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Z의 절친 일본인 친구 K. Akira
자동차로 키타큐슈에서 도쿄까지 출장을 간다구?
손님들이 우리 회사의 카와사키 야드와 난코 야드를 보러 출장을 오기로 했단다. 카와사키는 도쿄 옆에 있고, 난코 야드는 오사카 남쪽에 위치해 있다. 우리와의 도쿄/카와사키 일정을 마치고 손님들은 나고야에서 우리가 아닌 다른 공급처와 미팅이 잡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오사카를 가기 전에 나고야에 들러 별도로 우리 거래처와 미팅을 잡았다.
그러니까 우리의 출장 동선은 이렇게 되었다.
일본 서쪽 큐슈섬 북단 키타큐슈에서 출발 - 일본 동쪽 관동지역 도쿄와 카와사키로 이동 - 왼쪽으로 이동하여 나고야 - 더 왼쪽으로 이동하여 오사카 - 다시 왼쪽으로 이동하여 키타큐슈로 복귀
평소 같으면 당연히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40~50분 정도를 날아 도쿄까지 갔을 것이다. 그리고 신칸센 고속열차를 타고 왼쪽으로 돌아오면서 나고야/ 오사카를 경유하여 키타큐슈로 돌아왔을 터이다.
아, 그런데 사장님의 지시로 교통편이 전격 자동차로 정해졌다. 세 분의 손님들을 편하게 모시기 위해 회사의 의전 차량을 몰고 가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키타큐슈에서 오사카까지 자동차를 태워가는 저녁 배편을 이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후배 Z와 함께 이리저리 궁리해 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배에서 밤을 지새운 상태로 오사카에서 도착하여 끌고 간 차로 다시 도쿄까지 500여 km를 달려야 하니 손님을 만나기 전에 넉다운이 되어 있을 것 같아 배편은 포기했다.
우리가 다시 생각해 낸 방편은 밤을 새워 가는 저녁 배편이 아니라 하루 전 새벽부터 키타큐슈에서 도쿄까지 최대한 빨리 달려 도쿄에서 편하게 하루를 묵고 다음날 손님을 맞이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일본에서 동일본에 이르는 자동차 루트가 무려 1,100km에 달했다.
왕복으로 계산하면 2,200km에 달하고, 중간에 각 도시에서 공항과 공장 및 야드를 오가는 거리까지 포함하면 도합 2,500km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거리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대략 450km, 왕복 900km 정도이니 어림 잡아도 두 배가 넘는 거리인 셈이었다. 우리나라가 통일이 된다면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의 거리가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잠시 통일이 된 우리나라를 자동차로 종단해 보는 꿈을 그려 보기도 했다. 죽기 전에 언젠가는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아닌가 되뇌면서...
후배와 나는 우리 회사에서 둘 뿐인 한국인 직원이다. 3년 전에 내가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 합류한 후 후배 역시 많은 사연을 뒤로한 채 우리 회사에 조인하게 되었다. 혼자서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낯선 문화와 환경을 가진 일본 회사에서 2년여를 보내다가 우리말을 쓰는 우리나라 사람과 한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 다른 각자의 이유들이 있었지만 상당 부분 고민의 이유가 겹쳐 있던 우리는 금세 가깝고 소중한 동료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누구도 앞날을 알 수 없지만 적지 않은 시간을 서로에게 의지하며 일본에서의 생활을 함께 할 동반자가 될 것임을 예감했다.
그런 후배와 4박 5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자동차로 함께 움직이며 출장 일정을 갖게 되어 무척 들뜨고 기쁜 마음이 앞섰다. 평생 한 번도 이렇게 긴 거리를 자동차로 달려본 적이 없는 둘은 한편으론 체력적인 부담이 될 수 있겠다 여기면서도 까짓 거 한 번 해보자는 도전의식 비슷한 느낌도 들었다. 혼자였다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 이 어마어마한 계획이 둘이었기 때문에 실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신이 나기까지 한 기분 좋은 가벼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ᅠ
키타큐슈에서 오사카까지 550km를 6시간에 주파!
