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해결책이 유죄 인정이나 재판 지연밖에 없다는 것은, 사회가 정해놓은 특징에 저항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개인이 직면할 수 있는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 한계 안에서 살면서 운 좋게 소송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인간의 실존이 아니라, 객관적 특징으로 인해 결정되는 인간은 타자일 뿐이다. 타자화된 인간은 체제 내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가 없다. 변호사나 내부 관계자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지만, 그들은 나에게 문제의 원인도 알려주지 않고, 내가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료제와 사회가 규정한 타자는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관료제에 굴복하며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발버둥 치다가 K처럼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 카프카는 그것이 각자가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답도 없고, 벗어날 방법도 없다. 반항이 답일 수도 있고, 순응이 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순응하며 존재를 잃어버린 개인은 언제든지 K처럼 거부할 수 없는 소송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다. 마치 제우스에게 불을 훔친 죄로 독수리에게 심장을 끊임없이 빼앗기는 프로메테우스처럼, 부조리와 관료제의 사슬에 얽매인 개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연대하고 반항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카프카의 소송(심판)이 미완이라는 것은 카프카의 능력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미완이 완성이 아닐까 싶다. 카프카는 인간의 실존을 믿는다. 실존은 본질이 없다. 이처럼 인간은 미완성이다. K의 삶은 사형장에서 완결되지만, 인간은 계속해서 실존을 향해 나아간다. 완성되지 않는 인간이 인간의 본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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