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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호, 처벌, 구조: 스린바산이 묻는 성정치의 세 갈래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책소개

“섹스할 권리”는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인 아미아 스린바산이 쓴 책이다. 그녀는 성별 이분법적인 페미니즘에 반대하고 교차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그녀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의 목표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의 지향점과 비슷하면서 차이가 있다. 먼저 그녀는 주디스 버틀러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스트의 성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에 반대한다. 이는 페미니즘이란 남과 여의 대립이 아니라 억압의 주체와 그의 피해 세력의 대립 그리고 그 피해 세력의 연대와 그로 인한 사회적 변화를 주장한다. 반면에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과는 전혀 다르게 어려운 철학적 개념이나 접근은 배제한 체, 쉬운 사례와 언어로 대립적인 페미니즘에 대해 반박한 책이다. 특히 책은 우리가 최근에 많이 경험했던 사회적 젠더 이슈에 대해서 다뤘기 때문에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같다. “섹스할 권리”가 독자 친화적이라고 하더라도 책이 다루는 내용은 전혀 가볍거나 쉽게 웃어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통념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사회가 보호하고자 하는 관념을 보호하려는 당찬 페미니스트들의 몸부림이 오히려 그들을 또 다른 가해자로 만드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섹스할 권리”를 전달하는 매개체는 누구나 들고 있을 만큼 가볍지만, 매개체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가벼움과 거리가 멀고 오히려 어떤 페미니스트 책 보다 강하게 우리의 관념을 흔들고 있다.


“섹스할 권리”는

누가 남성을 음해하는가?

포르노를 말한다.

섹스할 권리

욕망의 정치

학생과 잠자리하지 않기

섹스, 투옥 주의, 자본주의 등 6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다. 6가지 챕터를 통해 스린바산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첫째, 명백히 잘못되어 보이는 행위에 명백히 필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의도치 않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둘째, “선호”라는 것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선호”에 기대어 모든 선택을 정당화하는 것은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한다. 셋째, 우리의 행동과 인식은 사회구조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구조적인 억압에서의 탈피가 진정한 진보이다.


2. 주요 논점: (1) 명백히 잘못되어 보이는 행위에 명백히 필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의도치 않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섹스할 권리”는 누가 남성을 음해하는가는 “미투” 운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미투” 운동은 권력형 성범죄에 대항해서 일어난 운동이다. “성범죄 피해자가, 성범죄 가해자를 고발하는 운동이 무슨 문제가 있어?”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성범죄의 특성상 확실한 증거가 없고 성범죄 고발이 시차를 두고 발생하기 때문에 그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미투” 운동은 “무고의 피해자가 양산될 가능성이 크다”와 “증거 중심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한다는 사회적인 비난에 처해있는데 저자는 두 비난 모두 논리적이지 않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가. “무고”의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성범죄에 대한 고소가 “무고”일 가능성은 현저히 낫다. 저자는 통계를 보여주면서 무고의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무고”가 미투를 반대하는 전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고 한다.

나. “증거 중심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은 공평치 않아 보일 수 있지만, 법에서의 평등은 원고 피고 둘 다 동등한 관계성을 맺고 있으면 우선시 되는 원칙이다. 하지만, 성범죄 특히 권력형 성범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동등한 권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원칙이 우선시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스린바산이 “미투” 자체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 따르면, “여자는 옳고, 남자는 틀리다”는 수사가 남용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수사는 흑인의 권리가 짓밟혔던 시절에, 흑인을 처벌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지금 사회는 어떠냐고?? 지금 사회도 비슷하다. 흑인을 타깃 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공권력에 의한 성범죄 무고 비율은 높다. 경찰이 힘없는 사회 계층에 지속해서 성범죄의 올가미를 씌우고 있고 이러한 행동 뒤에는 “여자는 옳고, 남자는 틀리다”라는 수사적 관념이 기반이 된다. 따라서, “미투” 운동은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직장 여성”을 최대 권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가장 보호가 필요한 “저소득층”을 희생시키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흑인 남성은 미국 전체 남성의 14%에 지나지 않지만 1989년~2020년 사이에 허위 고소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의 52%가 흑인 남성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위해 법적 평등보다는 보호적 접근이 우선시돼야 한다는 페미니스트의 접근에 모순되는 접근이 아닌가?

