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고정관념에 대한 책이다. 우리는 서구적 지배체제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서양의 가치체계에 물들어 있고, 이는 우리에게 벗어날 수 없는 몇 가지 프레임을 던져주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10가지 프레임은
<과학, 교육, 문자, 법, 민주주의, 시간, 국민, 예술, 죽음, 공동선>이다.
저자는 이러한 10가지 프레임은 서구중심주의에서 발생한 가치일 뿐이라고 말한다. 특히 서구가 자신의 제국주의적 열망과 야심의 실현을 위해 이러한 프레임을 이용해 왔고 우리의 의무는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대안적인 가치체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작가는 역사학자로서, 매우 특이한 분석적 방법을 이용한다. 논리적인 접근법도 있긴 하지만 마치 푸코의 고고학을 연상시키듯, 프레임의 탄생 배경부터 암울한 과거 그리고 그 프레임이 달성하려는 숨겨진 의미까지 설명한다. 매우 색다른 접근이기에 책을 읽으면서 쉽고 흥미롭게 다가갔지만, 나는 이 책이 서양문명에 대한 필요 이상의 비판과 비난 그리고 상투적인 대안 제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열 가지 프레임’이 서구의 억압적 장치였다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역사 발전의 관점과 문명의 내재적 변화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시선으로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단절보다는 축적을, 급진보다는 점진적 공약을 지향하는 사유의 흐름을 통해, 저자의 일면적인 비판을 반박한다.
(2) 10가지 프레임??
이 책의 시작은 과학적 프레임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라는 챕터로 시작한다. 이 챕터는 과학자들의 연구가 객관적이고 투명하지 않을 수 있고, 이데올리가 과학적 연구과 지식을 악용해 정치적 목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저자가 일하는 유니버시티 런던 칼리지에는 독일 인류학자 피셔가 만든 머리카락 색깔 측정기가 있는데, 이는 나치의 우생학의 모태가 되었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우생학에 관한 연구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또한 정치권과 이데올로기는 계속해서 잘못된 과학적 결과를 이용해 인종차별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이 인종차별에 반대되는 일원설을 주장했지만, 그의 적자생존 즉 살아남는 인종이 더 사회에 적합한 인종이라는 개념이 악용되었다고 한다. 과학이 가치중립적이고 진리를 추구한다는 우리의 믿음이 우생학과 이를 이용한 나치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는 것이다. 뒤의 내용들 또한 이와 비슷한 논리적 구조를 가진다. 교육은 국민 개개인에게 자유와 자립심을 길러주는 것이 아니라, 지배체제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교육의 내용을 고른다든가, 민주주의는 민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들이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책에 제시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에 의한 10가지 프레임의 존재론적 목적성에 대한 비판은 매우 흥미롭다. 과학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리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에 이용되었었다. 교육 또한, 모두에게 이로운 세계를 만들기보다 지배계급의 과시적 소비로 쓰였었다. 시간은 우리가 지금이해 하는 것처럼 모두에게 동등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의 효율성을 쥐어짜고 각 개인을 평가하기 위해 지배계급의 이익에 맞게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법 또한 어떠한가? 눈가리개와 천칭으로 묘사되는 정의의 여신의 상징성과는 다르게 미국정부의 인디언 학살에 악용되었고 법조계는 앞장서서 그들을 도왔다. 이러한 역사적 기원에 대한 묘사는 매우 탁월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동의할 수 없다.
(3) 나의 생각
현대 서구 문명을 비판하는 책들의 논조는 대부분 비슷하다. “서구 문명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문명을 야만화 시키고 비서구 인들에게 차별적 대우를 한다.” 혹은 “서구의 문명은 평등과 박애를 실천하는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본주의적 체제에 동화되어 있다. 부자들은 더 많은 것을 얻고 빈민은 기본적인 권리조차 얻지 못한다”이다. 물론 이 책은 2가지 접근법을 다 사용했다. 법 앞에 평등하다고 우리는 이야기하지만, 실제를 보면 법은 있는 자의 편이라는 4장 그리고 국가가 당신을 원한다고 하지만, 비서구인에게는 굳게 닫혀있는 서양의 국가 등의 국경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역사의 발전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2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 “역사의 끝은 정해져 있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 역사의 최종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다. 시간이 가면서 성장해 가는 우리의 역사는 초기에는 미숙하고 덜 합리적이지만 역사의 승리를 외칠 수 있는 역사의 종착역에서는 우리의 역사는 그 무엇보다 완벽할 것이다.”라는 관점.
