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사회와 그 적들 by 칼 포퍼
한때 민주주의는 인류역사에서 최종 목적지로 여겨졌다. 냉전 시대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구 민주주의가 소련연합과의 전쟁에서 개개인의 자유에 대한 존경을 앞세워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정치적 승리를 거둔 후로 이 시대는 꾸준히 유지될 것이라고 믿어져 왔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에서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의 승리를 주장했고 이러한 시대는 영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서구 민주주의가 강력한 경제위기라는 한방을 얻어맞고 권투선수가 뇌가 흔들리는 것과 같이 내부에서부터 시작된 갈등과 위기가 “역사의 종언”으로부터 전체주의 공산주의의 악령을 불러내고 있다.
최근에는 약간 흔들리고 있지만,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앞세운 중국의 약진은 미국을 위협하고 있고 주변 국가에 민주주의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금방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가 점쳐질 정도로 미래를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오일파워를 앞세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메레이트 같은 중동 국가들도 민주주의와는 다른 방향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1)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열린 사회의 적, 즉 칼 포퍼가 비난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1)은 플라톤의 사상에 대한 공격과 비난을 통해서 “닫힌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책이다. 그는 플라톤의 사상과 정치체제는 현대 시대의 전체주의와 유사하다고 진단한다. 오히려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열린 사회” 즉 민주주의의 이상향을 보여주고 있고 이러한 “열린 사회”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사상은 어떠한 점에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플라톤에 대한 서양 철학자들의 평가는 극과 극을 가진다. 화이트 헤드는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는 극찬을 남겼다. 반면에, 니체는 “플라톤의 만든 최초의 도덕관념은 유럽 최대의 재난이 되었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플라톤은 “이데아론, 철인정치”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간단히 이야기해서,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진실의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이데아의 변형일 뿐이다. 인간이 보는 모든 것은 인간의 감각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가짜이고 우리의 감각에 세계 넘어 있는 이데아 만이 진리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칼 포퍼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진실이기 때문에 모든 변화는 악이라고 주장한다. 최초의 형태인 이데아가 가장 바람직하고 한 번의 변화를 겪으면 겪을수록 진실성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변화보다는 현재의 유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는 변화 추구하고 다양한 생각의 반영을 촉구하는 “열린 사회”를 반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철인 정치”에서 사람들은 타고나면서부터 정해진 계급에 따라 살아야 하고 통치자는 변화를 통제해야 한다. 통치차 간의 싸움, 계급 간의 싸움은 파멸의 전조이다. 따라서, 시민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번영과 공동의 선을 위해 국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 포퍼는 플라톤의 이러한 주장이 역사주의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역사주의란 역사의 진행 과정이 특정한 패턴이나 법칙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보는 접근 방식이다. 따라서, 역사를 알고 패턴과 법칙을 파악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국가를 통치하는데 정해진 법칙과 논리가 존재하기에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기보다는 역사의 법칙을 알 수 있는 철인 즉 철학자 또는 최고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플라톤의 믿음을 전체주의의 경향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
첫째, 전체주의는 개개인의 자유나 성향보다는 국가의 발전과 통일성을 중요시 여긴다. 개인의 자유, 권리는 더 중요한 공공선을 위해서 억압될 수 있다.
둘째, 전체주의의 지도자는 (히틀러, 시진핑)같이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지지와 힘이 필요하다.
셋째,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에 비해 뛰어나고 다른 민족을 지배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게르만 족은 세계를 지배해야 하고 중화사상에 따라 중국인은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
넷째, 국가의 교육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공교육은 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를 따르고 명령에 복종하는 개인을 길러내고 역사를 파악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미래의 지도자를 길러내야 한다.
칼 포퍼는 소크라테스를 “열린 사회”의 주창자로 소개했다. “너 자신을 알라”로 유명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스승으로 자신이 믿었던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의해 처형당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는 끊임없는 의심과 무지에 대한
인정이 지혜로운 사람을 만든다고 주장했다. 이는 역사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정해진 진리는 없다. 정해진 진리라고 믿는 것에 허점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무지를 인정하고 더 나은 진리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이 완벽하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무지하다.
