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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몰락과 무의식의 귀환

서론

1900년에 발간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마르크스, 다윈과 함께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이다. 마르크스, 다윈, 그리고 프로이트는 모두 기존 사회가 당연하게 여긴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사상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변화시킨 관계와 이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다윈은 인류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이는 인간과 신이라는 고정된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인간을 결정짓는 것은 계급이라고 주장했다. 개인의 성향이나 종교, 성품과 무관하게, 인간관계는 그가 속한 계급과 그 계급을 규정하는 경제구조에 의해 형성된다고 마르크스는 보았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경제구조의 변화가 사회 변혁의 필수 요소라는 사상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어떤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을까?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집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선언한 뒤, 인식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류는 무한한 자신감과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었고, 교육과 계몽이 인류 문제의 해결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러한 인식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는 인간의 주체가 의식이 아니라, 억압된 욕망과 그것을 감시하는 전의식이라고 보았다. 즉,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닌 무의식과 전의식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은 2차 세계대전의 광기로 인해 현실적 설득력을 얻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면 무의식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무의식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물론, 이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일 수 있다. 그렇다면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는 어떻게 무의식의 존재를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꿈은 소망 충족의 도구

꿈의 해석의 핵심은 간단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은 과거의 경험에 의해 억압된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소망 충족의 역할을 한다. 어떤 이유로 인해 과거에 개인의 욕망이 억압되었고, 인간은 꿈을 통해 억압된 욕망을 충족하는 대리만족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의 재료는 신의 계시나 예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험에서 나온다. 꿈은 나의 욕망을 반영하기 때문에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이 꿈에 나타날 수 없다. 이러한 경험은 외부적 자극, 내부적 인식 자극 또는 고통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꿈을 꾼 사람들은 꿈에서 낯섦을 느낄까? 나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꿈이라면 친밀감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무의식, 의식, 전의식이라는 의식의 단계와 관계가 있다.


무의식, 의식, 전의식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무의식, 의식, 전의식으로 나뉜다. 의식은 우리가 현실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아다. 즉, 우리가 현재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있는 인식과 행위를 담당하는 단계다. 무의식은 억눌린 욕망과 본능이 잠재되어 있는 어두운 지하실과도 같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지만, 생존을 위해 사회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부모나 보호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능과 욕망을 억제당한다. 울고 싶다고 무한정 울 수 없고, 먹고 싶다고 무한정 먹을 수 없다. 친구의 장난감을 가지고 싶은 욕망도 억제되어야 한다.


부모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아이들의 모든 욕망이 충족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억압된 충동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이라는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다. 유아기 때는 부모나 사회가 이러한 욕망을 조절하지만, 의식이 성장하면서 자아가 스스로 조절 능력을 갖추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 자기 조절 능력을 전의식이라고 불렀다. 전의식은 억눌러야 할 욕망과 실현할 수 있는 욕망을 구분하고, 그 기준을 의식에게 전달한다. 대부분의 경우, 전의식이 무의식의 욕망을 압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에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전의식이 약해지면, 억눌린 충동은 범죄나 폭력으로 폭발할 수 있다.. 반면, 무의식이 강해져도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심리적 갈등으로 남을 경우, 신경증이나 히스테리와 같은 정신적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무의식과 전의식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아가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압축, 전이, 상징화, 2차적 수정

대부분의 경우, 전의식이 무의식을 억누르기 때문에 인간은 충동과 본능을 억제하며 사회에 순응한다. 하지만 수면을 취할 때, 전의식이 약해지고 무의식에 억눌린 충동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전의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의식의 충동은 상징과 전이, 압축 같은 우회적 방식으로 꿈에 등장한다. 이때 꿈은 압축, 전이, 상징화, 2차적 수정의 과정을 거친다.


압축: 여러 상황과 욕망이 압축된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꿈속의 인물이 아버지, 형제, 경쟁자의 특성을 결합한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다. 또는 성공하려는 욕망과 경쟁자를 없애려는 욕망이 하나의 사건으로 결합되어 나타날 수 있다.


