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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이후, 우리가 사랑을 배우는 방식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서론

한국인이 사랑하는, 아니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한국에 처음 소개한 작품은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이다. 1989년 한국에 그의 소설이 소개되었을 때, 출판사의 결정으로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왜 출판사는 원제를 버리고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을 선택했을까?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당대 한국인의 정서에 호소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출판사의 목적이 책 판매라는 것을 감안할 때, 당시 한국에서는 신인 작가에 불과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독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상실' 단어의 사용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80년대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고속 성장을 지속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고속 성장을 경험하던 한국 사회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주었다. 정치적으로도 새로운 시대였다. 전두환 군사 정권은 1988년에 종결되었고, 노태우라는 사람들이 염원하던 직선제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이런 시대에 왜 '상실'이라는 키워드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을까?


첫째, 노동에 따른 보상은 달콤했지만 받는 보상은 달콤했지만, 그 보상을 어떻게 써도 마음속 공허함은 메워지지 않았다. 물질적인 보상은 단기적 보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주어진 보상에 따라 소비는 했지만, 소비가 유의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고속 성장을 동반한 노동이란 우리의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직장 내에서 괴롭힘은 심심치 않게 일어났고, 사람들은 회사라는 조직에 매몰되고 조직이 추구하는 수익에 함몰되었다. 자신의 생각은 중요치 않았고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스파르타 군인처럼 맹목적인 톱니바퀴의 부품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소외로 비롯된 공허함은 물리적 소비로 절대 채워지지 않았다.


둘째, 우리가 염원하고 염원하던 직선제 선거를 쟁취했지만, 사람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똑같은 군인 출신이 대통령을 하고 있고 전 정권 사람들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노태우 정권의 비호 아래 떵떵거리면서 살았다. 역사의 약속을 믿었던 우리 대한민국 민중은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 거부감을 드러낼 여유조차 얻지 못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마저 집어삼켜버린 자본주의라는 쓰나미에 휩쓸린 대한민국 국민은 삶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은 자문했다. “우리가 얻어낸 것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상실과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을 대한민국 사회에 던졌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정답은 있는 것인가? 무엇이 나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어 갈 것인가? 더 나은 미래란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사람들을 '상실의 시대'라는 책으로 이끌었고, 출판사의 예상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상실의 시대'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하루키 열풍의 초석이 되었다.


줄거리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은 주인공 와타나베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와타나베는 독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예전에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나오코를 떠올리고 그녀와의 이야기를 회상한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의 절친 기즈키의 여자친구였다. 기즈키는 나오코와의 데이트에 와타나베를 데려오는 것을 즐겼고, 이를 계기로 셋은 친해진다. 셋의 학창 시절은 그렇게 행복하게 진행되는가 싶었지만, 기즈키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인해 산산조각 나버린다. 와타나베는 기즈키가 자살한 후에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우연히 도쿄의 다른 대학에 다니고 있는 나오코를 만난다.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몇 번의 만남을 가졌고 기즈키를 추모하던 도중 잠자리를 가지게 된다. 이후, 나오코는 정신병을 치료하는 시설로 떠나게 된다.


와타나베는 기숙사에서 '돌격대'라는 별명의 룸메이트와 똑똑하지만 뭔가 인간적이지 않은 나가사와와 교류한다. 나오코와의 이별로 인한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와타나베는 나가사와와 여러 여자를 만나지만 이러한 행동은 공허함을 채우지 못한다. 오히려 더욱 그를 공허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미도리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는 미도리에게 나오코와는 다른 매력을 느끼게 된다.


