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읽고 by 라인홀드 니부어
(1) 서론
인류의 역사는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인류가 먹을 열매와 곡식을 얻기 위해 척박한 자연과 투쟁해야 했고, 우리의 안전을 위해 야생동물과 싸워야 했다. 인류는 도구를 발명하면서 자연과의 투쟁에서 승리했고, 그 결과 자연을 지배하는 문명을 세우게 되었다. 자연을 지배한 인류는 인간을 투쟁의 대상으로 삼았다. 부족이나 씨족으로 일컬어지던 집단은 다른 부족 혹은 씨족 집단을 지배했고, 이는 더욱 큰 규모의 집단 즉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인간끼리의 투쟁은 계속되었지만, 인간 자체에 대한 믿음이 폭발한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 신 중심적 사고방식을 가진 중세를 지나, 인간에 대한 탐구와 믿음을 중요시한 인본주의는 도덕을 함양한 인간으로 구성된 집단은 도덕적일 수 있다는 낙관주의를 믿게 되었다. 하지만 산업혁명, 1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대공황을 거치면서 이러한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게 되었다. 왜 도덕적으로 보이는 개인이 모인 사회는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될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하기 위해 라인홀드 니부어는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을 쓰게 되었고 이 책은 그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하고 있다. 니부어는 개인과 사회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과 사회를 다른 개체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평화를 위해서는 개인의 도덕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선의지를 담은 강제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개인과 사회는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2)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다. 개인 도덕성의 최대치는 “이타주의”이다. 다른 사람의 이익과 권리가 나의 이익과 권리보다 우선시 되는 이타주의는 이기적 존재로 일컬어지는 개인이 쉽게 달성할 수 없다. 개인은 이타적이기 되기 위해서는 무한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이러한 노력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 “이성”과 “종교”이다.
먼저 이성은 보편성이란 개념으로 사람들에게 이타적이기를 요구한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성이란, 칸트의 정언명령으로 설명될 수 있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너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라는 원칙이다. 쉽게 말하면, 너에게 중요한 권리는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한 권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권리도 존중하고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나의 사리사욕을 채워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만약, 내가 배가 고픈 것이 고통이고 벗어나고자 하는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이 굶고 있을 때 나의 몫을 때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성의 보편성이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고 그 희생의 결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게 된다.
두 번째는 종교다. 종교는 타인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기를 개인에게 요구한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이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최대한의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또한 종교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하신 것처럼, 우리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개인이 나의 욕구 충족을 희생하고 타인의 고통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종교적 사랑이자 희생이다. 그리고 종교는 내세라는 약속을 함으로써, 무조건적인 희생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차후에 보상을 보여주면서 개인이 도덕성을 함양한다.
이처럼, 종교와 이성으로 단련된 개인은 이타성을 지닌 도덕적 개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이 모인 집단은 도덕적이지 않다. 오히려, 매우 친절한 옆집 아저씨 그리고 자상한 아빠였던 아이히만이 무감각하게 수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한 거처럼 참혹할 정도로 비도덕적이다. 그렇다면, 왜 개인의 합이 비도덕성으로 변화하는가? 니부어는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목적의 차이에서 그 답을 찾는다.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에 따르면, 개인의 도덕적 목적인 이타주의이지만, 사회의 도덕적 목적은 사회정의라고 한다. 문제는 사회정의는 집단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다르게 해석된 사회정의는 개인의 도덕적 이타성을 집단 이기주의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게 된다. 가령, 독일 나치의 사회정의는 게르만족의 부흥이 사회정의였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집단을 억압하는 집단 이기주의를 독일 집단의 구성원에게 강요한다. 이타주의란, 남을 위해 자기의 권리를 희생하는 것으로 집단의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한다는 이타주의의 기본 성질은 유지하지만, 그 결과는 집단이기주의가 된다.
(3) 도덕적 개인이 비도덕적 사회에 순응하는 이유
도덕적 개인이 비도덕적 사회에 쉽게 순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집단은 타인과 다른 특수성을 기반으로 집단을 형성한다. 특수성을 기반으로 한, 집단은 보편성에 따른 이타주의의 출현을 막을 수밖에 없다. 개인이 보편성에 기반한 결정을 내린다면, 그런 개인은 집단에서 축출되고 집단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대부분의 인간은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데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이타주의를 쉽게 버린다.
둘째,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인간의 특성을 파악한 지도자들은 그들의 특성을 이용해서 집단 이기주의를 실현한다. 지도자들은 집단의 영속성을 위해, 개인의 판단을 희생시키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그들은 집단이라는 특수성을 통해 개인에게 맹목적으로 집단의 정책을 따르기를 요구한다. 도덕적인 이유로 따르기를 거부하는 개인은, 집단적 목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처벌하거나 집단이 제공하는 모든 이득으로의 접근성을 박탈한다. 유태인을 위해 일했던 독일인들은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인을 도왔던 일본인들은 다른 일본인들이 누리던 국가 복지의 이용 권리를 박탈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비도덕적 행동은 국가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가끔 국가는 도덕적 개인을 속이기 위해 보편성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기도 한다. 서구는 야만인의 문명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내걸고 끔찍한 일을 자행했고, 노예제도는 노예가 사람이 아니라는 핑계를 통해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자기기만과 위선은 국가 내부의 집단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저소득층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빈부격차는 사회발전과 기회의 평등이라는 자기기만과 위선으로 포장된다. 나의 경제적 이득이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사회의 발전은 저소득층의 삶을 더욱 발전시키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것이다.