전이: 덜 중요하거나 덜 위협적인 대상으로 욕망이 변화된다. 예를 들어, 살해 욕망이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아니라, 기차역이 파괴되는 장면으로 전이될 수 있다.


상징화: 무의식적인 욕망이 특정 상징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뱀은 성적 욕망이나 두려움을 상징하며, 계단은 성공을, 물은 감정을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은 개인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지만, 보편적인 상징도 존재한다.


2차적 수정: 꿈을 꾼 후 각성한 개인이 꿈을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꿈은 파편화되어 있어 통일성을 찾기 어렵지만, 개인이 꿈을 일관성 있게 수정하려는 시도를 한다. 또한, 전의식이 억압된 욕망을 수정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변형시키는 과정도 2차적 수정에 해당한다.


이 네 과정 덕분에, 꿈은 나의 경험에서 비롯되지만 나에게 낯설게 다가온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꿈 해석에 대한 고대의 가설들(예지몽, 계시몽 등)이 생겼지만, 프로이트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꿈의 해석이 가지는 의의

꿈의 해석의 의의는 무엇일까? 이 책은 인간의 자만에 대한 경고이자, 진보의 약속을 맹신하는 시대에 던지는 경종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데카르트의 철학적 명제 이후, 인간의 자신감은 한없이 팽창했다. 특히 뉴턴의 과학적 법칙에 힘입어,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성은 인간이 갈고닦아야 할 도구로 간주되었으며, 그 결과 무한한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발전이 인류를 비참함에서 구원하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이 퍼졌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러한 믿음에 과감하게 **"노"**라고 외쳤다. 그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힘이 자아나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과 전의식에 있다고 보았다. 우리의 의식은 단지 무의식과 전의식의 갈등 속에서 나온 수동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이성적 사고에 기반한 무제한적 자유만으로는 문명을 이루고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교육과 체제라는 기본적인 발판이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특수성 때문에 억압과 뗄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다른 동물들처럼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살아갈 무기를 갖추고 있지 않다.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를 통해 스스로를 지킬 수 없고, 위장색이나 겨울잠 같은 생존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변변치 않은 육체를 가지고 365일 투쟁해야 하는 존재다. 이러한 인간의 나약함은 우리가 사회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나 서로 다른 욕망과 이해관계를 가진 인간이 사회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욕망을 억제해야 하는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인간을 병들게 만든다.


인간은 나약하다. 유아기에는 부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특히 어머니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이러한 육체적, 정신적 유대 관계는 아이가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성적 충동을 가지게 만든다. 그러나 사회제도와 아버지라는 존재가 그러한 욕망을 억누르게 한다. 결국, 생존과 발전을 위해 우리는 사회와 가족이라는 체제를 만들었고, 본능을 억압하며 근본적 욕망을 무의식에 숨기게 되었다. 정신분석학의 기본 명제인 억압된 욕망은 언제든지 돌아온다는 말처럼, 억눌린 무의식은 언제든지 우리를 조종하기 위해 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의식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 전의식이 무의식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는 범죄자들의 존재가 그 증거임을 자주 목격한다. 히스테리 환자와 신경증 환자 또한 무의식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교육과 체제는 전의식이 무의식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강력한 무기를 제공해 준다.


교육은 어릴 때부터 전의식과 협력하여 무의식을 억제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교육은 사회에서 허용되는 행위와 허용되지 않는 행위를 구분하고, 허용되는 행동을 하도록 교육한다. 허용되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 체벌을 가하며, 본능을 무의식의 창고로 몰아넣는 역할을 한다. 물론 지나치게 억압적인 교육은 오히려 인류 발전을 저해할 수 있지만, 바람직한 교육은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필수적이다.


체제 또한 마찬가지다. 법과 공권력은 자아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동시에 전의식의 편에 서서 사회를 지탱한다. 법과 공권력은 고통과 벌을 통해 자아를 통제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와 발언의 자유, 예술과 미술이라는 창조적 활동을 통해 무해한 욕망의 표출을 보장하고 대리만족을 제공해 준다.


