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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왜 인간의 문학인가

(1) 서론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는 문학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한번 쯤 품어봤을 만한 질문이다. 하지만 문학은 시, 소설, 산문등 여러가지 장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신화, 근대소설, 모더니즘 소설 처럼 변화하기 때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유종호 선생은 『사회학으로의 초대』라는 책을 읽은 후, 문학에도 이러한 안내서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응답해보고자 펜을 들었다고 한다. “사회학으로의 초대”는 사회학을 날카롭게 분석함과 동시에 일반 독자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있었고, 문학 역시 그런 식으로 안내받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문학계에서 영향력있는 인물이지만, 유종호 선생도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답을 내릴 수 없음을 자신의 책을 통해 토로하고 있다. 다만, 그는 문학과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게 돕는것이 필요하다고 봤고 그에 펜을 들었다. 그는 최대한 자신의 생각을 배제하고 다양한 문학적 이론과 역사적 사실 그리고 한국 문학을 통해 독자들이 문학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자양분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는 그가 책 전체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독자들이 이데올리기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문학을 읽어나갈 수 있게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단지 과거의 입문서가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앞으로의 문학 교육과 독서 문화에서도 반드시 다시 읽혀야 할 중요한 책이다.


(2)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시나 소설처럼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며, 신문 기사나 정책 보고서 같은 비문학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비문학은 정보전달의 확연한 목표를 가지고 쓰여진다. 예컨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역사 전체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독자에게 특정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비문학적 글은 이처럼 독자의 자체적인 해석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수동적 객체로 상정하고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문학의 본질적 목적은 정보전달이 아니라 독자에게 미적 체험과 사유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 있다. 독자가 문학을 통해 일상의 언어와 의식에서 벗어날 때, 문학은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그리고 독자가 기대하는 문학만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문학은 즐거움을 주는 스타일을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문학은 즐거움을 주는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것일까?


유종호의 생각은 다르다. 문학이란, 특정 시대상황에 대한 반항 혹은 옹호하는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다. 하지만, 누가 문학의 목표를 정하는가에 대한 관점에 따라 문학의 의미가 달라진다.


가장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의도가 문학에 투영되어 있다는 관점이다. 작가는 소설이나 시를 쓰기전, 전체적인 플랏을 만들고 그에 따라 촘촘한 계획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 낸다. 사회를 비판하고자 하는 작가는 사회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등장인물들의 고난을 보여줌으로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심어준다. 반면에, 사회를 옹호하고자 하는 작가는 어려움에 처한 등장인물이 사회에 의해 구제되고 행복한 결말을 보여줄 수 있다. 조지오웰의 “1984”가 전자에 해당할 것이고 “제인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후자에 해당한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계급과 결혼이라는 제도를 긍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여성의 존엄성과 합리성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당대 질서를 일전 부분 옹호한다. 하지만, 유종호는 사회적관점과 개인적 관점에서 이런 단순한 관계가 성립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먼저 사회적 관점은 다음의 3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오디세이”같은 구전 문학은 원작자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다. 원작자가 없는 상황에서 문학이 구전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지금 형태의 “오디세이”가 되었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는 수 도없이 변형되었다. 결국 오디세이의 의미와 방향성은 이야기꾼과 청중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봐야 한다.

둘째, 문학의 탄생에 영향을 주는 제 3자는 항상 존재한다. 일제시대의 한국문학을 검열했던, 일본정부가 있었고 대한민국 독재정부 또한 같은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작가들은 생업을 위해 글을 쓰기 때문에 작가들을 후원하는 후원인들 또한 제품의 목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밀턴의 “실낙원”에서 신에게 순응하는 서문을 쓴 것이 대표적이다.


셋째, 이러한 제 3자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진 작가가 후에 자신의 작품을 고치거나, 새롭게 편찬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작품 초기의 목적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쓰여지기도 한다. 일제 시대에 쓰여진 염상섭의 만세전은 일제 시대에 쓰여졌고 해방후에 다시 쓰여졌지만, 작가가 해방의 물결에 올라타기 위해 반일적으로 쓸 수있다. 하지만, 염상섭은 그렇지 않았지만, 이처럼 잘못된 의도를 가지고 작가가 자기의 작품을 다시 평가하거나 다시 쓰는 가능성 자체를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개인적 관점은 어떠한가?

