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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는 인정하되, 차별은 불가: 보부아르와 오늘의 한국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테제를 통해 현대 페미니즘의 방향을 바꾼 책이다. 보부아르는 자신의 방대하고 깊은 철학적, 역사적, 문학적 그리고 신화적 지식을 통해 현대 사회의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파악하고 위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의 뜻은,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특징으로 정의되는 성향 혹은 특징이 여성이 본래 가지고 있는 거부할 수 없는 특징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압력에 의해 만들어진 후천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특징이 후천적이기 때문에 여성을 그 틀 안에 가두려는 사회적 움직임에 저항해야 하며, 그러한 사회적 움직임을 만들어낸 남성들이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남녀의 신체적 차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과 여성이 신체적 차이가 없다는 여러 페미니스트를 비판하고 그러한 접근이 여성 인권 신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신체적 차이가 여성을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이러한 신체적 차이를 이용해 사회가 여성을 억압한다고 주장한다. 차이는 인정하되, 차이가 차별의 근거는 될 수 없고 오히려 이러한 신체적 특징을 가진 여성들을 사회는 공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2의 성이 독특한 점은 그 당시 대립되던 구조주의와 실존주의를 모두 철학적 논리 전개에 이용한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집단무의식에 들어있는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여러 가지 양상을 보인다는 구조주의의 관점을 채택하지만,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구조주의의 문제점을 타파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로부터 이득을 얻고 또 질서 유지에 기여하는 남성들은 자신들의 실존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여성들이 초월성을 되찾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실재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과거의 망령이 아니라 우리가 실존을 위해서 서로 힘을 합쳐 싸워나가야 하는 과거의 유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시몬 드 보부아르가 말하는 여성 차별의 원인은 무엇일까?


(2) 주체를 추구하는 남성과 타자로서의 여성

제2의 성을 관통하는 내용 중 하나가 남성은 실존적으로 초월성을 추구하는 주체적 존재이고 여성은 내재성을 추구하는 타자적 존재라는 것이다. 초월성이란, 인간의 의식은 항상 무언가를 지향하는데 그 지향성의 이면에는 지금 나의 상태보다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려는 초월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내재성이란 무언가를 향해 지향성을 가진 인간의 의식이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얼핏 생각해 보면 남성과 여성 모두 초월성을 가진 주체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더 나아지려는 특정한 성향과 상태는 타자의 존재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의 초월성은 독립적으로 행해지는 것보다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초월성이란 더 나아지려는 성향일 뿐, 어떠한 상태가 이전보다 더 나아지는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이는 초월성이 지향하는 다음 단계는 인간의 본능이나 사회적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말한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마음의 존재가 지향하는 기준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의식의 결정체일 수 있는데, 이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서의 다음 단계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모든 초월성이 1대 1 관계를 맺지는 않겠지만, 초월적 주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내재적 타자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초월적 존재가 인간의 실존이 지향하는 바라면, 사회적 강자가 초월적 존재가 되고 약자가 내재적 존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공장주와 공장 직원의 관계에서 공장주가 초월성을 띤다는 바는 돈을 많이 벌고 공장이 번창하고 새로운 산업으로 확장됨을 말한다. 공장 직원의 초월성이란, 현재 그가 매여 있는 반복적 직장에서 벗어나 자유로우면서도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현실에서는 두 초월이 충돌하기 쉽다. 특히 권력·자원의 비대칭이 클수록 그렇다. 공장주가 자기의 초월성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공장 직원의 지속적 노동이 필수적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공장주는 공장 직원을 고용하고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때문에 공장주의 초월성을 위해 공장 직원은 내재성, 즉 공장에 남아 공장주를 위해 노동을 제공하는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적 역학관계에서 남성은 초월적이고 여성은 내재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시몬 드 보부아르는 공산주의 유물론 비판을 통해 이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보부아르는 사회적·경제적 조건만이 여성을 얽매는 장애물이라면, 여성 해방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보부아르는 신체적 특징으로 인해 예전부터 시작된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신체적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성의 생리적 특징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여성은 임신이라는 생리적 현상에 동반되는 신체적 특징으로 인해 자연과 동화되는 특징을 지녔다. 여성은 임신을 하기 때문에 무작정 밖으로 나가서 사냥할 수 없었고, 임신을 위한 호르몬의 변화와 생리라는 현상은 그들을 남성보다 약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 내부에서 비교적 쉽고 예상 가능한 일들 즉 농사, 집안일 혹은 토기 제작과 같은 것에 종사하게 되었다. 반면에 남성은 육체적으로 강할 뿐만 아니라, 임신으로부터 자유롭고 생리에 동반되는 육체적 취약점도 지니지 않기 때문에 사냥이나 전쟁과 같은 예상하기 어렵고 육체적인 힘을 요구하는 행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남성은 예상할 수 없는 일들에 종사하면서, 스스로 만들어내고 발명하고 초월하는 초월적 존재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이러한 일들이 더욱 칭송받으면서 사회 내부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여성의 일들도 자기 능력과 현실의 거리감에서 오는 실존적 자각이 존재했겠지만, 자연에 나가 아무것도 모르는 두려움에 휩싸인 남성들이 느끼는 능력과 현실의 거리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을 것이다. 오히려 남성들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에서 오는 자각과 그로 인해 발생한 행동력을 통해 초월적으로 거리감을 줄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3) 사유재산과 가부장제

