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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계급·욕망: 『아들과 연인』의 구조적 사랑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줄거리

“아들과 연인”은 모렐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모렐 가족은 중산층 출신 어머니와 광부로 일하는 노동자 계급 출신 아버지의 결혼으로 시작된다. 중산층 출신 어머니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반해 결혼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둘 사이의 갈등은 커진다. 난폭하고 돈만 생기면 술을 마시는 아버지는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 남성을 대표하지만, 중산층 출신 어머니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렐 부부는 윌리엄, 폴, 아서, 그리고 애니 이렇게 네 명의 자식을 둔다. 아버지의 난폭한 성격과 무책임함으로 인해 네 자식 모두 어머니 편에 서게 되고, 아버지는 가족 내에서 겉돌게 된다.


어머니는 남편에게서 느낄 수 없는 만족감을 해결하기 위해 첫째 아들 윌리엄에게 큰 기대를 건다. 윌리엄은 기대대로 곧고 똑똑하게 자라서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윌리엄은 도시에서 좋은 직업을 얻고 결혼할 여자를 만나 집으로 데려오지만,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여자친구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토로한다. 윌리엄은 다시 도시로 돌아가지만, 감염되어 죽고 만다. 첫째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둘째 아들 폴에게 의존한다. 폴은 그다지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어머니에게 헌신하며, 그림에 큰 재능을 보인다. 폴 또한 자신에게 의지하는 어머니에게 의존하며 결혼하지 않고 평생 어머니와 같이 살 것임을 다짐한다. 그는 오히려 늙어버린 어머니를 원망하면서도 어머니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폴은 미리엄과 클라라라는 여성을 만나 깊은 관계를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마음 때문에 두 여성과 모두 헤어진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몸에 종양이 발견되고, 긴 투병 끝에 돌아가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폴은 미리엄과 다시 미래를 약속하려 하지만, 여전히 어머니라는 존재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미리엄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폴은 어머니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어머니와의 관계를 긍정하며 소설을 끝맺는다.


제2의 성과 모렐 부인

“아들과 연인”에 나오는 모렐 부인을 보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떠오른다. 모렐 부인은 남편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결혼을 한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이는 남편과 다른 계급에서 오는 세계관 차이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결혼이라는 사회적 관습이 주는 속박 때문이기도 하다. 결혼은 여성에게서 실존을 빼앗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1900년대 당시의 세상에서 결혼이라는 관습이 주는 억압은 상상을 초월했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발을 들이면 그다음부터는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결혼하고 기혼 여성이 되면, 사회가 결혼한 여성에게 요구하는 모든 요구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녀들은 자신보다 가족을 우선해야 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해내야 하는 집안일도 있다. 개인의 욕구와 능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보부아르는 그녀의 책 제2의 성에서 사회 제도가 여성의 실존을 억압하기 때문에 뒤틀린 형태의 실존 추구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은 의식을 가지고, 그 의식은 특정한 대상을 지향한다. 의식은 남과 다른 독립적인 의식을 추구하는데, 이는 사회적 활동과 성공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와 나를 바라보는 상대방의 의식 사이에서 나의 의식이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되려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며 성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는 여성의 실존을 억압한다. 각 여성의 특성이나 존재를 향한 열망은 무시되고, 모두 기혼 여성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를 바란다.


이런 제도적 압박의 힘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대부분 저항을 포기하고 순응한다. 하지만 지향성을 가진 의식은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에서 지향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다. 대부분 기혼 여성의 의식은 자식을 대상으로 삼는다. 모렐 부인도 마찬가지다. 모렐 부인은 처음에는 윌리엄, 그다음에는 폴을 자신의 의식이 지향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 그들의 성공이 모렐 부인의 실존을 증명한다. 그녀는 자식들의 독립적인 성공과 자아 형성을 자신의 의식의 독립성의 기반으로 삼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렐 부인은 윌리엄과 폴에게 집착했고, 혹여나 그들의 애인들이 자신으로부터 자식들을 빼앗아 갈까 봐 그들과 그녀들의 관계를 방해했다.


개인이 자신의 실존을 찾기 위해서는 자유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는 명제는 주어진 본질이 없다는 뜻이다. 즉,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성향, 그리고 자아에 맞는 실존을 찾고 그러한 실존을 통해 본질을 형성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모렐 부인은 결코 자신의 실존을 찾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자식들이 어릴 때는 어머니가 감당할 수 있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쉽게 영향을 미치고 자식들이 자신의 영향에 따라 행동하도록 만들 수 있다. 어린 시절의 그녀와 자식들의 관계는 어머니의 실존을 찾아주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윌리엄과 폴이 성장할수록 그들 또한 독립적인 실존을 찾으려 한다. 어머니가 주는 관심과 요구는 기쁨에서 부담과 속박으로 변한다. 이는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발전하며, 어머니뿐만 아니라 자식들의 실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아들과 연인”에 나오는 윌리엄과 폴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고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둘 다 순탄하지 않은 여성 관계로 나타난다. 윌리엄은 어머니와 다른 여성상과 불행한 관계를 유지한다. 윌리엄의 결혼 상대는 책도 읽지 않고, 과소비할 뿐만 아니라 집안일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이는 어머니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윌리엄의 심리 상태의 결과이다. 폴도 마찬가지다. 폴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미리엄을 지속적으로 밀어낸다. 한 번도 온전히 미리엄을 사랑하지 않았던 이유는 어머니의 반대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어머니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클라라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와의 갈등이 커지는 것도 어머니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비이성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것도 모두 파멸적이다.