칼 포퍼는 과학 이론이 되기 위해서는 “반증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증 가능성” 즉,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과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열린 사회” 즉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진리가 존재하고 그 진리를 추구하는 세상은 “닫힌사회” 즉 발전 가능성이 없는 사회다. 세상을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진실 혹은 가장 효율적인 정책이나 통치 방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는 개인의 자유, 비판적 사고, 전통적 권위에 대한 의심을 통해서 끊임없이 반대되는 의견을 수용할 때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무지에 대한 인정이 “열린 사회”의 기본 생각이다.
칼 포퍼는 좋은 정치란 “어떠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통치자가 돼야 하는가”가 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통치 체제가 최악의 실수를 예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것을 다 아는 통치자는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통치자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통치자의 후계자를 양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칼 포퍼는 반증의 중요성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통치자를 생산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교육체계는 그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는 교육체계라고 한다. 따라서, 닫힌사회는 발전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있는 시기에 쓰인 책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지금 시대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먼저, 글의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중국, 러시아, 중동의 오일 파워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유행에 빠져있던 아프리카에서도 어느 때보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다. 영국 일간지 “The economist”에 따르면 아프리카 대륙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기는 식어간다고 한다. 오히려, 민족주의 전체주의를 위시한 반 민주주의적 정부가 빠르게 시민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시민들은 무능력하고 부패한 민주주의 정부에 싫증을 느끼고, 자기의 욕구와 사회 안정을 가져다줄 수 있는 반 민주주의적 정부에게로 회기하고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 거주민들의 ‘닫힌사회’로의 회기에 대해 칼 포퍼는 2가지 문제점을 제시했다.
첫째, 이러한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시민들의 위기라는 것이다. 반증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체제 자체의 문제가 아니고 민주주의 하의 정치인과 자유에 대한 열망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자그마한 이득에 눈이 먼 시민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둘째, 자유를 포기한 시민들의 미래는 번영이 아니라 경제적 후퇴와 도덕성 파멸로 귀결된다고 한다. 따라서, 아프리카 거주민의 해결책은 해결책이 아니라 더욱더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 가게 된다고 말한다.
러시아와 중국은 어떠한가?? 그들 또한 ‘닫힌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파멸할 운명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뒷짐 지고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이 더욱 현명한 것인가?? 답은 그렇지 않다. 러시아와 중국이 파멸로 갈지 안 갈지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파멸로 가기 전에 지구에 돌이킬 수 없는 파괴의 씨앗을 심을 것은 확실하다. 러시아와 중국은 그냥 없어지기에는 이미 너무 큰 힘을 가졌고, 이들은 파멸 전의 모든 권력자와 같이 자기의 힘을 써서 동귀어진 할 것이다. 그전에 그들의 힘을 약화하고, 그 나라의 사람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러시아와 전쟁을 하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원조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고, 대만과 동중국해를 보호하는 것 또한 노력의 일환이다.
“열린 사회”는 “닫힌사회”와는 다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운명과 힘을 가진 사회이다. “열린 사회”는 자기의 선택한 사회 체계의 역할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닫힌사회”를 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사회의 열림 정도에 대한 확인도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열림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칼 포퍼와 소크라테스가 원하는 정도로 확 짠 열린 대문인가?? 아니면 그들이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닫혀 있는 쪽문인가??
미국과 한국 같은 대표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문은 서서히 닫혀가고 있는 거 같다. 이러한 현실이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오는 원인이다. 먼저,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어느 때 보다도 정치는 양극단을 달리고 있다. 건설적인 비판과 의견의 교환보다는 원색적인 비난만이 존재한다. 총선을 앞둔 대한민국과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을 보면 정책에 대한 논의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인식 공격이 선거 운동의 주를 이루고 있다. 상대방의 의견의 논리적인 인과관계는 무시하고 우리 편에게 유리한 증거와 논리만 채택하는 에코체임버 현상이 우리의 현실을 말해준다. 누군가는 이러한 문제가 인터넷의 문제라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만 만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닫힌사회”의 전형인 현재의 인터넷이 끼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하지만, 능력주의 즉 “meritocracy”와 우리의 교육체계 또한 비난의 화살을 피해 갈 수 없다.