나오코는 자신이 기거하는 치료 시설에 와타나베를 초대하고, 거기서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룸메이트인 레이코와도 만나고 시설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나오코는 아직 기즈키의 자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을 듣는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와의 만남을 결심하지만, 나오코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


나오코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레이코 씨는 와타나베의 집을 방문하고 둘은 성관계를 맺게 된다. 레이코 씨를 배웅하고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미도리가 어디냐고 묻는 질문에 자신이 있는 곳을 확신하지 못하고 낯선 사람 가운데서 미도리를 부르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내 생각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은 와타나베의 성장 소설이다. 학창 시절 친구의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경험을 한 와타나베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한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처럼 와타나베와 그 주변 인물들은 상실을 경험한다. 와타나베는 친구의 죽음이라는 상실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나오코와 이별하는 상실을 다시 한번 경험한다. 마지막에 나오코가 다시 한번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그의 상실은 극대화되지만,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기즈키와는 다르게 상실을 극복하고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물론 마지막에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낯선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여주면서 아직 불안정하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보여주지만, 미도리라는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이를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 SNS와 휴대전화가 망쳐놓은 현대 사회의 사랑과 관계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는 과거의 낭만이라고 할 수 있는 공중전화, 편지 등을 통한 교류가 이야기 전개의 주를 이룬다. 현대 시대는 스마트폰의 발명으로 인해 공중전화, 편지에 기대지 않고 바로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연락을 취할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즉각적인 연락이 관계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기다릴 필요 없이 문제가 있을 때 연락을 하면 쓸데없는 감정 소모 혹은 오해를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까?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즉각적 연락의 수단을 가진 현대인들의 사랑과 관계는 취약할 뿐만 아니라 사랑과 관계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사랑이란, 자신과 같은 사람을 찾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과 닮아가는 과정이다. 사랑은 즐김과는 다르다. 와타나베와 나가사와가 밤마다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했던 행위는 쾌락 추구이고, 와타나베와 나오코 그리고 미도리가 하는 행위는 사랑이다. 사랑은 결실의 열매다. 끊임없는 인내와 기다림을 통해 변화와 하나 됨을 느끼는 숭고한 행위다. 이런 행위에 거리감과 상상력은 필수적이다. 스마트폰은 거리감과 상상력을 파괴한다. 아무 때나 연락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상대가 어디에 있던지 간에 내 옆에 있다고 느끼게 한다. 언제나 얼굴을 볼 수 있는 영상 통화 기술은 상대방이 무엇을 하는지 상상할 필요성을 제거한다. 하지만 공중전화와 편지는 거리감을 유지하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개체였다.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상대방을 기다리는 나는 상대방의 부재의 원인에 대해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연민과 애정에 에너지를 주입한다. 왜 오지 않을까. 어디선가 다치기라도 한 걸까. 아니,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기다림은 그렇게 상상과 이해의 언어로 채워진다. 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고 상상력을 통해 나의 범주 안에 그의 상황을 위치시키는 과정은 동일화를 통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지금의 관계가 가볍고 쉽게 요동치는 이유는 좁혀지지 않은 거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카드 넘기듯이 상대방을 넘기고 딜러샵에서 차를 주문하듯이 인종, 키, 성향 등을 입력해서 나의 선호도에 가장 맞는 상대방을 찾아주는 SNS와 소개팅 앱 또한 관계의 불안정성에 기여한다. 언제라도 나의 선택에 따라 데이트 파트너를 찾을 수 있다면 지금의 관계가 소중하지 않다. 조금의 문제라도 생긴다면, 더 완벽해 보이는 관계를 찾아 떠나면 된다. 하지만 완벽한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형수술이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심리적 문제라서 완벽한 모습을 구현할 수 없는 것처럼,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완벽한 짝을 찾는 소개팅 앱과 SNS 또한 심리적 문제다. 결국 완벽한 상대란 환상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다름을 끌어안는 용기다.


소개팅 앱과 SNS가 없었을 때, 우리는 친구의 소개 또는 우연한 만남에 기대어 관계를 찾았다. 이런 시스템하에 모든 기회는 소중하다. 지금의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다음 기회가 없을 수 있다. 친구가 소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고, 우연한 만남이 바로 지금일 수도 있다. 이런 한계점을 가진 상황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거리감은 문제가 아니라, 사랑으로 다가가는 길이다. 거리감을 좁히려는 노력이 없이는 사랑을 성취할 수 없다.