둘째 “역사는 단절되어 있다. 과거에 축적된 여러 가지 사건이 현재를 구성하고 현재에 축적되어 가고 있는 사건이 미래를 구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단층은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단층이 서로 다른 이야기와 시대정신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는 축적적 발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촉발된 단절 면이 생기는 것처럼 혁명적 발전을 한다”라는 관점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책이 서구 문명에 대해 가하는 비판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역사의 발전 과정을 따라가면, 과거의 역사는 미래를 위한 토대가 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박애의 정신으로 가득 찰 수는 없다. 우리 인간이 처음에 태어나고 자아를 인식하는 시기가 지나면서부터 자신의 물건에 집착하고 남과 자신의 물건을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는 아기의 행동을 보면 문명의 초기도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이 시간이 지나고 교육과 사회적 교류를 통해서 남과 같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처럼, 지금의 역사는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책 맨 앞에 나오는 간디의 사례처럼, 과거 서양문명은 비인간적이고 억압적인 전체주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명이 문명인들은 배출하고 문명인들이 생각이 모이면서 비서구인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책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생학은 더 이상 과학으로 취급받지 않고 있고 비서구인의 예술품에 대한 관심도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이 날로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비단 비서구인 뿐만 아니라 서구인에게도 향하고 있다. 오히려, 비 서구인에게도 서구인들과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 미국의 Green card 시스템도 존재한다. 따라서, 과거에 대한 비난은 미숙한 초창기 문명의 모습일 뿐, 그런 미숙함이 서구 문명을 정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번째 관점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시대에 따른 에피스테메가 존재하고 그러한 에피스테메는 그 시절의 역사를 결정짓는다고 했다. 이런 역사적 관점 또한, 10가지 프레임이라는 책의 비난이 과도했음을 말해준다. 과거의 모습이 단층이 한 부분이라면, 그 단층의 지금의 역사를 결정짓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정신에 의해 창조된 지금의 문명에 대한 평가가 더욱 의미 있는 평가라고 생각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과도한 인구의 증가로 인해 간접민주주의를 택했다. 이 책은 간접민주주의가 민중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권력자가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 책이 간과하고 있는 점은 현대의 민주주의는 3권 분립과 발언의 자유 그리고 독립적 미디어를 통해서 견제의 요소를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민주주의의 문제는 민중들의 인기영합주의 정치인에 대한 투표권 남발이지 시민 투표권 제한이 아니다. 고전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사회가 고전을 선정하는 방법은 옛날과는 사뭇 다르다. 현시대에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서구 문명에 대해 비판하는 책(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비서구 역사에 관한 책(라드크리슈난: 인도 철학사, 펑유란: 중국 철학사), 서구 문명의 동양에 대한 시각을 비판하는 책(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등 과거와는 매우 다른 기준으로 고전을 선정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의 비판은 과도한 면이 있다.
오히려 저자 스스로가 서구 문명이 비서구 문명에 대한 공격과 착취라는 프레임에 갇힌 채, 과거의 기록만을 가지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칼 포퍼는 그의 역사적 저서 “열린사회의 적들”에서 점진적 공약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점진적 공약이란 사회 변화는 점진적으로 조금씩 일어날 때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점진적 공약에 의한 사회 변화만이 우리를 준비된 상황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의 체계를 끌어 나갈 수 있다고 한다. 서구 문명도 마찬가지 아닐까? 서구 문명 또한 점진적 공약에 따라 한두 가지씩 바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칼 포퍼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급진적 공약을 추구해 파멸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급진적인 사회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어떠한 경제체제가 필요하고 시장은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의논은 없었다고 한다. 그들의 초점은 혁명이었고 그에 대한 생각만 있었기 때문에 약속된 그날 그들의 반응은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이 책은 인간을 성선설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선하기 때문에, 문명 초기에도 선함에 근거한 행동을 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문명은 실패라는 것이다. 성선설은, 독일 나치와 사회주의가 바라보는 인간상과 비슷하다. “우리는 선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틀릴 수 없다. 우리가 하는 행동은 모두 옳고 문제는 우리와 다른 너희들에게 있다.” 오히려 성악설 즉, 사회는 악할 수 있기 때문에 제도적 장치를 통해 악함을 최대한으로 억누르고 점진적 개혁을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낫다는 인간관이 사회를 더욱 안정감 있게 할 것이다.
문명에 대한 부정적 입장은 문명 발전에 꼭 필요하다. 하지만, 부정적인 입장보다는 부정적이었던 역사적 사실에 덧붙여 우리 문명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발전해 왔는지 그리고 그런 문명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 우리 문명을 더욱 발전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문명의 성장은 그 자체로서 무죄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프레임을 부수는 ‘비판’이 아니라, 프레임을 새롭게 조직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사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