셋째, 이성이 요구하는 이타주의는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데 이는 이기적 본성을 가진 개인에게는 가혹한 일이다. 하지만, 이타적인 행동이 사회적 칭찬을 받는 환경에서는, 개인은 이타심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타심이 이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혹은 이기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쉬운 길을 발견했을 때 개인은 이타심을 버리게 된다. 집단 이기주의와 그 뒤에 숨은 개인의 책임은 개인에게 이기심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에 매우 쉽게 자기 합리화를 통해 이기적인 집단에 녹아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적 도덕주의는 왜 실패하는 것인가?
첫째, 종교 또한 집단으로서 종교의 번영과 지도자 개인의 영달이라는 이기적 요인을 가진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종교는 국가에 협력한다. 국가와 협력하고 집단 이기주의에 동참함으로써, 종교가 가지는 집단의 지위는 국가 안에서 높아지고, 이는 지도자에게 물질적 혹은 사회적 번영을 약속한다. 집단화된 종교 안에서 종교인이 가지는 사랑은 종교에 대한 사랑으로 변질되고, 이는 집단 이기주의화 된다.
둘째, 종교는 그 특성상 현실 세계보다는 내세를 중요시한다. 이러한 종교적 특성은 비도덕적 사회에 대항하기보다는 종교에 더욱 열중하는 종교 절대주의를 발생시킨다. 종교 절대주의는 사회 변화보다는 개인의 종교적 신념과 그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갈고닦기를 원하고, 이는 천국으로의 길로 향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 따라서, 비도덕적 사회에 기여하지는 않지만, 무관심하고 관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니부어는 개인의 이성을 갈고닦으면 도덕적 사회로 갈 수 있다는 낙관주의와, 종교의 힘으로 인류를 구원하자는 종교적 해결책에 거부감을 보인다.
(4) 니부어의 해결책은?
니부어는 자율적 인간보다는 집단 간의 이기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강제력”을 해결책으로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강제력이란, 집단이 가지는 이기심의 발현을 막고 일방적으로 억압당하는 집단 혹은 개인을 보호하는 것으로 국가 내에서 강제력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의 강제력까지 포함한다. 이는 홉스가 말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개념과 비슷한 것으로 집단은 자신의 이기주의로 인해 다른 집단과의 투쟁은 필수적인 것으로 강제력을 통해서 이를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니부어에 따르면 강제력은 국가의 강제력과 억압당하는 집단의 강제력이 있다. 국가는 위에 설명한 것처럼 강제력을 가지고 집단 간의 투쟁을 막을 수 있는데, 이를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도덕 혹은 종교적으로 단련된 지도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지도자는 “선의지”를 통해 올바른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강제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도자가 항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억압받는 집단의 저항을 통한 강제력의 존재 또한 중요하다. 억압당하는 집단이 사회 개인의 도덕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집단을 조직하고 그를 통해 강제력을 사용해서 저항해야 한다. 억압하는 자본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연합이 필수적이고 억압하는 백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흑인 집단의 단결과 저항이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저항이 비례적이고 적절하게 사용될 때, 억압받는 집단은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강제력은 국내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도 적용된다. 강제력을 사용할 수 있는 집단 혹은 강제력을 통한 저항이 국제사회의 집단이기주의를 해결하는 근거가 된다고 니부어는 주장한다.
니부어는 억압받는 집단은 폭력적 저항과 비폭력적 저항 모두 가능하다고 했다. 폭력적 저항이 비도덕적으로 보일지라도 억압하는 집단의 폭력성에 비하면 매우 미미할 것이기에 폭력적 저항은 도덕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Black lives matter” 운동 시에 폭력시위에 대한 비난이 심심치 않게 제기되었지만, 흑인은 매일매일 경찰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주장은 비례성에서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폭력적 저항이 무고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지만, 무고한 시민들은 비도덕적 사회의 일원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변화하는 사회문제는 극히 드물다고 했다.
하지만, 니부어는 도덕적이 아니라 효과적인 측면에서 비폭력적 저항을 옹호했다. 폭력적 저항은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적대 관계를 고착화시킬 수 있다. 비폭력적 저항은 그 고리로부터 벗어난다. 또한, 폭력을 묵묵히 견디면서 저항하는 개인이 보내는 도덕적 울림으로부터 자유로운 도덕적 인간은 없기에 사회 변화에 더욱 유리하다는 것이다.
