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의 그리움

좋은 걸 보고 느끼며 문득 함께 나누고 싶었다.

by 안드레아
이 글은 '바다에 지는 별' 작가님과 함께 하는 릴레이 소설입니다. 여자와 남자가 바라보는 조금은 때론 지나치게 다른 관점을 소설의 틀을 빌어 표현하고자 노력 중입니다. 부족한 점이 있지만 따뜻한 응원 부탁드립니다. 소설이 진행되는 방향에 대해서도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시면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직은 정말 삽시간에 진행되었다. 10여 년 동안 거래했던 일본 공급처의 사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일본 땅에 도착했다. 평소 전 회사에 원료를 공급해 주던 이 회사는 규모는 작지만 안정적인 판매처를 확보하고 있고 무엇보다 서울이나 동경 같은 대도시가 아닌 사뭇 한적한 중소도시에 위치하고 있어 출장을 갈 때마다 힐링하러 간 기분이 들던 곳이었다.


오랜 시간 거래를 이어오며 마음속에 작은 바람이 있었다. 이런 작은 회사에서 대기업에서와 같은 무조건적인 매출과 이익의 압박을 받지 않고 소박하게 일하며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막상 이직을 논하기엔 두 회사의 조건 차이가 너무나 클 것 같아 생각만 있을 뿐 실제로 입밖에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임시 거처를 회사 근처 자그마한 비즈니스호텔로 정하고 일주일이 흘렀다. 출장으로 자주 온 곳이긴 했지만 막상 살러 온 이곳의 느낌은 뭔가 다르게 다가왔다. 출장의 짧은 일정으로 잠시 잠깐 들러 보던 와카마츠의 경 자체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정착을 위해 이곳에 온 이후 전에는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이 지방도시의 오밀조밀함과 깨알 같은 즐거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출퇴근길이 서울에서의 일상처럼 콩나물시루 미어터지는 버스나 지하철이 아니었기에 여유가 생겨났다. 직접 운전하며 다니는 길은 차들이 많지 않아 드라이브하는 기분마저 들게 했고,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설렘 가득한 슬라이드쇼의 연속이었다. 가슴 뻥 뚫리는 푸른 바다와 초록빛 논과 밭, 드문드문 길가로 이어지는 일본 전통 가옥들, 손으로 잘 다듬어지고 가꾸어지고 있음을 알게 하는 나무숲 가득한 공원 등등.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자연의 얼굴 하나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어제는 회사로 출근하며 도로가 뻥 뚫린 다리를 하나 지나다가 차를 세웠다.

- 왜냐구?

- 하늘이 너무 멋져서.

살짝 비가 내린 뒤 거치지 않은 먹구름과 푸르디 맑은 하늘빛이 어우러진 장관이 머리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서울에 살면서는 여간 해서 보지 못했던 하늘을 이곳에서는 자꾸만 올려다보게 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내가 문득 그리고 종종 하늘을 향해 자연스레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지만 스스로 담아낸 그 풍경에 감탄하며 그 순간을 감사했다.


또한 점심을 먹고 주변 동네를 산책하는 버릇까지 들었다. 예전에 일본 만화를 보고 대체 이런 집들은 어디 가야 볼 수 있는 건가 생각했던 – 마치 도라에몽이 툭 튀어나올 것 같은 – 그 집들이 바로 이곳에서는 참 흔하게도 보임에 살짝 감동했다. 점심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줄을 서지 않고도 금세 먹을 수 있는 우엉우동이며, 나가사키 짬뽕, 일본식 도시락 등을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먹고 그냥 그 식당 주변을 한 바퀴 휘 도는 것이다.


어느 순간 자연스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이런 좋은 걸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떠오르는 얼굴.

아버지, 어머니 생각도 났지만 친한 친구들보다 먼저 떠오르는 얼굴.

글 쓰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만났던 한 여인.

이직을 결정하며 가장 마음에 걸렸던 한 사람.


바로 멜리사였다.


사실 몇 번의 모임에서 여럿이 같이 만났고 개인적으로 영화를 한 번 보고 식사를 한 번 한 것이 전부였던 인연. 조용한 듯하면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가진 매력적인 여자. 술이 들어가자 거침없는 제스처로 나를 작아지게 만들던 사람.