능력주의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과 관계없이 사회의 계층상승을 가능케 해 주어 “열린 사회”의 필수조건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능력주의 체제하에서의 승자들은 사상과 정치에서도 승자와 같이 행동한다. 그들은 교육체제에서의 승자다. 사회의 한정된 제화를 나누기 위해 사회가 마련한 평가 수단인 교육에서 경쟁에서 승리했고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얻어냈지만, 이들은 사상과 정치에서도 같은 열매를 얻으려고 한다. 자신들은 승리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이 틀릴 수 없다는 전제하에 자기들의 생각에 공고한 성을 쌓고 모든 공격을 철저하게 방어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기들에게 떨어지는 경제적 이득은 덤으로 챙겨나간다. 우리의 교육체계 또한 공범이다. 그들은 “열린 사회”에서 필수적인 토론과 인문학 교육은 등한시하고 STEM과 같은 목표 지향적인 교육에 집중한다. 또한, 철저한 성적과 성취의 차등화를 통해 승자와 패자의 경계를 그어놓고, 패배자의 땅에서 승자의 언덕으로 어서 넘어오라고 끊임없이 유혹한다.
반면에 능력주의의 패자들은 승자들을 이기주의자 혹은 적으로 인식한다. 능력주의의 승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부와 명예를 가져가고 패자들을 무시한다. “그들이 승자의 사다리를 오르지 못한 것은 노력하지 않아서”라고 비난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패배자들이 보는 것은 정당한 능력주의가 아니라 비틀어진 사다리에 올라탄 염치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입만 열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패자들을 비난하고 페미니즘, 글로벌리즘과 같은 이상적인 이야기만 하면서 패자들의 기득권을 빼앗아 간다.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들을 이유가 과연 있겠는가?? 따라서, 능력주의의 패자와 승자는 서로를 비난하고 건강한 의견을 나누지 않는다. 이는 닫힌사회의 특징이자, 칼 포퍼가 가장 경계하던 세상의 모습이다.
또한, 대부분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허황된 생각이 정치적 담론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법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일으켜 해롭기 가지 하다. 인간의 지성과 육체적 힘의 한계로 그리고 인간의 다양성과 자유 때문에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기본적인 경제원칙이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나눌 것인가?” 아닌가? 하지만 많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정책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이에크가 노예의 길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러한 접근법이 전체주의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하지만, 모두를 위한 정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모든 사람을 최악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정책은 존재한다. 모든 사람의 최저 생계를 보장하고, 공교육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범죄자를 예방하는 것이 그러한 정책이다. 이러한 정책은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고 사람들이 각자가 자기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게 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이 자기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게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완전하지 못하다는 개념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정치체제이다. 인간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도 완벽한 통치를 할 수 없다. 언젠가는 독재자는 잘못된 의견을 낼 것이고, 매번 올바른 의견을 낸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공공선을 위해서 사용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다양한 checks and balances를 통한 권력의 견제와 통제 그리고 다양한 의견의 교환을 통한 사회의 발전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이에 같은 맥락에서 포퍼는 점진적 사회공학이라는 개념을 설명했다. 점진적 사회공학이란, 원대한 목표를 두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작고 구체적인 사회정책의 개선이 목표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열린 사회의 이상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현대 사회가 직면한 도전들 속에서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현재의 위기는 단순히 외부적 도전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우리의 가치와 신념을 재검토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기술의 발전, 국제 협력, 그리고 시민 사회의 활성화를 통해 민주주의와 개방성을 촉진하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개인의 참여와 창의성을 중시하며,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는 문화를 장려함으로써, 더욱 강인하고 활기찬 열린 사회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결국, 우리의 노력은 포퍼가 꿈꾼 바와 같이, 자유롭고, 정의롭고, 포용적인 세계를 실현하는 데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는 비도덕적이고 개인의 자유는 억압하지만 안정적인 “닫힌사회”에서 도덕적이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열린 사회”로의 이동이 사람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킨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제시한 것처럼 이러한 불안감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면 시민들이 자기의 자유를 버리고 “닫힌사회”로 회귀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기본적인 삶의 보장뿐만 아니라, 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 그리고 인문학 교육 등을 통해 불안감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의 시대에 맞는 열린 사회의 비전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도전이자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