니부어는 강제력과 함께 정치적 참여 또한 중요한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니부어는 애국심이 집단 이기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국가는 국가만이 폭력적 강제성을 가지도록 법제화했는데, 이들은 애국심을 발현하기 위해 경찰력이라는 폭력성을 사용한다. 이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사법기관의 교정적 목적에 관해서 이야기했는데, 이는 법을 통해서 사회 규범을 내재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니부어는 푸코와 마찬가지로 경찰력과 교육을 통해서 애국심과 사회 지배층의 특권을 내재화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정치적 참여가 동반되지 않은 사회변혁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참여를 통해, 국가 강제력과 교육기관과 같은 상부구조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고, 이는 사회변혁의 기초이자 추진력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니부어는 종교와 이성이 비도덕적 사회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지만, 이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비판을 통해 종교와 이성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다. 종교적 그리고 이성적 인간의 모임이 도덕적 사회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비도덕적 사회에 대한 해결책인 강제력을 사용하는 지도자에게는 올바른 지침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결론은 종교와 이성으로의 회기 그리고 종교와 이성의 올바른 교육적 효과에 대한 기대를 통해 사회의 균형을 추구하자는 것으로 생각한다.
(5) 현대사회의 니부어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니부어의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 사회”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혹자는 현대 사회는 복지사회로서 니부어의 책이 가지는 의미가 덜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타당하지 않다. 복지 사회의 목적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노동력이 재생산과 경제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복지 사회와 고임금이 사용된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있다.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러한 주장이 나온다는 것은 복지 사회와 고임금 사회가 사회의 모든 사람의 권리를 지켜주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방증한다. 오히려 현대 사회는 다국적 기업의 출현과 신자유주의의 물결로 인해 노동자의 강제력을 실현해 줄 수 있는 노동조합이 사라지고 있다. 교육과 미디어 그리고 법과 같은 상부구조는 자본주의의 편에서 자본주의의 번영을 위해 자기기만과 위선의 목소리를 높인다. 마이클 샌델은 그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이에 대한 그의 의견을 피력했다. 나는 열심히 했기 때문에 나에 대한 보상은 정당하다는 그 자만심은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느끼던 도덕적 울림마저 묻어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미디어에서 나오는 시위에 대한 묘사는 야만적인 움직임으로만 묘사된다. 이민자들은 어떠한가?? 정치적 논리와 미디어의 편파적 보도로 형성되어 버린 여론은 이민자들에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국제사회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면서 국제경찰의 지위를 던져버린 지금, 국제사회는 지독한 혼란에 빠져있다. 물론 미국이 “선의지”를 가지고 강제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라는 강력한 도덕적 시스템을 목표로 두고 국제법을 준수하면서 집단이기주의를 어느 정도 억눌렸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중국은 대만에 대한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또한, 중국은 타국에 갚을 수 없는 차관을 제공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이자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동의 없이 항구와 같은 사회기반시설을 빼앗아 가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항해야 하는 UN은 P5 국가 간의 집단 이기주의에 매몰된 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의 도덕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강제력을 통한 집단 이기주의를 견제하는 힘 그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저항을 허용하는 집단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필요성을 니부어의 책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는 도덕적 인간이길 갈구하는 우리가 우리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나는 도덕적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과연 나는 비도덕적 사회를 도덕적 사회로 만들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준비가 필요한가?
첫째, 도덕적 인간은 사회 지배층과 국가의 자기기만과 위선을 파악할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을 갖추어야 한다. 사회 지배층과 국가는 갈수록 고도화된 방법으로 미디어와 교육 그리고 여타의 상부구조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지배자의 힘을 강화하는 동시에, 우리가 ‘스스로 사고한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이러한 인식적 관념론적 착취구조에서 벗어나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도덕적 사회를 위한 준비라고 생각한다.
둘째, 자기기만과 위선을 파악하고 있지만, 무관심 혹은 자기기만과 위선의 착취물에 기대어 살아가기 위해 나를 기만하고 있지 않을까? 도 생각해야 한다. 사회에 대한 무관심은 무관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착취에 대한 동의가 된다. 이러한 무관심적 동의는 비도덕적 사회라는 괴물에 영양분이 된다. 이보다 더한 것은 지배계층의 착취로부터 떨어지는 콩고물에 취해 자기기만과 위선으로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이다. 자기기만과 위선에 대한 무지는 이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만, 자기기만과 위선을 알지만,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가는 삶은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나고 더욱 의미 있는 가치를 좇는 것 또한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타인의 입장에서 그들의 요구를 듣고 일관적인 도덕법칙의 적용이 아닌 차등적 도덕법칙의 적용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현대사회는 모든 복잡한 이야기를 단순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일상이 바쁘기도 하겠지만,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이야기로 축소하면, 사람들은 도덕적 책임에서 벗어나 일률적인 ‘평등’의 잣대로 사회를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억압받는 사람과 억압하는 사람에게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평등은 평등이 아니다. 억압받는 사람에게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 진정한 평등인 것이다. 여성에 대한 소수자 우대 정책이나 장애인에 대한 보호 정책은 차별이 아니라 평등이다.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설립하게 해 주고 이들이 보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 또한 평등이다. 이러한 태도를 함양할 수 있을 때, 도덕적 인간의 집합이 도덕적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