또한, 미투의 파괴적이고 처벌적인 접근법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시한다. 미투의 주요 전략 중 하나가 폭로와 제재이며, 그 사회적 파급은 때로 파괴적 결과로 나타난다. 몇몇은 파멸적인 결과가 미래에 권력형 성범죄의 가능성을 차단한다고 말한다. 그 누가 자신이 파멸될 수 있는 행동을 하겠는가? 하지만, 저자는 파괴와 처벌을 동반하는 억압적 접근은 성적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첫째, 민주주의 사회에서 성적 정의 실현의 필수는 법적 개혁과 인식의 변화다. 법적 개혁과 인식의 변화는 대립적인 접근보다는 상호 보완적 접근이 필요하다. 하지만, 미투의 목적이 남성에 대한 처벌과 파괴라면 이러한 접근은 불가능하다.

둘째, 미투의 결과가 진정한 반성과 성적 평등이라는 씨앗을 남성에게 심을 수 없다. “미투”로 지목된 하비웨인스타인, 빌 코스비, 케빈 스페이시 모두 자신들에게 제기된 의혹에 대해 반박하고 법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모든 의혹이 진실이라고 밝혀진 이후에도 그들은 반성이나 평등한 사회를 위한 노력보다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미투의 파괴성에 대항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들은 처벌은 받지만, 여전히 사회적 인사일 뿐, 아니라 사회로의 복귀를 꾀하고 있다. 이는 남성들에게 권력형 성범죄가 문제라는 인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은 힘이고 처벌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힘을 가진다면 권력형 성범죄는 씻어낼 수 있는 오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2 - (2) “선호”라는 것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선호”에 기대어 모든 선택을 정당화하는 것은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한다.

저자는 “포르노를 말한다.”, “섹스할 권리”, “학생과 잠자리하지 않기”를 통해서 선호에 의한 성적 결정을 비판한다. 인본주의와 자본주의에 길든 우리 세대는 “자기 선호에 기반한 자기 결정권”을 맹신한다. 이런 믿음은 “포르노를 보는 것 혹은 포르노 배우가 되는 것이 나의 선택이라면 국가는 개입할 수 없다.”, “교수와 학생의 잠자리가 강요나 억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가 트랜스젠더와의 잠자리를 거부하는 것은 성적 불평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여성들의 선호를 보여주는 것이다.”와 같은 주장의 기반이 된다. 저자는 선호의 기원과 특정 직업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선호 기반 자기 결정을 비판한다.


첫째, 선호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선호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선호란 선택을 내리는 사람에게 가장 큰 행복을 줄 수 있는 특성을 말한다. 이러한 특성은 개인이 처해있는 상황, 배경과 같은 개인적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돈이 명예에 우선되는 사람은 포르노 배우가 되길 선택할 수 있다. 현재 느끼는 사랑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나이 많은 교수와의 사랑을 선택할 수 있고, 동양인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백인보다 동양인과의 성관계를 우선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지네를 보면 혐오를 느끼고 맛있는 음식을 보면 행복을 느끼도록 진화되어 왔다.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 데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것에 더욱 다가가기 위해 두뇌는 도파민을 분비했고, 도파민을 얻기 위해 우리는 행동한다. 따라서, 행복은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두뇌가 프로그램화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용납되고 우선시 되는 선택을 하도록 두뇌는 도파민을 생산하는 작업을 할 뿐, 우리의 이성과 지성의 결과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선호에 기반한 선택은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자기 파괴적일 수 있다. 푸코가 주장한 것처럼, 억압받는 자들이 억압을 스스로 초대하는 모순적 행동의 기반일 수 있다. 따라서, 선호에 의한 자기 선택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선택의 본질에 대한 의논이 우선시돼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포르노와 페미니스트의 성전환자와 잠자리 거부를 비판한다. 스린바산은 포르노가 가부장적 스크립트재생산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남성은 항상 섹스를 갈구하고 여성의 “노”는 “예스”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섹스를 포르노로 배우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가부장적인 섹스에 대한 접근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페미니스트의 성전환자와 잠자리 거부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의 주장하는 “선호”는 사회에 의해 형성된 “선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보다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둘째, 교수와 학생의 잠자리는 교수의 본질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교수의 본질은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열망은 학습의 열망으로 되돌려 학습에서 최대를 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교수와 학생이 성적 관계를 맺는다면, 교수가 학생의 열망은 학습으로의 열망이 아니라 성적 열망으로 끌어냈기에 교수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치료의 가장 큰 단점으로 환자가 의사에게 품는 성적 열망을 이야기했다. 그는 의사란 환자의 성적 열망을 자기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정신적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의사의 본질에 걸맞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적 관계는 힘 있는 남성이 자기보다 힘없는 여성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성적인 관계를 맺는 위계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이는 교수와 학생의 성적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교수는 학생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사회적 체제와 관습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이념적 탈출구를 제공해야 하지만, 이에 반대되는 행위가 둘의 성적인 관계이기에 본질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수와 학생의 성적 관계는 옳지 않다고 말한다.