그러나 오사카에서 도쿄까지 비슷한 거리를 10시간이나?
처음엔 네 명이서 출발했다. 오사카 지사에서 내릴 두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새벽 4시 반에 한 사람이 나머지 셋을 픽업하여 대략 5시 15분이 되어 본격적인 출발을 해서 오사카에 도착하니 오전 11시를 좀 넘겼던 것 같다. 돌아올 때는 오사카에서 오전 9시 15분경 출발해서 키타큐슈에 오후 4시 40분 정도 도착했으니 확실히 새벽에 출발한 것이 1시간 반 정도 단축된 것 같다.
오사카에서 동료 둘을 떨궈 주고 일본 횡단 자동차 여행이 처음인 이방인 둘이서 핸들을 번갈아 잡으며 도쿄를 향해 지금까지 온 거리만큼을 다시 달렸다. 평소 작은 승용차를 몰고 다니던 우리는 배기량 5,700CC의 탱크와 같은 8인용 SUV를 몰로 차선을 가득 메운 상태로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이렇게 큰 차를 몰 기회가 없었던 우리는 제법 긴장한 채 운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선도로를 달리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지만 도심에서 차선을 바꿀 때나 골목길을 돌아다닐 때 그리고 주차를 할 때는 옆 차나 구조물에 닿을까 노심초사였다.
우리는 번갈아가며 작은 접촉사고를 낼 뻔했다. 먼저 후배가 휴게소로 들어설 때 사람이 지나가 속도를 줄인다고 줄였는데 가속도가 붙은 이 무거운 차는 멈추려고 하지 않는 거였다. 평소 몰던 차였다면 벌써 멈췄어야 할 지점에서도 차가 앞으로 밀려가는 느낌에 적잖이 당황했던 것이다. 나는 오사카 시내에서 주차장으로부터 도로로 나오는 부분에 횡단보도가 있었는데, 그곳을 빠져나가다가 사람을 칠 뻔했다.
"부장님, 옆에 사람! 옆에 사람! "
"어디? 어디? 안 보여?"
그랬다. 오른쪽 대각선 방향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차의 앞창과 오른쪽 창 사이 프레임에 가려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후배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멈췄어야 하는데 사람이 보이질 않아 슬금슬금 차를 도로로 빼다가 자칫하면 사람과 부딪힐 뻔했다. 걸어오던 여인이 황당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고 지나갔다. 순간 최선을 다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다른 한편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소 어설픈 운전자 둘은 긴장하며 열심히 달려 도쿄 시내로 입성하기에 이르렀다. 정오경에 오사카를 출발하여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 주변에서의 교통 체증을 익히 경험했던 터지만 도쿄로 들어서는 고속도로의 사정은 서울 수도권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결코 낫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지독했다.
전날 1,100km를 탱크와 같은 차를 몰고 질주하며 늦은 밤 도쿄에 입성하여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들은 시내에서 더 가까운 하네다 공항으로 들어왔다. 뒤에 생긴 나리타 공항이 우리의 인천 공항과 비슷한 성격이라면, 하네다 공항은 우리로 치면 김포공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오히려 김포공항보다 시내 접근성이 더 좋았다.
손님들과 함께 우리 회사 야드 견학을 마치고 저녁을 먹기 전에 롯폰기 시내의 한 타워에 올라 초저녁 시내 전경을 감상했다. 남산 타워를 올랐을 때처럼 대도시의 야경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게 느껴졌지만, 디테일한 부분과 분위기는 역시 달랐다. 멋진 야경을 찍기 위해 관광객들은 저마다 카메라 셔터를 터트리고 있었다.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 유리를 사이에 두고 찍으니 유리에 비친 실내 모습이 함께 들어와 아쉬웠다. 사진에 조예가 있는 후배 Z가 조금 불편하지만 위치를 잘 잡아서 유리에 카메라를 바싹 붙여서 찍으면 유리에 반사된 물체의 모습이 없어질 거라고 했다. 그 말대로 360도로 펼쳐진 도쿄 야경을 둘러보며 유리에 대고 찍어 보니 확실히 사진 안에 불필요한 반사 물체가 들어오지 않았다.
