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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직한캐치업 Mar 31. 2017

감자와의 동거

오 나의 뮤즈

혼자살이 97일째

식물을 맞이했다.


감자를 심었다.


내가 흙을 사게 만든 첫 식물이야.


나는 곰손도 아까운 똥손이다.


손재주는 없으나

호기심은 많고, 행동력은 대단하여

꽂히면 일단 한다.


딸로서 엄마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드리고 싶어

도저언~ 한 날,

내 모습을 지켜보고 미역국을 드신 엄마는

-고맙다, 다음엔 안 해도 된다.

라고 완곡히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이 일은 부엌과 관련된 에피소드 중 하나이며,

나는 부엌에만 들어가면 파괴의 신이 되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는 내가 부엌에 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회사 생활 중 신생아 모자 뜨기에 도저언~ 한 적도 있다.

몇 개 코가 빠져 구멍이 났는데,

우리 부서엔 뜨개질의 신이 계셨기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건 힘들겠다고 했다.

다 뜬 신생아 모자를 봉사단체에 보내면

허술한 부분은 보완하여 준다고 하는데

내껀 힘들겠다 하여 보내지 못한 적이 있다.


식물과의 슬픈 인연은 길다.


누구나 한 번쯤 페트병에 양파 키우기는 해보지 않는가?

내 양파는 싹이 안 나더라고.

허브도 자꾸 말라가고.


한동안 내 인생에 식물은 없었는데,

위에 언급한 뜨개질의 신께서 다육이를 나눔 해주신 적이 있다.

각박한 사회생활에 자그마한 초록이를 잘 키워보자 싶어 데려왔는데, 

영양제도 꽂아놨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나도 내 실력을 알면 그만둬야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집에 파릇한 식물을 두고 싶은 마음은 커져갔다.


손재주 없는 나를 잘 아는 가족들은

식물 키우기를 말렸기 때문에

-언젠가 온 정성을 다해 키우리라

하고 버킷리스트로 만들어뒀던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생각보다 빨리 시행하게 됐다.


혼자 살며 부지런히 밥반찬을 해 먹어도

재료가 방치되는 건 어쩔 수 없었고,

냉장고 한켠에 있던 감자에 싹이 난 것이다.


-너로 정했다

싹이 잘 크도록 감자는 고이 모셔놓고

자취생들의 천국인 다이소에서 가장 깊은 화분을 샀다.

남은 건, 흙.


이전에 시도했던 다육이는 

우리 동네에 널려있던 흙으로 심어서 잘 못 컸나 싶은 마음도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서울의 6평 남짓한 내 공간에 없는 게 흙이라

인터넷 검색으로 상토 배사토 하는 것들을 샀다.


흙이 배송될 동안

싹이 난 감자를 반으로 잘라 상하지 않게 잘 말려두었고


드디어 오늘,

신경 써서 고른 화분에

배사토와 상토를 붓고

싹이 난 감자를 묻고

물도 조심스레 주고는

내 공간에서

감자를 키우기에 가장 적절하다 생각되는 공간에

화분을 두었다.


홀로 지내는 서울살이에 동거 감자가 생겼다.

누군가는 애완견, 애완묘에게 느낄 감정을

나는 감자에게 느끼게 될 것 같다.

이렇게 성장일기까지 쓰게 된 걸 보면

어쩜 그 이상일지도.


그래서 불러본다.

오 나의 뮤즈, 감자여




epilogue.

이렇게까지 감자 키우기를 애지중지하는 것은

항상 실패했던 일을 한 번쯤은 제대로 해내고 싶은

나의 오기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감자의 성장일기라 불릴 이 글은

실은 나의 도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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