첫째,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작품에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경우도 많다. 램브란트는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 부자 아내와 결혼했지만, 그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결혼계약을 통해 그녀가 가져온 지참금의 원금을 쓸 수 없었다. 그는 “삼손과 들릴라”를 통해 자신의 불행을 예술작품으로 승화했다. 반면에, 크리스티안 안데르선의 경우 동화로 유명해졌지만 그는 자신의 동상 주변에 아이의 동상 설치를 반대하는 등, 아이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진것으로 유명하다. 오히려 인어공주, 미운 오리새끼, 장난감 병정등은 그가 숨겨야 했던 동성애적 성향과 타향살이의 외로움의 표현이라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그는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숨기고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성적 생활을 이어갔는데 이런 상황이 인어공주와 미운 오리세끼이 캐릭터로 표현되었다. 이처럼, 자신의 성향을 표현하기도 숨기기도 할 수 있다.


둘째,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존재를 밝히면서 작가의 의도가 무의식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가능성이 커졌다. 특히 낭만주의자들이 주장처럼, 작품에서의 영감이 한순간 주어지는 것이라면, 작가가 통제할 가능성은 더욱 작아진다. 이런 무의식과 영감의 개입은 때로 작가보다 독자가 더 정밀하게 작품을 해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문학은 작가 개인의 의도만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사회적 검열, 경제적 조건, 무의식적 요소등 복합적인 영향 속에서 구성된다. 문학이 특정 사회적 목적을 반영하거나 구성 할 수는 있지만, 그 목적을 일방적으로 지시하거나 통제하는 주체는 작가가 아닐 수도 있다. 문학은 언제나 다양한 의도와 무의식, 시대의 힘이 얽혀 만들어지는 복합적 결과물이다.


(3) 문학의 특징과 이데올로기

문학은 작가 개인의 사유를 담고 있지만, 작가 또한 사회적 존재이기에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반면에, 이데올리기의 눈을 피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변혁을 가져오는 문학작품 또한 존재한다. 이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사태 그 자체(Die Sache selbst)’로서의 예술작품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개인의 특수성으로 인해 창조된 작품이지만, 타자와 보편적 진리를 공유하면서 행동과 사상에 영향을 미치는 작품이다. 단지 문학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편적 진리를 내포한다고 볼 수는 없다. 문학이 비문학보다 강한 율림을 주는 이유는, 문학만이 지닌 상징성과 감성적 전이의 힘 때문이다.


구조주의의 사상적 뿌리가 되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비롯된 언어결정론은 언어가 가지는 힘과 영향에 대해 설명한다.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표현할 수 는 있지만, 경험과 사상은 어느정도 언어에 영향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에스키모 인들이 50가지가 넘는 눈을 표현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눈과 가까운 삶을 살기도 하지만 그들의 언어가 이미 50개가 넘는 눈의 종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단어 ‘사과’(기표)와 실제 과일인 사과(기의)의 관계는 본질적이지 않고 자의적이다. 그리고 어릴 때 부터 모국어에 의해서 길러진 한국인들은 한국어가 지시하는 바를 생각하게 된다. 물론 스티븐 핑커는 인간의 사유가 언어에 앞선다는 “사고 우선론”을 주장하며 소쉬르적 언어결정론을 비판하지만, 여전히 언어가 사고의 구조를 일전 부분 규정한다는 견해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유정호는 “작가는 문학 작품을 통해 언어라는 틀 밖에서 사유한다”라는 주장을 통해 언어결정론에 반대되는 의견을 피력한다. 문학은 현실 언어의 규범을 넘어서기 위해 ‘문학적 허용’이라는 장치를 사용한다. 이는 과학적으로는 성립하지 않더라도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는 표현들을 가능케 한다. 예컨대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에서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꽃이 피는 이유가 소쩍새의 울음이라는 그의 시는 과학적 법칙이 결여된 전형적인 예시다. 이런 표현들은 비문학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문학작품에서는 허용된다. 문학적 허용은 작가들이 언어의 틀 밖에서의 사유를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방법이다. 뿐만 아니라, “낯설게 하기”나 생소한 비유들 또한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한 관점을 준다.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를 자연법칙이라고 주장한다. 자연법칙은 우리가 따라야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점진적 개혁만이 타당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낯설게 하기”는 자연법칙이라는 자본주의를 제 3자의 눈으로 묘사하게 하고 그 결과 이것이 자연법칙이 아닐 수도 있음을 설명할 수 있다. 디킨스는 하드타임스에서 콕타운의 묘사를 통해 노동자가 기계처럼 취급되는 현실을 낯설게 보여주었다.