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사유재산이 시작되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남성들은 실존에서 남들보다 나아지려는 본능 때문에, 전쟁이나 사냥에 나가서 전리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잉여 농산물이 부재할 때, 남성 노예는 식량을 축내는 짐에 불과했기에 남성들을 노예로 삼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 노예는 남성이 가진 본능적 성욕을 해소할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기에 노예로 잡아오기 시작했고 이는 남성과 사회가 여성을 재산의 일부로 보는 시선을 만들어 냈다. 인간은 항상 자신이 가진 유한성에 두려움을 느껴 무한한 존재로 남고 싶어 한다. 유한적 인간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는 예술 작품을 남기는 것처럼 의미 있는 행동으로 기억될 수 있지만, 이러한 능력은 모든 인간이 소유하지 못했다. 인간은 잉여 농산물의 증가와 그에 따른 사유재산의 탄생에서 해답을 찾았다. 자신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생전에 벌어들인 사유재산은 후대까지 남기 때문에 나의 무한성을 물질적 사유재산에서 찾기 시작했다. 물론, 사유재산의 소유는 사회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남성의 특권이었고 이는 가부장제의 탄생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기 시작한다.


내 재산이 나의 실존에 무한한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나의 자손이 나의 재산을 소유하고 그를 통해 초월적 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에서 나와 있는 것처럼 남성은 자기 자식이 자기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남성은 성행위를 통해서 자기 정자를 분출하고 여성이 자기 정자에 잉태된 난자를 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부장제가 시작된다. 여성을 재산으로 여기는 풍습에 더해서, 여성이 타인의 정자를 잉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성의 성행위를 규제하고 그녀들의 행동을 억압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부장제는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을 막기 때문에 여성들은 더욱더 내재적인 성향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육체적·사회적 조건에 의해 시작된 내재성은 교육과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여성으로 정의되는 여성성은 만들어진다는 것이 보부아르의 주장이다.


여성에 대한 과거의 인식이 교육, 정치, 문화에 널리 퍼지게 되고 이는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그녀들의 역할에 만족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여성은 임신이 요구되고 교육에서도 소극적인 존재로 취급될 뿐만 아니라, 여성 서사가 종종 주변화되거나 ‘과격’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막을 뿐만 아니라 본래 여성이 가지고 있던 능력의 발현을 막아서 그녀들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4) 집단 무의식과 여성

여기서 우리는 “과거의 관습이나 생각들이 현재의 행동에 과도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성을 가진 개인은 이성의 힘으로 과거의 관습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 사회는 이러한 역사적 발전의 살아있는 예시가 아닌가?”와 같은 의문을 품게 된다. 이성 중심적 사고관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들은 과거의 망령의 존재를 부인한다. 이는 자본주의 시대정신일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매우 매력적인 세계관이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일하고 경제에 기여하고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할 때만 유지될 수 있는 경제 체제이다. 또한, 개인은 이러한 체제에서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기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이성 중심적 세계관이 구조가 우리를 결정한다는 구조주의적 세계관보다 매력적이다. 이에 사람들은 구조주의적 세계관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지만, 구조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시는 매우 많다.


