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의 세 번째 키워드는 "게임"입니다. 앞의 두 키워드가 민법 자체를 잘 요약해주었다면 이 세 번째 키워드는 민사절차를 위한 겁니다. 테니스 게임을 하려면 두 명의 선수와 심판, 이렇게 세 사람이 필요하죠. 민사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사재판을 하려면 ① 원고와 ② 피고 그리고 ③ 재판부까지 셋이 필요합니다.
[그림 1-4]
원고는 민사 소송을 제기한 사람입니다. 원고가 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재판으로 해결되길 바라는 바를 소장(訴狀)으로 적어서 법원에 제출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A가 2022. 1. 1. B로부터 X 아파트를 10억 원에 샀는데 B가 아파트를 넘겨주지 않는다고 해봅시다. A는 자신이 B로부터 X 아파트를 넘겨받을 권리가 있음을 소장에 적어 법원에 해결을 부탁할 수 있습니다. 법원이 A의 소장을 접수하면 이로써 A는 원고가 됩니다.
반면 피고는 민사 소송을 당한 사람입니다. 우리 사례에서는 A가 B에게 소송을 제기했으니 자연스레 B가 피고가 되겠군요. 법원은 원고로부터 받은 소장 부본을 피고에게 전달하여 답변서(答辯書)를 제출하도록 합니다. 피할 수 없는 게임에 초대된 B는 기권하여 A에게 승복하든지, 혹은 게임에 응하기로 결심하였다면 방어할 내용을 답변서에 적어 법원에 제출하여야 합니다.
피고와 피고인은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잠깐 다른 이야기지만 기초적이고 중요한 내용이므로 알아두고 갑시다. 피고는 민사 사건에서 사용하는 용어이고, 피고인은 형사 사건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혹시 헷갈린다면 원고인(?)이라는 표현이 없다는 걸 떠올려 봅시다. 원고와 피고는 늘 같이 다니는 짝꿍 같은 단어입니다. 이는 양쪽 당사자가 대등한 민사에서나 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형사 사건에는 피고인이란 표현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고인의 상대는 검사로 대변되는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는 형사 사건의 참고인일 뿐입니다.) 민사 재판에서 피고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도록 꼭 주의해야겠습니다.
민사 재판은 원고와 피고가 벌이는 한 편의 테니스 게임과 같습니다. 재판부는 이 테니스 게임의 심판관입니다. 재판부는 제출받은 소장과 답변서를 검토하여 변론기일을 잡습니다. 쉽게 말해 게임 날짜를 잡는 것이죠. 변론기일에 출석한 원고와 피고는 서로 공방전을 펼치고 이에 재판부는 각 당사자의 주장이 타당한지, 주장을 입증할 증거는 충분한지 등을 꼼꼼히 살펴봅니다. 누구 주장이 더 타당한지에 대한 확신이 서면 재판부는 판결로써 승자를 선언하고 사건을 종결시킵니다. (땅땅땅!)
2. 테니스 게임에서 점수를 얻는 두 가지 방법
선수와 심판이 입장을 마쳤습니다. 이제 경기를 시작해봅시다. 우선 A 선수의 공격이군요. 높게 던진 공이 A가 휘두른 라켓에 맞아 강한 '팡!' 소리와 함께 상대 코트로 넘어갑니다. B 선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공을 멋지게 받아칩니다. 공은 코트를 넘나들고, 경기는 계속 더 빨라집니다. 그렇게 랠리를 이어가던 중 A는 상대가 코트 오른쪽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 A가 상대 코트 가장 왼쪽 코너로 능숙하게 공격을 꽂아 넣습니다. B는 재빨리 달려보지만 허를 찌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B는 방어에 실패했고 따라서 A가 득점을 합니다.
이번에는 B 선수의 공격입니다. 멋진 스매시와 함께 랠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랠리가 좀처럼 끝나지 않고 장기전 양상을 띠기 시작합니다. 답답해진 B 선수는 회심의 일격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A 공격을 맞받아칩니다. 그런데 너무 무리를 하는 바람에 공이 상대 코트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심판은 아웃을 선언합니다. B는 공격 시 공을 코트 안에 넣어야 한다는 규칙을 지키지 못했고, 그 대가로 오히려 A가 득점을 합니다.
민사재판은 한 편의 테니스 게임과 같습니다. 테니스 게임의 첫 번째 규칙은 ‘공을 상대 코트 안에 넣을 것’입니다. 제 아무리 멋진 공격이라도 상대 코트 밖을 벗어나면 아웃이기 때문입니다. 민사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장에는 증명이 따라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주장이라도 입증책임을 다 하지 않으면 없는 주장만 못하죠. 한편 테니스에서 점수를 얻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상대가 내 공을 제대로 받아치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가 실수(아웃)를 하는 것입니다. 민사재판에서도 이와 비슷합니다. 상대가 내 주장을 받아치지 못하거나, 혹은자기주장에 뒤따르는 입증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내가 이깁니다.
