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승리와 혁명 이후의 절망을 드러낸 명확한 메시지

아Q정전을 읽고 by 루쉰

서론

중국 근대 소설의 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아Q정전”은 루쉰이 중국의 근본적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쓴 소설로 유명하다. 루쉰는 마오쩌둥의 극찬을 받은 소설가로, 중국의 문제를 주제로 한 소설을 쓴 작가다. 원래는 의사가 꿈이었으나, 일본 유학 당시 중국인이 스파이로 몰려 살해당하는 것을 보기만 하는 중국인들의 반응에 놀라 중국 인민을 바꾸기 위해 소설가가 되기로 생각을 고쳤다. 그는 특히 체제의 변화만으로는 중국을 변화시킬 수 없고 문화적, 인식적 변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하층민들이 같은 하층민에게 품는 여러 가지 부정적 감정을 소설의 주제로 자주 다루었는데, 이는 “아Q정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아Q정전”에서는 아Q라는 문제적 인물을 통해 중국 인민과 허울뿐인 혁명에 대해 날 선 비판을 하고 있다. “정신승리”라는 개념을 통해 민중 심리와 혁명의 허상을 조명한 『아Q정전』. 이제 이 작품이 던지는 통렬한 물음들을 되짚어보자.


신해혁명

“아Q정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신해혁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 중국을 통치하던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의 패배 등을 통해 허울뿐인 대국으로 몰락하고 있었다. 이와 맞물려, 중국에 서양의 민주주의와 공화정 사상이 침투하기 시작했고 이는 중국에 혁명의 불길로 작용했다. 중국 남부의 여러 성들이 독립을 선언했고, 이를 지켜보던 쑨원은 외국에서 급히 귀국하여 국민당을 창설하고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하고 대총통에 취임했다. 청나라는 위안스카이를 등용해 혁명을 진압하려 했지만, 혁명이 이미 너무 확산되어 있었다. 오히려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대총통이 되기 위해 혁명군과 협상을 벌였고 청나라의 퇴진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 후 위안스카이는 대총통 자리에 올라 권력을 독점하고 다시 제정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에 국민들과 혁명 세력 그리고 지방 군벌들이 크게 반발했고 중국은 군벌의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루쉰는 체제의 변화가 중국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체제의 변화는커녕 중국은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루쉰는 크게 실망한다. 이에 루쉰는 그의 실망감과 함께 사회 변화에 대한 청사진을 제공하고자 여러 가지 단편 소설을 썼고 “아Q정전” 또한 이와 궤를 같이한다.


줄거리

“아Q정전”은 단편 소설인 만큼, 줄거리 또한 매우 간단하다. 주인공인 아Q는 아무것도 없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사람들에게 분노와 조롱을 불러일으킨다. 먼저 아Q는 자기가 유명한 집안의 핏줄이라고 자랑하지만, 그는 그가 자랑하는 핏줄을 가진 세력가에 의해 폭행과 무시를 당한다. 그 후 그는 동네 불량배의 표적이 되는데, 불량배에게 폭행을 당할 때마다 그는 정신승리의 방법으로 폭행의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처음 폭행당했을 때는 “아들에게 맞은 셈치자”라며, 상대방을 낮추는 방법으로 정신승리를 했고, 두 번째 폭행을 당했을 때는 “나는 버러지야, 맞을 만해”라며 자신을 낮추는 방법으로 정신승리를 했다.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일꾼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나서는 “군자는 폭력을 쓰지 않는다”라며 정신승리를 했고, 끝내는 가장 힘없는 비구니에게 화풀이를 하면서 정신승리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비록 현실은 어둡고 무겁지만, 정신승리를 통해서 어느 정도 버텨나가던 아Q는 비구니에게 성희롱을 하고 동네 세력가의 하녀에게 같이 잠자리를 하자고 제안했다가 이로 인해 아Q는 두들겨 맞고 갖고 있는 것을 모두 잃고 만다. 세력가는 아Q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동네에서 일을 구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는 견디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 도시로 가게 된다.


