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도착
한국보다 시간이 느린 나라로 이동하다 보니, 비행기 창 밖은 해가 지지 않았다. 눈부신 비행을 11시간 남짓하고, 경유지인 헬싱키에 내렸다. 공항 이용객이 온통 서양인이었다. 다른 대륙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같이 타고 온 비행기에는 한국인 승객이 90%는 되는 것 같았는데, 이제 공항에 남은 동양인을 보기란 어려웠다. 더 이상 공항의 안내 방송에 한국말은 없었다. 핀란드어로 안내 방송이 나오고, 영어로 한 번 더 방송됐다.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기분이었다. 마냥 즐거웠다. 입구가 어딘지 몰라서 화장실 앞을 서성거리다 겨우 입구를 찾아 다녀오는 것도 즐거웠다. KFC 할아버지처럼 생긴 서양인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즐거웠다. 우리가 서로를 처음 알게 된, 구르는 낙엽에도 웃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공항 바깥은 눈이 오고 있었다. 마드리드행 비행기가 좀 연착되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비행을 마치고 싶을 만큼 피곤했지만, 기분 좋은 기다림이었다. 낭만을 찾아 떠나온 나는 북유럽의 눈을 창 밖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하얀 바깥세상의 찬 공기와는 대조되는 주황색 불빛의 실내는 적당히 따뜻해 이처럼 아늑할 수 없다고 느꼈다.
같은 출입구에서 탑승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슬슬 일어났다. 눈치껏 줄을 섰다. 탑승이 시작됐고, 우리 좌석은 끝에서 3번째 줄 정도에 위치했다. 덕분에 기내 탑승자들을 쭉 훑어볼 수 있었는데, 한국인 탑승객은 우리뿐인 것 같았다. 한국인 승무원도 없다. 그들이 우리를 신기하게 보기 시작했다. 비행기 기체가 작아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더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불편한 시선 때문에 긴장감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상황이 아니었다. 빨리 저 끝에 있는 우리 좌석에 가야 했다. 사실 서두를 이유는 없었지만, 몸에 밴 습관이기에 빨리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사 되짚어보면 우리를 구경하는 수많은 시선에 순간적으로 덜컥 겁이 났지만, 모른 척, 아닌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한 거였다.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성격 때문에 이 자리를 빠르게 떠날 뿐이라고 여기면서.
헬싱키 공항에서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탄 시간은 저녁 8시경이었고, 마드리드까지는 앞으로 4시간의 비행만이 남아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자고 생각했지만 알아서 눈꺼풀이 내려왔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1시쯤 됐을 시간이니 평상시였다면 한참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니 편하게 잤어도 됐을 것을, (당시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꾸벅꾸벅 졸며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도착 시간은 현지 시각으로 밤 11시였고, 우린 총 16시간이 넘도록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 왔다. 빨리 숙소에 가고 싶었다. 첫 번째 숙소는 한인 민박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카카오톡을 통해 주인아주머니께서 연락을 주셨고, 공항으로 픽업을 갈 테니 공항에 내리자마자 와이파이를 잡아 연락을 달라고 하셨다.
비행기 모드를 해지하고, 와이파이명 중에 airport라고 보이는 이름을 클릭한 것까진 좋았으나, 사용자 인증에서 막혀버렸다. 차분하게 생각했다면 내 개인정보를 묻는 거겠거니-하면서 눈치껏 때려 적었을 텐데. 작은 비행기에서 만난 수많은 낯선 시선의 여파가 꽤 컸는지, 낯선 스페인어가 보이자 당황해버렸다. 와이파이 때문에 머뭇거리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빠져나갔고, 수화물 찾는 곳에는 우리만 남겨졌다. 출구라도 찾겠다고 안내도를 보고 화살표를 따라다녀봤지만 출구도 못 찾고 있었다. 아무것도 못한 채 빙글빙글 돌다, 안내데스크에 직원을 발견했다. 왜 이제야 눈에 들어왔을까 싶었지만, 그런 걸 따질 새가 있던가. 주어-동사-목적어의 영어 어순을 떠올리며 와이파이 연결 방법부터 물어봤지만 그녀도 영어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와이파이 화면을 열어 핸드폰을 내밀었더니 뭔가를 누른 후 나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손가락으로 빈칸을 가리켰다.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 된 나는 국적, 이메일 등을 적고 공항 와이파이에 접속했다.
와이파이를 찾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다음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들이 수화물을 찾아 모두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세상에. 안내데스크 옆 로비를 통과하면 출구였던 것을. 이제 와서 보니 이동할 수 있는 방향도 이 한 곳뿐이었다. 와이파이에 접속하고 숙소 주인아주머니와 연결이 됐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심함이 몰려왔다. 조금만 집중해서 상황 파악만 했다면 몸도 마음도 덜 힘들었을 텐데. 낯선 환경에 즐거움을 느낄 땐 언제고, 금방 겁에 질려 허둥대는 모습이라니.
한국이었다면 고민도 않고 뚝딱해냈을 일인데. 민망하기 그지없지만 해외여행의 요령이 없어서려니, 생각하며 벤치에 앉았다. 가족들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남겨놓고 한숨 돌리는 사이, 공항 밖으로 나오라는 숙소 주인아저씨의 연락이 왔다. 숙소까지 가는 차 안에서 어디서 왔냐, 얼마나 묵을 거냐, 여행 일정이 어떻게 되냐 물으시며, 차 루프를 열어 경치를 보여주는 친절한 숙소 아저씨께 감사하면서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잠도 못 자고 한국에서 온다는 손님을 기다리고 계셨을 텐데, 도착했다는 연락을 주고받지도 못한 채 마냥 기다리게 하다니.
숙소 앞에 도착해 차에서 짐을 내렸다. 가로등은 켜져 있었지만 어두컴컴해 주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숙소 2층에 배정된 우리 방과 욕실을 안내해주시고, 다음날 아침 식사 시간까지 알려주셨다. 너무 늦게 도착해서 죄송하다 인사드리니 여행객들이라 더 늦게 도착하는 사람도 있으니 이 정도는 양반이라며, 푹 자고 내일 아침에 보자고 하신다. 또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에 다른 여행객들에게 피해는 주지 말자는 생각으로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짐을 풀어 정리하고 잠잘 준비를 했다. 침대에 누웠다. 마드리드 공항에서 느낀 허탈함은 잊기로 했다. 피곤함과 설렘이 밀려왔다. 내일부터 시작될 평소 같지 않을 날들을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