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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선함?: 히친스를 읽고 다시 묻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 by 크리스토퍼 히친스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종교는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이러한 질문은 종교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잃고 인간이 이성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진 이후에 계속되어 온 질문이다. 칸트가 그의 저서에서 말한 것처럼, 신의 존재 여부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밝혀낼 수 없는 사실인 것만은 확실하다. 만약, 신의 인간의 이성으로 분석하고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존재는 신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세에서 활동하는 종교와 종교인의 활동은 우리의 이성으로 평가가 가능하다. 따라서, 두 번째 질문 “종교는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가능하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또한 이러한 접근법과 맥락을 같이한다.

첫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종교적 집단이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에 관해서 많은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둘째, 신의 존재론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지만, 신의 의미론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을 하고 있다.


집단화된 종교에 대한 히친스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는 후진국(팩트풀니스에 따르면 1, 2, 3단계 국가들) 에서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백신이나 의학적 치료를 받지 못하게 한다. 백신이나 의학적 치료를 받는 것이 종교적 믿음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악마의 접근이라는

종교적인 정당성을 앞세우기 때문에 종교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쉽게 조종당한다. 그뿐만 아니라, 에이즈의 치료법은 처녀와의 성관계라는 남성중심적인 믿음을 퍼뜨려,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한다


둘째, 많은 나라에서 (히친스는 알파벳 B로 시작하는 나라만 해도 6개가 넘는 국가에서<바그다드, 벨라루스등> 종교라는 이름을 이용한 집단적살인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고 썼다 - 정말 많은 나라에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희화한 표현) 종교의 이름으로 살인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스리랑카, 인도, 바벨스트, 파키스탄 등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셋째, 종교는 아동학대를 일으킨다. 아동들의 선택권을 박탈하고 특정한 종교적 삶을 강요하는 것을 학대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아동들의 죄의식을 강조하고 항상 신이 자신들을 내려다본다는 두려움과 강요에 의한 삶의 방식 또한 현재 우리 사회가 경계하고 있는 심리적 아동학대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아프리카 등, 아직 발전하지 못한 나라에서의 아동학대는 더욱 심각하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 성적 순결을 위해 생식기에 상처를 내는 할례라는 종교적 의식으로 고통받고 있다.


넷째, 그뿐만 아니라 서구사회나 한국처럼 물질적 정신적 발달을 이룬 국가에서조차 종교적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종교적 영향력을 이용해, 낙태와 동성애자들을 반대하고 있고 이는 개인의 자유와 건강 그리고 사회적 번영에 큰 타격을 미치고 있다.


히친스는 역사적인 기록, 구약과 신약의 논리적 문제 그리고 지적설계론의 한계 등을 들어 신의 존재론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첫째, 어떠한 역사 서적에서도 모세의 이집트 탈출과 사막횡단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지 않다. 모세가 대 집단을 이끌고 람세스의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에 큰 사건이었을 텐데 이 부분에 대한 기술이 없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이 만들어진 내용일 것이라고 말한다.


둘째, 구약과 신약에 나와 있는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떠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신약은 오히려 구약에 나온 내용들을 정당화 시키기 위한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신약이 구약을 읽은 사람이 의도적으로 쓴 것이라고 말한다.


셋째, 지적설계론 즉 인간이라는 이런 복잡하고 정교한 존재가 아무 의미 없이 우연으로 만들어졌을 리 없다는 지적설계론에 대해서, 진화론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의 완벽성이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지적설계론에 대한 완벽한 증거라면, 우주가 불안정한 이유, 인간이 지금도 진화하는 이유 그리고 우리의 눈은 상하가 거꾸로 되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사물을 보는 이유 마지막으로 인간 보다 월등한 능력을 갖춘 동물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뉴턴의 물리학 법칙이 신의 존재를 설명한다는 종교인들의 주장, 즉 unmoved mover에 대한 반론이자 관찰하는 순간 원자는 운동한다는 양자역학과 궤를 같이한다.


마지막으로 히친스의 신의 의미론적 비판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신은 전지전능하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갈 정도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존재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하지만, 히친스는 이런 신의 의미론이 모순투성이라고 주장한다.


첫째,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세상에는 정말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불합리한 일들이 자연적으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신의 이름을 빌린 종교인들의 손에 의해서도 발생한다. 또한 악인이 선한 인간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현세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신이 전지전능 하다면, 왜 신은 우리 세상에 일어나는 이러한 모순을 바라보고만 있을까??