아Q는 도시에서 혁명의 물결을 경험함과 동시에 진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다시 시골로 돌아온다. 진귀한 물건을 얻고 싶어 하는 시골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힘을 일시적으로 얻게 되지만, 그가 도둑질하는 무리의 망을 보고 물건을 얻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의 일시적 존경과 힘은 다시 사라지게 된다. 실망한 아Q는 도시에서 경험했던 혁명이 시골까지 퍼져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혁명을 통해 자신에게 힘이 주어졌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는 “혁명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혁명이 나에게 좋은 것이기에 좋은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고 혁명에 참여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실제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혁명당을 찾아가지만, 시골의 세력가의 아들에게 거절당한다. 혁명단을 가장한 도둑 무리가 도둑질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혁명단의 새로운 우두머리는 과거에 망을 본 전력이 있는 아Q를 범죄자로 체포한다. 아Q에게 자신이 범죄자라는 자백서에 서명하도록 한다. 글을 읽지 못하는 아Q는 자백서에 서명하고 그 결과 사형장으로 끌려간다. 아Q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구경꾼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 특이한 걸음걸이와 노래를 하지만 결국 자신이 사형당하러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그는 사형을 당하게 되고 사람들은 아Q의 억울함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Q의 사형이 재미없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나의 생각

“아Q정전”은 책 자체가 1부, 2부로 나뉘지 않지만 내 생각에는 도시로 떠나기 전이 1부, 도시에서 돌아온 것이 2부로 보인다. 루쉰은 아Q정전을 통해 중국 사람들의 무지함과 혁명에만 기대는 사회 변화의 한계를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1부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1부

1부에서 “아Q정전”의 아Q는 서양 문물을 만나기 전의 중국 사람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Q는 도시로 가기 전에는 자신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의 삶을 만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향으로 행동한다. 정신승리 또한 이와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중국은 예전부터 강력한 신분제 사회였기에 하층민이 자신의 노력을 통해 신분 상승을 도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을 옭아매는 시스템에서 시스템에 억눌리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도모하는 방법으로 아Q와 중국인들은 정신승리라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나보다 힘이 센 불량배의 폭행에서 벗어나기 힘들기에 폭행이 나에게 주는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실제로 아Q는 책을 읽는 독자들과는 다르게 정신승리법을 통해서 나름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살고 있었다. 물론 “아Q정전”은 그런 사회에 대한 비판도 마다하지 않는다. 힘이 약한 개인이 정신승리를 통해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강력하고 정의로운 중앙정부의 부재 때문이다. 불량배의 폭행은 정의롭지 않다. 강력하고 정의로운 중앙정부라면 아Q를 불량배로부터 보호해줘야 마땅하다. 아Q가 가진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Q가 벗어날 수 없는 사회 체제의 덫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벗어날 수 없기에 거짓 명성으로 자신의 자아를 보호하려 한 것이다. 강력하고 정의로운 중앙정부가 존재했다면 교육을 통해서 아Q와 같은 하층민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아Q의 편에 서지 않는다. 오히려 아Q를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현행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왜? 아Q의 편에 서는 순간 그들 또한 아Q와 같은 처지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Q가 지방 세력가의 여자 종에게 잠자리를 부탁했을 때, 이런 관계는 더욱더 명확해진다. 아Q는 어떠한 위법적 행위도 하지 않았다. 사실 성인 남녀가 서로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여자 종 또한 아Q의 제안이 나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처음의 거부는 놀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연스러운 거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의 느낌은 등한시 되고 여성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세력가의 분노가 주를 이룬다. 왜? 왜 여성이 아니라 세력가의 분노가 중요할까? 이는 세력가가 그 종을 소유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더럽혀지고 모욕당한 여성의 권리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천한 아Q가 감히 자신의 소유물에 손을 뻗었고 이를 자신에 대한 공격과 모욕으로 받아들인 세력가가 가진 아Q에 대한 분노다. 이는 그 당시에 뒤틀려 버린 중국 사회의 신분제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아Q는 자신에 대한 모욕과 공격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잘못된 행동이다. 하지만, 사람은 받아들인 에너지를 반드시 밖으로 표출해야 한다. 시스템에 의해 모욕당한 자아는 모욕을 공격성이라는 다른 모습으로 표출해야 한다. 이는 서로 연대해야 할 하층민들의 서로에 대한 공격과 분쟁으로 발현된다. 이 또한 중앙정부의 부재에서 일어난 문제인 것이다.


