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2022. 1. 1. B로부터 X아파트를 10억 원에 매수했다.'
관계란 참 흥미롭습니다. 하나의 관계도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름표를 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대학 선후배 사이로 만났다가 연인으로 발전한 두 사람을 떠올려봅시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표는 남자친구·여자친구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남자·여자, 선배·후배 같은 이름표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민사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하나의 사건인데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름표를 붙일 수 있죠. 제1장에서 살펴본 A와 B의 아파트 매매를 예로 봅시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이 관계에는 ① 의사표시의 합치, ② 법률행위, ③ 채권·채무 관계, ④ 계약 관계, ⑤ 쌍무계약 ⑥ 매매계약 같은 이름표를 붙일 수 있습니다.
혹시 인스타그램(instagram)이라는 소셜 미디어에 대해 알고 있나요? 인스타그램에서는 해시태그가 곧 게시물의 이름표입니다. 하나의 사진에도 여러 개의 해시태그를 붙일 수도 있고, 어떤 해시태그를 붙이느냐에 따라 비슷해 보이는 사진이 전혀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죠. 예를 들어 제주도 백사장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 #서귀포 #백사장 #천연기념물 #자연보호 같은 해시태그가 달린 경우와, #제주도 #데이트 # 맛집 #럽스타그램 같은 해시태그가 달린 경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민사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사건을 어느 관점으로 끌고 가느냐에 따라 검토할 내용이 달라지고 심지어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민사사건을 검토할 때에는 사건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해시태그’를 찾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해시태그 비유는 무척 유용하므로 앞으로도 계속 사용하겠습니다. 해시태그는 주어진 사건을 구성하는 다양한 층위 중에서 이번에 주목하고자 하는 그 특정 층위, 그 이름표를 상징합니다. 해시태그를 볼 때마다 ‘이 사건은 다른 층위에서도 검토를 할 수 있겠구나. 그러나 이번에는 이 층위에 한정 지어서 검토를 하겠다는 거군.’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좋은 도구를 하나 마련했으니 해시태그 비유를 우리 사례에 바로 적용해봅시다. 우리는 A와 B 사이 아파트 거래에 #의사표시 #법률행위 #채권·채무 #계약 #쌍무계약 #매매계약 같은 해시태그를 달 수 있겠습니다.
민법에는 조건문 형태의 문장이 많습니다. 마치 한 줄의 수학 공식과 같습니다. '어떤 조건을 만족하면 어떤 효과가 발생한다.'는 식입니다. 수학 공식처럼 적는다면 「X + Y → Z 」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여기서 조건에 해당하는 X, Y를 어려운 표현으로 법률요건이라 하고, 결론에 해당하는 Z는 법률효과라고 합니다. 조문에서 요구하는 법률요건을 모두 갖추면 그에 따른 법률효과가 발생합니다. 예를 몇 개 봅시다.
ex1. 제110조(사기,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 ①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
=> 의사표시 + 사기나 강박에 의한 → 취소 가능
ex2. 제103조(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
=> 법률행위 +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하는 → 무효
민법 공부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법률효과에 더 집중하곤 합니다. 아마 법률효과가 펀치라인 같은 느낌을 주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법률요건이 더 중요합니다. 규정된 법률요건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모자라면 법률효과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편 법률요건을 기반으로 사고하는 것이 활용력 측면에서도 더 우월합니다.
ex3. 제109조(착오로 인한 의사표시) ① 의사표시는 법률행위의 내용의 중요부분에 착오가 있는 때에는 취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착오가 표의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때에는 취소하지 못한다.
=> 의사표시 + 착오에 의한 → 취소 가능
ex4. 제104조(불공정한 법률행위) 당사자의 궁박, 경솔 또는 무경험으로 인하여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
=> 법률행위 +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 무효
몇 마디만 바뀌었는데 완전히 새로운 민법 조문이 탄생한 것이 보이시나요. 민법 제109조와 제110조는 모두 #의사표시라는 법률요건을 갖고 있습니다만, 전자는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이고, 후자는 “착오에 의한” 의사표시입니다. 내용이 대체로 닮아있는데 약간 차이를 주어서 제109조와 제110조라는 두 조문으로 탄생한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민법 제103조와 제104조는 또 어떻습니까? 두 조문은 모두 #법률행위라는 법률요건을 갖고 있으나, 전자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하는” 법률행위이고, 후자는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법률행위입니다. 역시 약간 차이를 주어서 다른 두 조문으로 만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공부할 여섯 단어(①의사표시, ②법률행위, ③채권·채무, ④계약, ⑤쌍무계약 ⑥매매)는 민법 공부에 가장 기초가 되는 단어입니다. 또한 가장 자주 활용되는 법률요건이기도 합니다. 방금 앞에서 본 것처럼, #의사표시라는 법률요건에 다른 법률요건을 추가하여 새로운 법률효과를 만들어 내는 식이죠. 이번 장의 첫 번째 목표는 각 단어의 뜻을 숙지하는 것이지만, 각 단어가 법률요건으로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면서 읽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