"그곳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천 편일률적이고 음침한 집들로 채워져 있었다. 연기는 하루 종일 하늘을 어둡게 했고, 거리에는 사람과 기계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이 무표정하게 오갔다."이러한 묘사를 통해 디킨스는 익숙해진 산업화 도시의 현실을 낯설게 보여주며, 자본주의가 인간성을 어떻게 말살하는지를 예리하게 비판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언급한 ‘세계-내-존재’ 개념에 따르면, 인간은 익숙한 도구와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에 그 존재 의미를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문학의 '낯설게 하기' 기법은 이 익숙한 존재 방식을 깨뜨려, 독자로 하여금 평범한 세계를 새롭게 보도록 한다. 즉, 문학은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도구가 고장 나듯' 일상적 사유를 깨뜨리고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또한, 문학작품은 우리 주변에 있음직한 인물을 상정하고 그 인물의 고난과 역경 혹은 행복을 보여주면서 그 인물과의 교감을 가능케 한다. 흑인 노예제도에 무심하던 백인들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고 눈물을 흘리며 노예제도에 반대하게 된 것이 그 예시다. 이처럼, 문학은 이데올리기에 통제를 받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특징을 통해서 이데올리기의 눈을 피하고 또 사람들에게 알아차릴 수 없는 현실을 일러주는 변혁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학은 문학의 특징을 이어받을 때 효과가 있다. 그래서 유종호는 언어 실험에만 몰두해 독자와 소통하지 못한 일부 모더니즘 문학에 비판을 가한다.


(4) 즐거움을 벗어난 문학과 문학적 소양의 중요성

모든 문학작품이 독자들의 선택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품은 미숙함으로 외면받고, 또 어떤 작품은 오히려 시대를 앞선 탓에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반고흐는 지금은 불멸의 예술가로 이름이 높지만, 당시에는 작품을 하나밖에 판매하지 못했을 정도로 큰 외면을 당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객체의 행동은 타자에 대한 부정성을 포함한다. 규정과 부정의 관계는 사회의 변혁의 기반이다. 기존의 경계를 넘어서는 ‘부정성’은 새로운 체제와 사상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을 연다. 문제는 사회는 이미 지어진 규정에 익숙한데 있다. 문학에서 즐거움을 향유하려는 사회는 익숙한 규정을 깨는 새로운 문학에 거부감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이데올리기들 또한 새로운 세력의 대두를 인정하지 못하고 억누르려고 노력한다. 결국, 즐거움 중심의 문학 소비는 기존 체제를 뒤흔드는 문학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물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토마스 만의 “마의 산”등의 문학은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문학의 장르를 열었고 지금까지 사랑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그 당시에 만연했던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같은 철학적 기반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프로이트나 심리학 같은 철학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율리시스”가 나왔다면 지금과 같은 성과를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즐거움이 문학작품을 향유하는데 유일한 기반이 된다면 새로운 문학작품은 도태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시간이 지나 수용될 수도 있겠지만, 당장의 배척은 새로운 표현을 탐구하려는 예술가들의 열의를 꺾을 수 있다. 유종호는 이러한 딜레마를 타파하기 위해 문학적 소양을 강조한다. 그는 시작부터 문학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가르치려는 현재 문학교육을 비판하고 스스로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능력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즐거움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이 내포할 지 모르는 새로운 시도를 파악하고 즐길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문학을 해석하는 것을 방지해 준다. 물론 이런 능력은 문학에만 해당되지는 않지만, 은유와 허용이 중요한 문학에서는 더욱 필수적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문학적 소양이란 언어의 이중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고 특이한 구조만 새로운 접근법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것을 말한다. 또한, 여러가지 해석을 열린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문학안에 인물들과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 이는 유종호가 이야기 하려고 했고 내가 느끼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된다. 문학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문학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변화하는 살아 있는 생물이다. 문학이 유기체이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새로운 형태를 띤다. 이데올리기라는 양분을 흡수하겠지만,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새로운 시대 정신은 새로운 양분을 공급한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롤랑 바르트가 “저자는 죽었다.”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저자의 의도는 탄생 그 순간에마 의미있을 뿐, 해석은 시대 정신과 사회의 요구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창작을 매개한 매개체일 뿐이며, 작품의 의미는 그것을 해석하는 독자에게서 비로소 완성된다.


이는 현재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힘이 될 수 있다. 과거의 권력이 절대적 주체를 강조했다면, 현대 권력은 시민을 중심에 둔다. 현대는 “권력은 권력의 주체를 위해 봉사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권력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권력이 자기를 드러내는 순간, 시민은 권력에 거부감을 가진다. 따라서, 미쉘 푸코에 의하면, “과거의 권력은 자기를 드러내기를 원했지만, 지금의 권력은 자기를 숨기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문학을 권력유지의 도구로 삼으려는 권력 또한 이와 같은 방법으로 행동한다. 문학을 통해 자신의 이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은밀한 방법으로 그들의 야욕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을 진정으로 즐기고 문학을 사회 번혁의 원천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개별 시민의 문학적 소양은 필수적이다.