첫째, 프로이트는 그의 책 토템과 타부에서 모든 종교의식의 근간에는 토템과 아비 살해의 죄의식이 스며들어 있다고 말한다. 종교는 그냥 태어난 문화가 아니라, 태초에 행했던 의식과 사회적 이유로 인해 일어난 아비 살해(아버지가 가족 내의 모든 여자를 차지했기 때문에 이에 격분한 자식들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주장. 프로이트는 여기에서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문화가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의식 등이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스포츠팀에 사용되는 엠블럼이나 히틀러의 나치가 효과적으로 사용한 과거 의식, 문양, 축제의 변형 등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 또한 이러한 예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과거의 무의식이 현재의 상황에 영향을 미친다면, 과거에 남성과 여성의 실존적 관계는 현실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보충된 부분)


둘째,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성에 따라 지식을 생산하고 이해하는 것 같지만, 각 시기에는 각 시대를 대표하는 에피스테메가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지식을 발견하는 과정은 그 시대가 정해놓은 구조에 따라 형성된다. 즉, 인간에 대한 믿음이 만연했던 시기에는 인간 중심적 지식이 중요해지고 신에 대한 믿음이 만연한 시기에는 신 중심적 사고관이 형성된다. 이는 지식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적용되는데 그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작품에서 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 또한 구조주의를 옹호한다. 지식인의 지식이 시대정신에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성 인식 또한 그러하다. (보충된 부분)


이러한 사실을 총체적으로 주장하는 융의 “집단 무의식”은 사람들의 무의식에는 과거부터 축적된 인류의 문화적 발자취가 자리 잡고 있고 이는 우리의 의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융의 주장을 빌리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주장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과거의 관습을 교육과 진보라는 인간만의 무기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교육과 진보의 속도는 관습이 자리 잡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속도에 미치지 못한다. 학교에서 평등을 주장하더라도 성 불평등 혹은 인종적 불평등이라는 관습이 지배적인 행동 양식의 근거로 작용할 것이고 이러한 근거는 행동과 의식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의식에 남아있는 부정적 관습은 교육으로 인해 창피당하고 부정되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관습의 흉터는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이러한 무의식은 지속적으로 쌓이게 되고 이는 지금 우리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집단 무의식은 태초부터 형성된 남성 중심적 사상과 사회적 구조를 가지고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성들은 내재성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게 되며 남성들은 여성들의 내재적 성향을 비판하고 비웃는다. 이러한 성향은 여성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평등을 추구해야 하는 사회지배층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쳐 여성들은 제한된 기회만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불평등은 지속되는 것이다.


(5) 여성의 성격적 결함

현대 사회는 여성들이 성격적 결함이 있다고 심심치 않게 주장한다. 비록 지금은 미디어에서 공식적으로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각종 예능이나 드라마는 이러한 묘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하고 이 사실을 각인시킨다. 이를 부정하는 페미니스트들과는 다르게 보부아르는 이마저도 수락한다. 여성들이 성격적·정신적 결함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편집증적 문제는 여성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 즉 남성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적 결함을 여성들이 가지게 된 원인은 그녀들의 실존의 본질적 욕구, 즉 초월적 욕구를 억누르고 내재성만을 부여하기 때문에 욕구와 현실의 괴리에서 발생했다고 말한다. 외모에 집착하거나 집안일 혹은 작은 일에 집착하는 여성의 성격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 진출의 기회를 박탈당해 초월적 욕구를 해결하지 못하면 집안일이나 집에 집착하게 되고, 타자로서의 존재가 지속되게 되면 외모에 집착하여 다른 주체에 사랑받으려는 나르시시즘이 발달하게 된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여성의 성격적 결함은 존재하지만, 성격적 결함이란 남성들이 정해놓은 체제로 인해 비롯된 문제이기에 여성들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문제를 만들어낸 사회와 그 지배계층인 남성들이 책임을 가지고 여성들을 타자로 취급하는 성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타자가 아니라 초월적인 성향을 가지는 주체로 발돋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지금 현재 사회에서 실현하는 교육 기회의 확충과 경제적·사회적 기회의 보장은 부분적 해결책밖에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타자로 취급되면서 부여된 여러 가지 정신적·실존적 한계 내에서의 도약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도덕적·실존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방치하게 된다. 나의 실존적 성취를 위해 타인의 실존을 가로막는 것은 도덕적 문제요, 실존과 실존끼리 관계를 맺고 그 관계성에서 초월성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나의 실존적 문제다. 융에 따르면 인류는 아니마(남성이 가진 여성성)와 아니무스(여성이 가진 남성성)라는 집단 무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자아는 자기 안에 있는 다른 성향을 자기와 잘 조화했을 때,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사회는 남성에게 아니마를 과도하게 억누르게 만들고 이는 자기 발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한 과도한 혐오로 발전하게 한다. 따라서, 남성은 도덕적·실존적·사회적 그리고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도 여성을 타자가 아니라 주체로 대하고 그에 따르는 몇몇 물질적 손해는 감수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한다.