각자의 일터에서 매일매일 전쟁을 치르다 온 사람들은 일로 온 것이지만 간만의 나들이에 행복한 표정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것 같았다. 기온은 여전히 섭씨 35도를 넘나들며 후텁지근한 공기가 위력을 행사했지만, 이것도 일행의 들뜬 기분을 크게 반감시키지는 못하는 듯했다.
후배 Z가 미리 예약을 해서 찾아간 식당은 반지하에 위치해 있었지만 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 테이블 서빙을 맡은 아가씨의 태도가 인상에 남았다. 시종 웃는 얼굴에 음식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를 달아 주며 적극적인 모습으로 일했다.
중간에 후배가 그 종업원과 상의해 술 하나를 주문했다. 후배가 의미심장한 말투로 그 술의 이름의 무엇인지 알아맞혀 보라고 했다.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체 무슨 이름일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술의 이름은,
후배가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며 손님 가운데 최연장자께 말했다.
"틀림없이 이 술을 좋아하실 겁니다.
이 술의 이름은 미소년이구요.
술을 마시면 미소년이 된답니다! 아하하하!"
우리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큰 웃음을 터트렸고, 분위기는 한층 더 고조되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나는 생맥주 한 잔을 마시다가 이 술맛이 궁금해서 한 잔 받았다. 정말 그 술이 우리를 미소년으로 만들어줄 리 만무하겠지마는 그 시간만큼은 한 잔 술에 취해 미소년인 척 너스레를 떨어 보고 마음만은 정말 어린아이 같이 즐거워하고 기뻐했다.
후배 Z의 일본인 절친 칸짱을 소개받다!
이번 출장은 물론 우리나라에서 오신 손님들을 모시고 야드를 견학하며 일을 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또 다른 큰 소득이 있었다. 바로 일본인 친구 하나를 만든 것이다.
이 친구는 후배 Z가 전 회사에서 오사카로 파견근무를 나와 있을 때 알게 된 사람이다. 처음엔 양쪽 집안의 동갑내기 딸들이 친구로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레 엄마들끼리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한다. 그러다가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후배가 그 일본 식구를 집으로 초대해서 직접 만든 요리와 엄선한 포도주로 극진히 대접을 했다고 한다. 집에서 만나는 첫날부터 두 집은 죽이 잘 맞았고 일본 친구는 후배의 요리가 입에 맞았는지 차려낸 음식을 모조리 맛있게 먹고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다 돌아갔다는 것이다.
나이는 일본인 친구 칸짱(K. 아키라)이 후배보다 일곱 살이나 연상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나이주의'가 심하지 않은 곳이고 칸짱 자체가 워낙 개방적이고 비 권위적인 성품이라 둘은 점점 더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가족끼리 아이들부터 엄마, 아빠까지 모두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오사카의 습하고 무더운 공기를 헤치고 칸짱이 기다리던 고깃집으로 향했다. 후배는 감회에 젖는 표정이었다. 몇 년 전 오사카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우리나라 본사로 돌아갈 때 언제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 기약 없는 떠남에 서글펐다 한다. 아니나 다를까 수많은 서열과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매일 과중한 업무로 빡빡한 본사의 생활은 수백 번 수천 번이고 이곳에서의 추억을 곱씹게 만들었던 것 같다.
15분 정도 걸어서 골목골목 찾아든 곳. 무더운 날이었지만 일본 친구 칸짱은 에어컨이 시원하게 돌아가는 식당 안이 아니라 후텁지근한 바깥에서 그리운 친구, 후배 Z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눈에도 둘의 재회는 기쁨 그 자체였다. 그리고 후배가 데려온 초면의 나 역시 그 따사롭고 진심 가득한 환대를 덤으로 받을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우정의 아름다움을 오감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생맥주가 주문되고 그 레스토랑의 인기 메뉴인 닭 목살이 지글지글 돌판 위에 구워지고 있었다. 후배와 칸짱은 일본에서의 재회를 연신 감격으로 표현해 냈고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칸짱이 말했다. 후배 Z가 자기에게 어떤 친구인지에 대해서.