2 - (3) 우리의 행동과 인식은 사회구조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구조적인 억압에서의 탈피가 진정한 진보이다.

아미아 스린바산은 “섹스할 권리”를 통해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백히 제공한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대립 그리고 승리로 귀결되는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페미니즘은 억압받는 다른 사회적 계층에 손을 내밀고 사회구조적 문제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 페미니스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으로 사회를 바라보면,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해 희생되는 사회적 계층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개혁에 꼭 필요한 법적 개혁과 사회 인식 전환을 끌어낼 수 없다. 한 계층에 도움이 되는 접근법이 다른 계층에게 피해가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초기 페미니스트의 실패는 백인 중산층에게 맞는 여성해방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초기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독립과 자기 선택을 주장했다. 물론, 이는 직업이 있고 사회적으로 평판을 쌓은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는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직업이 없던 저소득층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은 이러한 페미니스트 운동에 적용될 수 없었고 그들은 페미니스트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가정 폭력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중요한 법적 장치다. 하지만, 가정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환경 즉, 교육과 정부 사회복지의 확대가 같이 진행될 때만이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사회적 인식과 체제의 변화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모든 억압받는 계층의 연대가 중요하기에 연대를 끌어낼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저자는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3) 개인적 견해

내가 가지던 페미니스트에 대한 생각은 “첫째. 선택을 존중하는 페미니스트는 좋다. 둘째, 선택을 존중하는 페미니스트를 제외한 다른 페미니스트는 사회에 부정적이다.” 이렇게 2가지였다. 하지만 “섹스할 권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생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첫째, 선택을 존중하는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선택할 권리를 존중하는 페미니스트적 관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정적으로 보일지라도 선택자가 자신의 이성을 통해서 선택했다면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2가지 면에서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위에 언급한 것처럼 과연 선택이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선택은 뇌의 도파민에 지배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 진화적이다. 어떠한 선택이 결과가 긍정적이면 긍정적일수록 우리는 그런 선택을 더욱 많이 하게 된다. 푸코가 형벌의 교정적 관점을 이야기한 것처럼, 사회적 판단과 선호라는 무형의 형벌에 따라 우리의 선호는 결정될 수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남성은 왜 큰 가슴, 매끈한 피부 혹은 긴 다리등을 선호하는가? 우리의 본능적 선택이라고? 정말일까? 본능은 우리가 더 많은 애를 가질 수 있는 여성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선택을 미디어와 가부장적 사회가 만들어 낸 선호에 기반한 선택 아닐까? 포르노 배우와 매춘부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의 선택을 “돈”이라는 사회적 형벌이 만들어 낸 교정적 개념의 결과가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가부장적 사회체제에 이바지하는 이러한 행동은 또 다른 피해를 만들어 내기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또한 선택의 범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선택의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의 목적은? 선택의 자유는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부여된 권리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삶을 선택할 자유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행동이 비인간적인 삶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마지막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속적인 고민과 구성원끼리의 토론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선택을 존중하는 페미니스트의 2번째 문제로 이어진다.