매우 낭만적으로 들린다. 낭만적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본질에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 더욱 안정적인 관계를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위에 언급한 것처럼 거리감과 그 거리감에 적응하는 것이 사랑의 필수라고 생각하는 마인드셋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쉽게 실증 내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고 다름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이 안정적 관계에 필수적일 것이다.



(2) 인간은 상처 입고 방황하는 동물이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은 나와 마찬가지로 상처 입고 방황하는 동물뿐이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을 관통하는 주제는 상처 입고 방황하는 동물의 성장이다.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모든 사람은 상처를 입고 방황한다는 것이다. 나오코도 그렇고 와타나베, 레이코 심지어 돌격대도 그러하다. 이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상처 입고 방황하지만, 또 각자의 방법으로 회복하기도 한다. 물론 가끔 회복하지 못하고 자기의 목숨을 끊어내는 존재도 있지만, 이 또한 그들의 선택이다. 누구도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에 대해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세상은 치료와 격리라는 방법으로 타인의 상처 입고 방황하는 모습을 평가하고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체제에 순응하고 상처를 숨기고 방황해보지 않은 엘리트들이 그 방법을 정한다는 데 있다. 체제에 순응하느라 자신을 드러내보지 않고 한 번도 상처받지 않았던 타자가 나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무서워 자신을 숨기고 밤마다 다른 여성을 탐닉하던 나가사와는 분명 사회 지도층이 되겠지만, 그가 나오코나 미도리 혹은 그의 여자친구의 상처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내릴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이에 관련해, 나오코가 입원했던 정신병원의 의사와 관리자들이 그들과 같은 정신병에 걸린 것같이 행동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들은 이해를 통한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병원에 방문한 와타나베가 의사인지 환자인지 헷갈려한 이유는 문제가 아니라 치료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상처받은 사람과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이를 판단하는 전문가들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방치 혹은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는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사회에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한 사람들과 치료한 사람들을 구분한다. 치료하지 못했던 나오코와 기즈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사랑도 못하고 자기를 꽁꽁 싸매버린 나가사와는 외국으로 떠난다. 살아남고 일본에서 삶을 살아가는 시지프의 형벌을 받아들인 존재는 미도리, 레이코 그리고 와타나베뿐이다. 이들의 해결책은 결국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인간은 상처를 치료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과 에너지를 얻는다. 그뿐이다. 결국 체제나 혁명 그리고 사상이 아니라 우리가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3) 개인의 경험이 개인을 만들어낸다. 아무리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경험이 미래의 나의 한 부분이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의 시작이 과거를 회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과거를 회상한다는 것은 물론 왜곡된 기억을 꺼내는 일이다. 인간의 기억은 항상 왜곡한다. 자기의 자아를 위해 혹은 자기 합리화를 위해 기억을 왜곡한다. 그리고 왜곡된 기억은 무의식에 저장되어 지금의 나를 형성한다. 아무리 괴롭고 잊고 싶은 과거라도 버릴 수 없다. 그 과거 또한 소중한 나이다. 소중한 나의 일부분인 모든 기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를 이해할 수 있다.


기억은 왜곡되지만 육체적 느낌은 그렇지 않다. 상대방을 기억하고 그 당시를 회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육체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와타나베는 자기에게 중요한 모든 사람과 성관계를 가진다. 우리가 가진 상식으로는 비도덕적으로 보이지만 상대방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육체적 관계라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나오코에 대한 기억의 저장소가 될 수 있는 그날의 기억은 사회의 도덕적 잣대와 기준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다. 우리가 평소에 겪는 소재를 사용하지만, 그의 서술 방법은 매우 특별하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그의 묘사는 매우 탁월하고, 끝 모를 그의 음악적·인문학적 지식은 그의 묘사에 아우라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왠지 모르게 나와 닮았다.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 내가 겪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듯하다. 바로 그 익숙한 낯섦,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친밀감이 하루키 문학의 진짜 힘이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는 예전 책이지만 지금 방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이정표가 될 만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내 몸이 내는 소리를 듣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의 상처를 회복하라" 이보다 더 탁월한 인생 조언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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