2부

도시에서 혁명을 경험하고 돌아온 아Q는 서양 문물을 맛보고 받아들인 중국 사람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와 기술을 경험한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한 시스템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아Q는 정신승리법을 포기하고 상대방으로부터 문제점을 찾기 시작한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정신승리란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자기 도피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절대 변화하지 않을 듯이 보였던 시스템의 허약함과 약점을 본 그 순간 시스템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에 아Q는 자신을 탓하지 않고 상대방을 탓할 뿐만 아니라 혁명에 참여하겠다는 능동적 사고를 통해 자신의 신분 상승을 꿈꾸게 된다. 하지만, 아Q의 신분 상승을 막아서는 건 구체제와 같지는 않지만 같은 세력가요, 구체제에서 비롯된 자신의 무지요, 그리고 분노의 표출 대상을 잘못 찾은 같은 처지의 대중들이다. 아Q의 혁명에 대한 참여는 구세력가의 아들에 의해 좌절당하고, 무지한 아Q는 자백서에 서명하고 처형당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억울함을 같이 슬퍼해야 할 대중들은 아Q의 목숨과 정의보다는 사형에서 재미만 찾고 있다. 겉모습만 바뀐 시스템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중국 사람들은 이름만 바뀐 같은 억압적 시스템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그렇다면, 루쉰이 “아Q정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첫째, 중국 혁명에 대한 비판이다. 중국은 청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공화정으로 벗어나고자 혁명을 했지만 혁명의 수혜자가 되어야 할 사람들의 삶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혁명의 우두머리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얻고자 사람들을 누명 씌우고 빼앗고 전쟁이라는 더 큰 고통을 주었을 뿐이다. 중심은 없이 정치인들의 욕심에 좌지우지되고 방향을 정하는 혁명은 본래의 목적을 파괴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 같다.


둘째, 중국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다. “정신승리”를 시작으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밖에 없는 혁명에 대한 무지, 하지만 “혁명”이 자기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맹목적인 믿음으로 변해버리는 그 무지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동포에 대한 연민과 사랑보다 이기적 욕구에 기반한 맹목적 믿음은 그 무엇보다 중국 사람들을 차가운 혁명의 도구로 만들어 버렸고, 이러한 태도가 어떻게 개인뿐만 아니라 중국에 해악한지를 보여준다.


셋째, 위에 대한 해결책은 칼 포퍼가 이야기한 점진적 공학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무지한 대중은 정치가들에게 휩쓸리기 쉽기 때문에 혁명이 아니라 문화적, 교육적 접근을 통해 사회와 구성원의 변혁이 새로운 세상의 길잡이라는 것을 말한다. 무지한 대중은 이용당하기 쉽고, 이용당한 대중은 차가워지기 쉬우며, 차가운 사회는 파괴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쉰은 마오쩌둥에게 비판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오쩌둥이야말로 루쉰이 비판하고자 하는 정책을 그대로 펼쳤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아무런 계획 없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책을 위해 문화혁명이라는 유례없는 파괴적 정책을 펼쳤다. 지금의 중국은 어떠한가? 문화혁명의 아이라고 할 수 있는 시진핑 또한 “아Q정전”이 비난하는 형태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 시진핑에 대한 견제는 사라진 지 오래고 중국의 정책은 중국 인민보다는 중국 공산당을 위해 만들어지고 있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뉴스를 제거하기 위해 발언의 자유는 남의 나라 일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지금 중국 사람들이 “아Q정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중국인들은 “아Q정전”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Q정전”이 중국인들의 숨기고 싶은 민낯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더 나은 중국을 위한 첫 발걸음이라고 루쉰은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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