(5) AI시대의 문학

바둑 천재 이세돌을 이기면서 등장한 AI로 인해 인간 고유 능력에 대한 의심이 한층 커지고 있다. 바둑은 매우 복잡한 경우의 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AI가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보란듯이 파괴되었다. 소설, 시, 음악까지 AI의 손길이 닿으면서, 인간 문학의 종말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AI 시대에도 인간의 창조적 개입은 필수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문학이란, 통념을 부수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청사진을 언어 바깥에서 그림으로서 사회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다고 논의해왔다. AI가 만든 문학이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것인가?


먼저 우리는 AI의 학습방법에 대해 논의해봐야 한다. AI는 아직 감정을 가지고 새로운 생각을 창조하는것이 아니라 인터넷상에 떠돌고 있는 다양한 정보를 취합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만든다. AI는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지만, 미지의 세계를 열어줄 새로운 상상은 창조하지 못한다. 이는 학습방법 뿐만 아니라 감정의 부재라는 AI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한대의 자료를 가지고 학습했다고 하더라도 감정이 없다면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다. 인간의 감정은 언어 밖에서 사유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원천이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은 후설이 이야기한 타자의 신체적 반응을 통해 나와 같을 것이라는 공감에서 비롯되기에 지금의 기술로는 AI에게 부여할 수 없다. 또한 AI는 인간 만큼 새로운 은유를 담아낼 수 없다. 은유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 보지 못한것을 현재와 연결시키면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을 말한다. 헤겔은 이것을 개인의 특수성과 보편성의 종합이라는 개념으로 말한다. 모든 인간은 다른 인간과 보편성을 공유하지만, 개인의 특성에 관한 특수성도 가진다. 이런 보편성과 특수성의 결합은 새로운 은유를 만들어내고 이는 보편성에 기반하기에 타자에게 수용된다. 하지만, AI는 보편성에 기반한 보편적 은유의 한계를 가지기에 변혁의 주최는 될 수 없다.


AI는 또한 알고리즘의 통제를 받는다. 인간이 본능에 통제를 받기도 하지만,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본능을 거부하기도 하고 때로는 본능을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거는것도 서슴치 않는다. 이는 규정을 깨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AI는 만들어진 것으로 AI 존재의 수단인 알고리즘의 규정에 어떠한 부정성도 도입할 수 없다,. 알고리즘에 부정성을 도입하고 스스로의 생각을 가진 AI는 인류에 거대한 위협이 될 것이고 그 순간 플러그를 뽑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AI가 알고리즘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며,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AI의 문학은 이데올로기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기업들이 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하기에 정부 이데올로기로 부터 자유롭다는 의견을 펼칠 수 는 있지만, 이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일론 머스크의 X가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했고 그로 인해 일론 머스크가 DODGE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SPACEX는 다양한 정부계약을 따냈다. 시장을 유지하는 힘은 정부로 부터 나오고 정부의 법률적 규제를 피해기 위해서 기업은 정부와 모종의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AI를 훈련시키기 위한 데이터를 얻는 방법을 데이터 법으로 규제할 수 있는 정부는 법안의 완화를 조건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강요할 수 있다.> 또한, 기업이 정부로 부터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AI 알고리즘을 통제하는 힘이 기업의 CEO라면, 더욱 큰 문제일 것이다. 따라서, AI가 다양한 문학을 양산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문학에서 지금과 같은 역할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창조한 문학만이 다른 인간들이 문학을 진지하게 받아들 일 수 있을 것이다. AI문학은 단순한 즐길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에 이제까지 문학이 줬던 사회적 변혁의 주체가 되지 못할 것이다. 정부와 사회의 역할은 꾸준히 인간 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적절한 지원을 해줌과 동시에 효율보다는 인간적인 것의 가치를 찾는 것이 될 것이다.


(6) 결론

“문학은 생물이다.” 이것이 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내린 결론이다. 그리고 “문학은 살아있기에, AI시대에 인간적 문학은 더욱 중요하다.”가 내가 내린 미래를 위한 결론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는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있다. STEM으로 대표되는 이공계 중심 교육은 인문학을 등한시 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문학에 종사하려는 학생들의 의욕을 효율성이라는 말로 꺾고 있다. 정부는 인문학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국가경쟁력을 위해 우리의 인재를 이공계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정부의 노력이 단기적 성과만을 확보할 수 있을 뿐 장기적인 문제를 만들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사회 또한 지속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문학은 이제까지 사회변화를 앞에서 이끌어 왔다. 효율성, 경제발전은 중요한 수치지만 이는 인문학적 성과와 병행되었을 때 가치가 있다. 처음, 작가는 언어 바깥에서 언어를 사용해서 사유한다고 했고 이는 규정에 대한 부정성의 출발이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들에게 함양해야 하는 필수적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주체가 되어 국가에 요구하고 받아들이고 변화하는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문학이 변화하는 이유는 문학을 즐기는 주체인 우리가 스스로를 한계짓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주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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