(6) 나의 생각

성평등이라는 주제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 중 하나다. 윤석열 대통령은 서윗 40대에 반대해 남성 권리를 부르짖으면서 남성들의 표를 대거 확보했고 이는 대통령이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강남역 살인 사건, 여성의 경찰 취업 등 다양한 사건·사고 그리고 사회적 해결책이 공존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효과적인 해결책을 도모하지 못하고 있다.


제2의 성을 읽고서 내가 느낀 점은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에 대한 이해의 부재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여성들은 차별의 원인을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적 시선이라고 생각해서 동일성을 기반으로 그들의 주장을 펼친다. “우리도 경찰이 될 수 있다. 우리도 남자들만큼 강인하다” 등의 이러한 외침은 사실에 반할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실존적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와는 매우 다르다. 이러한 주장은 개인에게 물질적인 보상은 줄 수 있지만, 타자로 취급되면서 소외되는 여성의 실존성 확립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남성들 또한 마찬가지다. “현재 여성들은 예전과 다르게 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다.” 혹은 “여성들의 처우는 남성들보다 더 낫다”라는 논리의 기반 아래 그들의 주장을 펼친다. 교육의 평등이 실현되고 있고 가부장제는 과거의 유산이며 여성에 대한 범죄나 시선은 여성 때문이 아니라 그냥 범죄자의 문제로 치부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제2의 성은 보여주고 있다.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은 여성의 실존의 초월성을 가로막고 있기에 본질적 불평등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참여의 상승은 여성들이 가진 가능성을 저해한다.


또 다른 문제의 원인도 있다. 많은 이들이 성평등의 가치에는 동의하지만, 기회/결과의 평등을 두고 견해가 갈린다. 여성들은 기회의 평등은 충분하지 않고 쿼터와 같은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 결과의 평등을 원한다. 반면에 남성들은 결과의 평등은 평등이 아니라 편애라고 규정하고 기회의 평등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 사회와 사유의 자본주의화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은 본인의 실존이 원하고 만족하는 다음 단계로 향해야 하는데, 위에 설명한 것처럼 다음 단계에 대한 기준은 경제 체제와 교육 체제가 결정한다. 경제 체제는 자본주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개인에게 물질적인 성취가 최고의 성취라고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세뇌한다. 돈을 많이 버는 것,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 그리고 남보다 안락한 거주지에 사는 것이 나의 실존성이라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세계관에 우리를 종속시켰다. 문제는 사회가 장려하는 자본주의적 세계관에서 바람직한 상태는 제한적이라는 것이 문제다. 누군가가 얻으면 누군가는 잃어야 한다. 남자가 얻으면 여자는 소외된다. 여자가 얻으면 남자는 피해를 본다. 이러한 잘못된 관념이 남녀평등에 이르는 것을 방해한다. 이는 여자들의 연대에도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흑인은 흑인끼리 연대하고 프롤레타리아는 프롤레타리아끼리 연대한다. 그러나 여성은 여성끼리 연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타자적 존재성에 익숙한 여성이 자기의 남편 혹은 남성 가족에서 주체성을 찾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행복을 제공하는 연관된 남성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주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와 동맹을 맺고 물질적인 안락함을 제공하는 남성과의 연대가 생판 모르고 나의 특권을 버리라고 종용하는 여성과의 연대보다 훨씬 매력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물질에서 벗어나면 여성끼리의 연대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입장에서의 실존적 여행이 가능해질 것이다. 평등을 뺏고 빼앗기는 제로섬 게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이제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동반자가 될 수 있다.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다.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문제의 원인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제2의 성은 우리에게 이를 알려준다. 성 평등은 이룩하지 못하는 이데아적 세상이 아니다. 성 평등의 부재는 우리를 갉아먹는 현재 사회체제에 순응하면서 그 안에서 제한된 초월성을 추구하는 우리의 무지가 원인이다. 이는 사회 발전뿐만 아니라 자아와 자기 발전에도 부정적이다. 이제는 평등을 싸움을 통한 전리품의 획득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고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조화로운 성취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평등은 몫의 재분배가 아니라, 초월의 기회를 공유하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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