선택을 존중하는 페미니스트는 선택 과정의 난해함과 복잡성을 파괴하고 공리라는 단순한 기준에 따라 행동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왜 공리에 기반한 선택이 문제일까? 공리에 기반한 선택은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진지한 고민과 토론을 불필요하고 귀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 고민과 토론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사회를 모르는 엘리트” 혹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해 생각의 싹을 뿌리부터 잘라버린다. 공리에 의한 선택이란 사회 지배계급이 자기들의 지배를 쉽게 만들고 당연하게 만드는 데 사용되는 사회적 도구다. 자기의 지배 체제에 순응하는 조직과 행동에는 돈이라는 혜택을 제공하고 그렇지 못한 조직과 행동에는 적은 보상을 제공한다. 이는 사람들이 어린 시절 교육의 목적과 부합시켜 그들의 인생의 목표로 만들어 버린다. 또한, 피지배계급은 우리가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더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해 피지배계급끼리 경쟁하고 싸우게 된다. 남성과 여성의 싸움, 매춘부와 매춘을 없애려는 사람들의 싸움이 예시다. 따라서, 우리는 선호에 의한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지만, 사회체제와 그에 따르는 문제 그리고 정의에 대한 토론과 고민의 지속적인 추구가 필요하다.


둘째, "선택적 페미니스트를 제외한 다른 페미니스트는 사회에 부정적이다”라는 생각은 대부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남성(그리고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이다. 한국에서의 페미니스트는 급진적이고 대립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급진적이고 대립적”이라는 성격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는 그런 성격의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사실이다. 페미니즘의 성격이 부정적 의견에 일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2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급진적이고 대립적인 성격 말고 다른 배경은 없을까? 둘째, 페미니즘이 “급진적이고 대립적”이라는 인식이 과연 정당한가?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상당 부분은 현재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관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권리를 빼앗아 여성에게 다시 주고자 한다”라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손실 회피”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기득권을 빼앗으려 하는 움직임에 본능적으로나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손실 회피”의 기준이 위에 말한 물질적 공리에 기반하기 때문에 페미니즘과 공평한 사회로 인해 얻어질 수 있는 정의적, 사회적 그리고 인식론적 공리는 저 옆으로 밀어놓고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힘을 쓴다. 이들은 “자기들은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들”. “페미니스트는 여성우월주의자”와 같이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하기 위해 언어를 조작하기도 한다. 이들의 주장의 문제점은 자기의 기득권이 자기의 노력으로 얻어진 성취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세상에 대한 진정한 사유를 포기했다는 데에 있다. 남자 혹은 현재 지배계급의 기득권은 사회적인 결과물이기에 처음부터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유하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부여받은 자유로 사유하지 않고 자기의 기득권에 대한 비판의 장벽을 쌓는 데에만 쓰이기에 정당하지 않다.


또한, 페미니즘이 “급진적이고 대립적”이라는 인식은 정당하지 않다. 페미니즘을 “급진적이고 대립적”인 인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부분을 보고 전체를 평가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페미니즘 중 “급진적이고 대립적” 페미니즘이 대표성을 떼는 이유는 그들의 성격이 이슈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이슈를 쫓고 그에 따른 취재 하고 방영하기에 급진적 페미니스트가 대표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또한, 급진성과 대립성이란 각자가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다르고 이는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특징짓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범죄에 대항하여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은 급진적이고 대립적인가? 여성들의 속해있는 사회의 체제가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라면 현재 페미니스트의 행동은 급진적이고 대립적이지 않다. “Black lives matter”의 폭력적이고 약탈적인 비판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매년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흑인의 일원이 느끼는 공포심과 비교하면 우리의 폭력과 약탈은 정당하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의 여러 가지 사회적 인식적 요구 또한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


섹스할 권리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사유의 시작으로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다. 우리의 사유와 인식은 조정되고 속박되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책이다. 남성 여성 페미니스트 반페미니스트 등 모든 사람이 책을 읽고 다시 한번 사유할 기회를 가지고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페미니스트 문제에 접근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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