민주주의와 발언의 자유, 그리고 예술

민주주의는 공권력과 교육을 통해 억압되어야 하는 욕망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그에 따른 변화를 추구한다. 개인이 자신의 의견을 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무조건적인 억압을 당할 것이며, 표출 창구의 부재는 오히려 무의식의 힘을 강화하고, 전의식의 정당성을 약화시킬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의견 교환을 통해 억압되었던 본능이 더 이상 억압되지 않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간통이 한때는 죄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처벌받지 않는 것처럼, 낙태도 합법화되었다.


발언의 자유는 억압된 자아에 자유를 부여한다. 전의식과 무의식 간의 갈등이 발생할 때, 억압에 지친 자아는 무의식의 편에 설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발언의 자유는 욕망의 표출을 허용하여 긴장을 완화시킬 수 있다.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개인은 자유를 느낄 수 있다. 또한 발언을 통해 타인의 반응을 확인하고, 그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면, 전의식은 더 큰 정당성을 얻게 된다.


예술은 두 가지 면에서 특히 중요하다.

대리만족: 예술은 소망했던 욕망이나 억눌린 욕망을 보여준다. 발자크나 사드의 소설을 통해 억눌린 성적 욕망을 과감하게 드러내며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적나라한 표현이 그러한 욕망의 문제점과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며, 전의식의 편을 들어준다.


잃어버린 욕망의 발견: 너무 억눌려 무의식조차 찾기 힘든 욕망에 끈을 제공한다. 예술가는 태초의 욕망을 작품을 통해 드러낸다. 너무 억압된 욕망은 뒤틀린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태초의 욕망을 이해하고 이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집단적 무의식의 승리

지금까지는 개인적인 측면에서 무의식과 전의식의 대립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집단에서 무의식의 승리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인간은 억압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존재임을 알고 있다. 사회가 체제와 교육을 통해 해로운 욕망을 무의식의 창고에 저장해 둔 덕분에 사회가 유지된다. 하지만, 전의식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억압된 무의식이 분출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2차 세계대전은 전의식의 약화로 인해 집단적 무의식이 승리한 결과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국민들은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꼈고, 무의식에 숨겨진 파괴적 욕망과 승리에 대한 열망은 히틀러와 나치를 통해 표출되었다. 전쟁 패전국으로서의 경제적 손실과 전쟁 배상금은 그들에게 끝없는 절망감을 안겨주었고, 이러한 상황은 본능을 억누르는 전의식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히틀러와 나치는 스와스티카와 같은 고대의 상징과 승리의 비전을 내세우며,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함으로써 무의식에 억눌린 모든 욕망을 표출했다. 이러한 집단적 무의식의 승리는 인간이 저지를 수 없는 잔인한 행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전의식의 정당성과 억압의 수단이 모두 사라진 독일 사회는, 무의식에 조종당하는 자동인형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믿어왔던 이성은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했고, 그 결과는 끔찍한 전쟁이었다.


현대의 집단적 무의식

민주주의의 승리로 정의되던 시대가 지나고, 독재가 다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민주주의의 무능에 실망한 많은 나라에서 독재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때 민주주의가 사라질 것 같지 않았던 선진국들에서도, 민주주의에 싫증난 대중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당의 부활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민주주의의 퇴보와 포퓰리스트의 등장은 시민들이 더 이상 민주주의를 신뢰하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그들의 믿음은 크게 배신당했다. 빈부 격차는 확대되고, 자유무역은 하층민의 직업을 빼앗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포퓰리스트들은 인간의 무의식에 숨겨진 본능과 억압된 욕망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남성들에게 힘을 되찾아 주겠다고 주장하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이민자라고 지목한다. 문제의 원인으로 설정된 이민자들을 내쫓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정치적 행보는 전의식의 힘을 약화시키고,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무의식의 힘을 강화한다. 우리는 야만적 사회로 향하는 길목에 놓여 있다.


프로이트가 바라본 인간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그는 인간이 욕망을 충족하지 못해 불만족스러워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인간은 선해질 수도 있고, 동시에 파괴적인 존재로 타락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본능과 욕망을 억제하고, 그 억제된 욕망이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결국 우리는 민주주의와 사회적 계약의 의미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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