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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수현 Jul 27. 2022

1-3. 두 번째 키워드: 관계



1. 동그라미 두 개와 직선 하나, 네모 하나



        민법의 두 번째 키워드는 "관계"입니다. 앞서 민법을 개인과 개인 간 법률관계를 다루는 법이라 하였죠. 똑같은 문장에서 이번에는 개인이라는 단어 대신 관계라는 단어에 주목을 해봅시다. 민법은 관계의 학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을 잘 그리면 민법 공부가 쉽습니다. 무슨 대단한 능력이 필요한 건 아니고 관계도를 그릴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예를 들어 A가 2022. 1. 1. B로부터 X 아파트를 10억 원에 샀다고 해봅시다. 이 사건은 결국 A와 B의 법률관계이므로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 2-1]



        동그라미 두 개와 직선 한 개, 그리고 네모 한 개. 이것이 민법의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주석입니다. 동그라미는 법률관계를 맺은 두 당사자를, 직선과 네모는 법률관계의 내용을 뜻합니다. 우리 사례에서는 '2022. 1. 1., X 아파트, 10억' 같은 내용이 칸 안에 들어가면 적절하겠군요. 이것이 민법의 큰 그림이고 나머지는 모두 응용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안에선 당사자가 더 많이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동그라미를 더 그리면 됩니다. 혹은 당사자끼리 다른 법률관계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네모 안에 다른 내용을 적으면 됩니다. 이처럼 사안에 따라 세부사항은 조금씩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그림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민법의 핵심은 결국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2. 민법과 형법, 그리고 행정법



        가끔은 무언가를 직접 설명하는 것보다 비교하는 편이 낫습니다. 비교 하다 보면 각 대상의 고유색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니까요. 잠깐 민법이 아닌 다른 법률 이야기볼까요. 살펴볼 법률은 형법과 행정법입니다. 민법의 키워드가 "관계"였다면, 형법과 행정법의 키워드는 각각 "행위"와 "근거법령"입니다.




1) 형법의 경우



[그림 1-2]


「형법」 제260조(폭행, 존속폭행) ① 사람의 신체에 대하여 폭행을 가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50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

제257조(상해, 존속상해) ①사람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250조(살인, 존속살해) ①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① C는 D에게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어젯밤 오후 8시경 강남역 부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D가 먼저 C를 밀쳤고, 화가 난 C는 오른손 주먹으로 D 얼굴을 2회 가격하였습니다. D가 쓰러지면서 싸움은 일단락됐습니다. 다행히 둘 다 큰 부상은 없습니다.

 

 ② C는 D에게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어젯밤 오후 8시경 강남역 부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흥분한 C가 죽일듯한 기세로 D 얼굴을 2회 가격했습니다. C는 권투 훈련을 오래 했고, 힘도 장사입니다. D는 얼굴뼈가 함몰되는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③ C는 D에게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어젯밤 오후 8시경 강남역 부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C는 특수 부대 무술 교관인데, D와는 오랜 원한 사이입니다. 우연히 마주친 D가 C에게 모욕을 퍼붓자, 참지 못한 C가 오른손 주먹으로 D의 울대를 정확히 조준하여 2회 가격했습니다. D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습니다.


  ④ C는 D에게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어제 오후 2시경 OO체육관에서 연습 경기 중 일어난 일입니다. C는 오른손 주먹으로 D 얼굴을 2회 가격하였고, 제대로 맞은 D는 잠시 다운됐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는 모두 동일합니다. C는 오른손 주먹으로 D의 얼굴 부위를 2회 가격하였습니다. 하지만 행위가 지닌 법적 의미는 사안마다 다릅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행위는 형법의 폭행죄(제260조), 두 번째 행위는 상해죄(제257조), 세 번째 행위는 살인죄(제250조)를 검토해볼 만합니다. 물론 이것도 확정적인 건 아닙니다. 행위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형법은 범죄행위와 그 처벌을 다루는 법입니다. 그래서 형법의 키워드는 "행위"입니다. C가 D에게 주먹을 휘두른 게 무슨 의미인지, 그러한 행위는 처벌을 받는 것인지, 처벌을 받는다면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 등을 형법은 고민합니다. 사안을 조금 각색하면 더 복잡한 고민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강남역 폭행 사건에 다음과 같은 내막이 있었다고 해봅시다. 이 사건은 사실 C, E, F의 합동 작품입니다. 실제 주먹을 휘두른 건 C뿐이지만, E는 당시 망을 보고 있었습니다. 한편 F는 사건 현장에는 없었지만, 폭행을 부추긴 장본인입니다. E와 F에 대해서도 형법적용할 수 있을까요? 그건 E와 F의 행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둘의 행위를 포섭시킬 수 있는 처벌 규정을 찾고, 그에 알맞게 의미를 부여한다면 E와 F도 처벌을 할 수 있을 테죠. (나중에 형법을 공부하면서 직접 찾아봅시다.) 이처럼 형법의 가장 주요한 고민은 "행위"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이루어집니다.