자본주의와 모렐

모렐은 광부이자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을 상징한다. 그는 집에서는 폭력적이고, 벌어온 돈은 아낌없이 탕진한다.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식들에게는 윽박지르기 일쑤이며 아내에게는 폭력까지 사용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렐의 모습은 가히 가학적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에게서 멀어지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소설이 진행될수록 모렐의 진짜 마음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보다 강해 보였던 모렐이 아내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 폴과의 서먹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죽음 이후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모렐은 왜 극 초반의 모습처럼 폭력적이고 억압적일까?


모렐은 노동자 계급이다. 노동자 계급은 사회에서 가장 힘들고 고된 일을 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계급을 말한다. 이들은 적은 임금과 대우를 받을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 느끼는 희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고된 노동의 삶은 그 자체로 끔찍하다. 그렇다면 이들의 인간적 존재감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이들에게 위안과 삶의 원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가부장제도를 만들어냈다. 직장에서는 착취당하지만, 집에서는 왕이 될 수 있다. 돈을 가지고 가지 않아도 괜찮다. 왜냐하면 사회적 관습이 가족과 아내를 남편의 지배 아래 두기 때문이다. 모렐은 가족 내에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울부짖는다. 그는 가족 내 권위가 고된 노동을 견딘 대가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소외의 개념이 떠오른다. 분업은 노동자를 소외시킨다. 분업이 되기 전에는 노동자들이 적은 임금을 받더라도 노동을 통해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힘든 노동 끝에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결과물은 다른 노동자와 자신을 구분해 주었고, 이는 노동자들의 실존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효율성 추구를 위해 분업이 진행되면서 노동자들은 소외된다. 그들은 완제품이 아니라, 그 부품만을 생산한다. 끊임없이 노동하다 보면 보람은커녕 피곤과 패배감이 그들을 지배한다. 하지만 그들의 권위는 가정에서 되찾을 수 있으며, 이는 그들이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는 힘이 된다.


모렐도 아내를 사랑하지만, 다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며 파괴적으로 행동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만드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자기 파괴적이다. 왜냐하면, 늙고 병든 노동자는 자본주의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가족과 자본주의 양쪽 모두에게서 버림받는다. 모렐이 늙고 다리를 절게 되면서 그는 가족과 사회 양쪽 모두에서 버림받는다. 그는 직장에서도 별 볼일 없는 일을 하고, 가정 내에서도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다. 물론 모렐은 운 좋게 가족과 관계를 다시 형성할 수 있지만, 다른 노동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토록 자본주의는 비인간적이고 자기 파괴적이다.


폴과 근친상간

폴은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실제로 폴은 미리엄에게서 탈출구를 찾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영혼이 어머니와 함께 있음을 깨닫고, 미리엄을 밀어내려고 애쓴다. 그는 미리엄과 관계를 가지지만, 이때 그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폴은 심리적 갈등과 욕망의 충돌을 가장 예민하게 드러내는 복합적 인물이다. 그는 매우 진취적이며 헌신적이다. 윌리엄과 달리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프랑스어와 기하학을 익혔고 그의 그림은 20 기니에 팔릴 만큼 빼어나다. 싸움을 할 줄 모른다는 그는 클라라 남편과의 싸움에서 그 누구보다 호전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런 특징을 가진 인물이 끝내 성장하지 못하고 어머니와의 관계를 유지하기로 마음먹고 소설을 끝맺는다. 폴은 오이디푸스적 충동을 해소하지 못한 채 성인 애착을 형성하지 못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어릴 때부터 형성된 감정적 관계는 자식과 어머니 사이의 사랑을 정당해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곧 아버지라는 거대한 존재를 인식하고 그에게 굴복하며 어머니를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폴은 어머니를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다. 오히려 어머니와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어머니는 왜 젊지 않은가?”, “나는 왜 첫째 아들이 아닌가?”, “나의 영혼은 어머니와 있다.”**라는 그의 대사는 그의 마음을 대변한다. 결국 폴의 선택은 미리엄도 클라라도 아닌 돌아가신 어머니이다. 이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폴이 백스터를 끝까지 간호하고, 클라라와 다시 맺어지게 하는 장면은 이상해 보일 수 있다. 이유 없이 백스터에게 폭행당한 폴이 백스터를 간호하고 다시 행복하게 만들어줄 이유는 없어 보인다. 내 생각에는 이는 폴이 느끼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 때문으로 보인다. 아버지라는 남편이 존재하지만, 어머니를 독차지하고 싶어 하고 아직도 어머니를 포기하지 못하는 폴은 클라라와 백스터에게도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사죄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투사한 백스터를 간호하고, 어머니를 투사한 클라라와 다시 맺어지게 한 것이다.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것은 인류의 오랜 전통이다. 근친상간 금지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유전병이지만, 인류 공동체의 지속을 위해 근친상간을 금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공동체는 구성원 간의 협력을 중요시하는데, 만약 자식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고 싸우게 된다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근친상간을 금지한 것이다.


“아들과 연인”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근친상간을 허용하자는 것이 아니다. 아들과 연인은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사회적 관습조차도 타파해야 할 인습이라면 타파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폴은 끝내 행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금기에 발을 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의 행복을 파괴하는 사회적 관습을 보호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질문이 로렌스가 던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금기의 경계에서 욕망과 사회규범의 충돌을 노출한다. 금기를 정당화하려는 게 아니라, 금기가 만들어내는 심리적·윤리적 균열을 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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