처음엔 그녀가 그저 30대 초반쯤의 미혼 아가씨인 줄로만 알았다. 그냥 척 보기에도 젊고 싱그러운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는 매력적인 여성이었고 누구도 내게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귀띔 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호감이 갔고 모임에서 한 마디라도 그녀와 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애썼다. 다행히 자리를 이동하다가 그녀 옆에 앉을 기회가 되었는데 그땐 그녀가 이미 어느 정도 취기가 들어간 상태였던 것 같았다.


서로 간단히 호구조사를 마치고 대화의 주제가 최근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음악으로 옮아갔고 모임의 다른 회원들의 글 쓰는 스타일에 대해 – 실은 그들의 성격에 대해 혹은 우리의 그들에 대한 호불호에 대해 – 이런저런 뒷담화도 나누기에 이르렀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너무나 죽이 잘 맞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녀의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여성적 매력이 넘치는 여자가 점점 더 내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 자리에는 다른 남녀 회원들도 많이 있었는데 둘 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만일 나도 비슷하게 술이 들어갔더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술이 약한 나는 정신이 멀쩡했고 그녀의 행동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아름다운 여성이 다가오는 게 뭐가 문제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상황이 그런 게 아니었다. 둘 사이가 이성으로서의 교제라는 전제도 없는 상태에서 분위기에 끌려 그렇게 되는 것이 많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술기운이 가신 후 과연 그녀가 이렇게 행동했다는 걸 제대로 기억이나 할까 라는 의구심도 들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그녀가 진정 외로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그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에서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그날 멜리사가 내게 보인 행동은 오해하기 딱 좋은 것이었으나 그런 식으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보다 진실된 마음으로 그녀를 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예견된 걱정이 현실이 된 것일까. 그날 이후 멜리사는 온라인 공간에서 마주쳐도 왠지 찬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글에도 자주 들어갔고 댓글로 더 자주 남겼다. 혹은 그녀가 다른 이의 글에 댓글을 남긴 걸 보고 말을 붙일 요량으로 이어서 댓글을 달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꼭 필요한 답변으로 간단히 이야기를 끝내거나 드라이한 말투로 나와 엮이는 걸 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에 그녀와 무언가 실질적인 진척을 일구어 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날 모임의 술자리 이후 그녀의 태도는 돌변한 듯 느껴졌다. 관심이 있는 이성에게 결코 자신 없이 구는 편이 아니었으나 이렇듯 다른 모습의 그녀를 느끼자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그렇게 차일피일 시간은 흐르고 마지막으로 모임에 나갔으나 그곳에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와 평소 가까이 지내는 지인들은 몇몇 보였고 그들과 자연스레 이직 이야기를 하며 슬쩍 멜리사의 연락처를 캐어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연락을 해서 만나고 싶었지만 어떤 구실을 대야 자연스럽게 불러낼 수 있을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더구나 퇴사와 더불어 해외 이직을 진행해야 했기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고 관공서를 들락날락거리다 보니 이미 출국 날짜가 다가왔던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큐슈로 건너온 후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고심 끝에 멜리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먹고 설렘 가득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더더욱 생각나고 함께 하고픈 그녀에 보내는 것이었다. 내용은 지난번 술자리 모임에서 내가 혹시 그녀를 무안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기분 나쁘게 하지 않았는지 물어보며 한국에 들어갈 때 식사를 한 번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내 딴에는 문자를 썼다 지웠다를 수없이 반복하며 어렵사리 보낸 것이다.


제발. 제발. 문자를 보내고 난 후 나는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내 안부에 즐겁게 회답해 주기를. 오랜만이라고 인사해 주기를. 한국에 오느냐고 그럼 같이 식사하자고 반겨주기를. 호감 가득한 웃는 표정의 기호를 보내주기를. 부디 냉랭한 느낌의 드라이한 답신이 오지 않기를. 부디 나를 밀어내지 않기를.


한 시간 남짓 오만 생각을 다하며 기다리는 중에 문자가 띠링 울린다. 가슴 졸이며 기다렸던 그녀의 회신 문자였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가 기분이 별로였을 거 알고 계셨다니 다행이란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문자 주시고 사과하셨으니 괜찮아요. 잘 지내시고요. 건강하세요. "


역시나 그녀는 나의 식사 제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게다가 이 말투로 미루어 추측하건대 나와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는 뉘앙스마저 풍기고 있었다.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매듭을 다시 풀고 제대로 지어 나가야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