        




2) 행정법의 경우

  

「행정기본법」 제1조(목적) 이 법은 행정의 원칙과 기본사항을 규정하여 행정의 민주성과 적법성을 확보하고 적정성과 효율성을 향상시킴으로써 국민의 권익 보호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8조(법치행정의 원칙) 행정작용은 법률에 위반되어서는 아니 되며,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경우와 그 밖에 국민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는 법률에 근거하여야 한다.

제9조(평등의 원칙) 행정청은 합리적 이유 없이 국민을 차별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10조(비례의 원칙) 행정작용은 다음 각 호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1. 행정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효하고 적절할 것
  2. 행정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칠 것
  3. 행정작용으로 인한 국민의 이익 침해가 그 행정작용이 의도하는 공익보다 크지 아니할 것

제11조(성실의무 및 권한남용금지의 원칙) ① 행정청은 법령등에 따른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 ② 행정청은 행정권한을 남용하거나 그 권한의 범위를 넘어서는 아니 된다.

제12조(신뢰보호의 원칙) ① 행정청은 공익 또는 제3자의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행정에 대한 국민의 정당하고 합리적인 신뢰를 보호하여야 한다. ② 행정청은 권한 행사의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권한을 행사하지 아니하여 국민이 그 권한이 행사되지 아니할 것으로 믿을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그 권한을 행사해서는 아니 된다. 다만, 공익 또는 제3자의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는 예외로 한다.

제13조(부당결부금지의 원칙) 행정청은 행정작용을 할 때 상대방에게 해당 행정작용과 실질적인 관련이 없는 의무를 부과해서는 아니 된다.



        행정법이란 행정작용과 그 구제, 행정조직 등을 다루는 법입니다.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행정법은 행정과 관련된 다양한 법률을 총칭하는 집단명사였습니다. 그런데 2021. 3. 23. 「행정기본법」이 제정되면서 행정법도 가장 기초가 되는 법률을 갖게 되었습니다.


        「행정기본법」은 제8조부터 제13조까지 행정법을 관통하는 여섯 가지 원칙을 규정해두었습니다. ① 법치행정의 원칙, ② 평등의 원칙, ③ 비례의 원칙, ④ 성실의무 및 권한남용금지의 원칙, ⑤ 신뢰보호의 원칙, ⑥부당결부금지의 원칙까지 이렇게 여섯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단연 '법치행정의 원칙'입니다. (가장 중요해서 조문의 순서도 제일 앞입니다.) 행정작용은 법률에 위반되어서는 아니 되며,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경우와 그밖에 국민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는 법률에 근거를 해야만 합니다(제8조). 국가와 국민의 법률관계는 대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국민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제한할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 장치가 바로 근거법령입니다.   


        그래서 행정법의 키워드는 "근거법령"입니다. 「행정기본법」 제8조에는 행정작용만 적어두었지만 행정구제도, 행정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근거법령 없이는 행정구제를 함부로 할 수 없고, 행정조직의 편성과 해체도 근거법령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림 1-3]



「도로교통법」 제93조(운전면허의 취소ㆍ정지) ① 시ㆍ도경찰청장은 운전면허(...)를 받은 사람이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면 행정안전부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따라 운전면허(...)를 취소하거나 1년 이내의 범위에서 운전면허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다. (...)
  1. 제44조제1항을 위반하여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동차등을 운전한 경우


        그림 [1-3]을 봅시다. 국가와 개인이 법률관계를 맺었습니다. (국가와 개인 간 법률관계이므로 공법관계입니다.) 하지만 민법 그림과는 다르게 오른쪽 동그라미가 어느 단상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이 단상의 이름은 '근거법령'입니다. 근거법령 위에 올라간 덕분에 국가는 개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하지만 근거법령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 제한이기도 하군요. 국가는 「도로교통법」 제93조라는 법령을 근거로 E에게 면허취소 처분을 내렸습니다. 적어도 근거법령은 명확하므로 행정처분을 취소하고자 한다면 E는 다른 특별한 위법사유를 찾아야 할 겁니다.*  



(* 참고로 음주운전을 하면 형사처벌도 받습니다(동법 제148조의2). 이는 음주운전에 따른 면허취소/정지와는 별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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