하나씩 살펴봅시다. 테니스 게임에서든, 민사재판에서든 우선 공을 코트 안에 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 첫 번째 규칙을 민사재판에서는 ‘입증책임’이라고 합니다. 교과서에서는 입증책임을 ‘증명을 요하는 사실의 존부 여하를 확정할 수 없을 때 그 사실을 없는 것으로 취급하여 어느 한쪽 당사자에게 주는 불이익’이라고 적습니다. 어렵게 썼지만 테니스 게임과 다를 게 없습니다. 증명을 필요로 하는 어떤 사실을 주장했는데 이를 입증하지 못하면 그 사실은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는 겁니다. 공격을 해도 아웃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죠.
민사재판 당사자에게 입증책임은 적지 않은 부담입니다. 괜히 주장을 했다가 망신만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입증책임을 적절히 분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입증책임의 분배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권리관계의 발생, 변경, 소멸 등 법률효과를 주장하는 자가 입증책임을 부담합니다. 예를 들어 A가 2022. 1. 1. B로부터 X 아파트를 10억 원에 샀는데, B가 아파트를 주지 않아서 소송을 걸었다고 해봅시다. 이때 A는 실제 그러한 계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재판상 주장하고 증명해야만 합니다. 자신에게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입증에 성공한다면? A는 멋진 공격을 해낸 것이고 공은 이제 상대방 코트로 넘어갑니다. 반대로 입증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A는 입증책임에 따른 불이익, 즉 매매계약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입장에서 상대방의 아웃은 엄연한 득점 기회입니다. 그래서 테니스 선수는 심판에게 종종 비디오 판독을 요구합니다. 아웃 여부를 정확히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민사재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입증책임을 부담하고 있는 경우 나는 그의 주장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상대 주장이 아웃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상대는 자신의 입증이 충분하다고 반박할 겁니다. 공이 인(In) 또는 아웃(Out)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두 주장은 서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누가 옳은지에 대한 판단은 이제 심판(재판부)의 몫입니다.
교과서에서는 부인(否認)을 '청구원인 사실과 양립할 수 없는 별개의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적습니다. 예를 들어 앞선 사례에서 A가 B에게 X 아파트를 달라고 할 때 B가 "우리는 그런 계약을 맺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부인입니다. A의 주장과 B의 주장은 서로 양립 불가능합니다. 계약은 맺어진 사실이 있거나, 맺어진 적이 없거나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B가 부인을 하면 입증책임을 지는 A가 계약 존재 사실을 증명해야 합니다. 입증에 실패하면 계약체결 사실은 없는 것으로 취급을 받겠지요.
테니스 게임에서 점수를 얻는 또 다른 방법은 상대가 내 공격을 제대로 받아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A 선수도, B 선수도 공을 실수 없이 코트 안에 넣고 있습니다. 이 랠리에서 점수를 내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상대방의 공격은 멋지게 받아내면서 동시에 상대방은 내 공에 대응할 수 없도록 공격하는 겁니다. 이 기술은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상대방의 공격이 유효했음(즉, 아웃이 아니었음)을 내가 인정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의 공격을 받아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민사재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상대방의 주장·증명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가 승소해야 하는지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를 항변이라고 합니다.
교과서에서는 항변(抗變)을 '청구원인 주요사실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면서 이와 양립 가능한 별개의 방어 방법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적습니다. 예를 봅시다. A는 B에게 X 아파트를 달라고 소송을 걸었고 그 증거로 A와 B가 2022. 1. 1. 맺은 매매 계약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에 B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겁니다. "내가 A와 매매계약을 맺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A는 매매 대금 10억 원을 주지 않았습니다. A가 돈을 주기 전까지는 아파트를 건네줄 수 없습니다." B는 A와 매매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A와 B의 주장은 서로 양립 가능합니다. 하지만 A는 아파트를 가져갈 수 없습니다. 권리 행사에 장애가 되는 사실, 즉 A가 돈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B가 A의 공격을 멋지게 되받아친 셈입니다.
테니스 게임에서 두 선수가 공을 주고받듯이 민사재판에서도 항변 랠리가 이어지기도 합니다. 한쪽 당사자의 항변에 대해 상대방이 한번 더 항변하는 것을 재항변이라고 합니다. 물론 재항변에 대해 또 항변으로 맞받아칠 수도 있죠. 이는 재재항변이라고 합니다. 이론상 앞에 계속 ‘재-’를 붙여 무한히 이어지는 항변 랠리를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실무에서는 재재항변은커녕 재항변도 아주 많지 않습니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실무에서는 부인과 입증책임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새길 수 있겠군요.) 하지만 항변은 민사사건을 구조화하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개념이므로 꼭 기억해두어야겠습니다.*
(* 부인과 항변을 문장 형태로 비교하여 기억하기도 합니다. 부인이란 쉽게 말해, "아닙니다. 틀렸습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항변이란 쉽게 말해, "맞습니다. 하지만"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