둘째, 신의 존재 증거라는 모든 일반적이지 않은 기적들은 과학의 발달과 함께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비록 일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매우 드물고 모든 사람이 같은 기적을 동시에 경험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예전의 기적은 일식이나 월식 같은 자연적 현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우리가 똑똑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인가? 신은 반과학적인가? 그렇다면 신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정의에 어긋난다.


셋째, 종교는 항상 우리가 원죄를 짓고 있기에 스스로를 비판하고 자책해야 하며 신의 구원을 위해 우리를 낮추고 따르고 억압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한, 종교는 “이웃을 나보다 사랑하라”, “부의 축척은 악이다.” 처럼,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믿음을 강요하면서, 자기에 대한 증오와 부끄러움의 씨앗을 뿌려댄다. 이는 사랑의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가? 이는 사랑보다는 종속적인 관계가 아닌가?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말한 것처럼,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이 발전하고 독립적인 개별적 개체 즉, 스스로 빛 날 수 있는 개체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종교에서는 이러한 독립적인 사랑을 부정하고 신에 종속하는 종교인을 원하는데 이는 분명 사랑이 정의에 어긋난다.


히친스는 종교적인 인간 보다는 도덕적인 인간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틴 루터킹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종교적인 인간이 아니라 도덕적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인도 독립의 진정한 위인은 종교적 인도를 원한 간디가 아니라 세속적인 정부를 원한 네루이다. 종교적 인간은 종교의 속성 때문에 도덕적 인간보다 덜 바람직하다. 종교에서 절대자의 말과 그의 뜻이 최고 선이자 유일한 진실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와 자유로운 의견의 교환과 발전을 억압한다. 또한, 종교는 자신들의 종교적 목적 달성을 위해 개인의 권리와 사회의 법질서를 억압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유일신의 신자가 타 종교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의 유일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히친스는 종교와 전체주의가 본질적으로 비슷한 특징을 공유한다고 믿는다. 종교와 전체주의 모두 믿음은 맹목적이어야 하고,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없으며 우리의 사생활과 공적인 생활은 우리보다 높은 존재에 감시되어야 하고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공포와 무기력감을 생산한다. 종교와 전체주의가 이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주의는 종교와 동맹을 맺거나 (독일 교회는 나치를 지지, 바티칸은 이탈리아 무솔리니 지지) 종교를 몰아내고 종교와 똑같은 방법으로 대중을 지배한다. (중국, 소련, 북한)


히친스가 종교를 비난하는 방법은 많은 사례를 들어 효과적으로 보이지만 그 자체로의 한계를 지닌다. 히친스는 세계의 성장과 함께 종교도 성장하고 변화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거 같다. 한나라의 사건이 종교를 정의할 수 없다. 종교는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스펙트럼 위에 존재한다. 히친스가 비난하는 것처럼, 잔인하고 혹독한 종교도 존재하지만, 남들에게 봉사하고 자신의 목숨보다 남의 목숨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특히 히친스가 말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후진국(1, 2, 3단계의 국가들)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선진국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한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예시가 보여주는 것은 “종교의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행사하는 개인이라는 것 아닌가?”


또한, 히친스의 대부분 문제는 조직화한 종교의 문제이지, 종교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조이스의 다양한 종교적 체험의 리뷰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조직화한 종교는 권력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종교적 체험을 하고 그 이후 종교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 빛을 밝혀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우리나라의 종교 지도자와 종교인들의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같은 종류의 비판을 이런 종교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히친스가 요구하는 인간상은 도덕적인 인간이다. 어떠한 가이드라인 없이 스스로 이성의 힘을 사용해서 도덕적인 행동을 하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간. 하지만, 나는 히친스의 생각에 매우 부정적이다. 지식인들이 흔히 하는 실수는 모든 인간은 스스로 이성의 힘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미디어의 자동인형이 되기도 하고, 히친스 같은 지식인이 쓴 글을 맹목적으로 맹신하기도 한다. 또한, 죽음의 공포에 마주했을 때 소크라테스처럼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히친스의 주장처럼 종교가 없는 세상이 더욱 아름답고 풍요로울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개인의 종교적 체험을 찾을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고 억압적일 수 있는 집단화된 종교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도덕적 인간에게 신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정답처럼 여겨지고 이들의 만든 시스템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도덕적으로 살면 손해 보면서 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다 컨닝하는데 나만 안 한다면?? 나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오염수를 다 바다에 버리는데, 우리만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 회사는 경쟁에서 뒤지게 된다. 물론 법으로 강력하게 규제하는 것이 제일 좋은 답이지만, 그렇지 못한 분야에서는 개인의 도덕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도덕적 인간에게 신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현세는 아니더라도 나의 도덕적 행동에 대해 신이 보상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도덕적 인간은 현실의 장애물에 쉽게 무너져 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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