" 저는 친구가 많지 않습니다. Z는 저에게 아주 특별한 친구입니다.
어쩌면 이 친구가 저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의 유일한 친구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리고 만일 불행한 일이겠지만, 이 친구가 나를 속이는 순간이 오더라도
저는 이 친구를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틀림없이 거기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겠죠. "
그 순간 후배와 칸짱이 그렇게 멋지고 부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국적도 다르고 나이 차이도 제법 나는 이 두 남자. 정말 어떻게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칸짱은 회사에서 영업 관련 일을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창업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분야의 일인데 주택 앞에 들어가는 명패를 디자인 제작하는 사업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도 아파트에서는 이미 찾아보기 힘들지만 독립 가옥일 경우넨 아직도 돌이나 나무로 된 명패를 볼 수가 있지만 이런 사업이 과연 얼마나 수익성이 있을지는 감이 오지 않는다.
칸짱의 회사에서 만드는 명패는 디자인도 재질도 아주 다양한 듯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보지 못했던 스테인리스 재질이나 합금 소재도 종종 사용한다고 했다. 주문을 받을 때 실제 답사를 하기도 하지만 원거리의 경우 주택의 전경을 담은 사진들을 받아서 그 집과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소재와 디자인으로 제작한다고 했다.
사장인 칸짱이 직접 디자인을 한다길래 혹시 원래 전공이 그쪽이냐고 물었더니 전혀 다르다는 답변이 왔다. 디자인하면 왠지 전문가적인 소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인 것 같은데 애초에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그 일로 창업까지 해서 사업을 키워간다는 것이 나로서는 참 신기하고 대단한 일로 여겨졌다.
최근에는 건설업체와 함께 공동 프로젝트를 하게 되어 집이 지어지는 단계에서부터 칸짱의 회사 명패가 기획되는 발전을 이루었다고 한다. 개별 제작 판매하여 사업을 하는 것만도 샐러리맨인 내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일로 보였는데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 단계에서부터 같이 들어가는 수준에 다다랐다니 이거 정말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칸짱의 꿈과 Image 철학!
이 친구는 처음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마치 오랜 친구인 것처럼 푸근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회사의 ceo인 데다가, 후배와 내가 네 살 차이이고 칸짱이 나보다 세 살 위라고 들어서 만나기 전에는 배가 조금 나온 아저씨의 모습을 떠올린 채 만났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마주한 그는 상당히 젊은 패션 감각에 주름도 없는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후배와의 인연과 추억을 안주 삼아 듣다가 차차 칸짱의 삶에 대한 인식과 태도 그리고 꿈을 이루어가는 그만의 노하우 같은 이야기들까지 접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인상 깊었던 것이 칸짱의 '이미지론'이었다.
상당히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자기는 어떤 꿈이 생기거나 어떤 이루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것이 잘 되었을 때의 이미지를 떠올린다고 했다. 이 말을 할 때 그는 두 손으로 자기 양쪽 관자놀이를 짚으며 눈은 천장을 향해 있었다.
언제나 원하는 모습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끊임없이 머리와 가슴속에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미 그는 이런 방법으로 지금까지의 삶과 자신의 사업을 충분히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런 방식의 이야기는 수많은 성공학 서적에서 다뤄졌던 것이지만 책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삶에서 적용시키고 결과를 얻었고 지금도 얻고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에게서 듣는 이야기는 또 차원이 달랐다.
친절하고 순하게 보이는 그에게서 새로운 일면을 보게 되었다. 표현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나 역시 살아오면서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매사와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는 편이어서 칸짱이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관념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이야기로 다가왔다.
3년이 지나가고 있다. 중국에 이어 일본에서 닻을 내리고 항해를 시작한 지. 그리고 이날 또 한 명의 소중한 친구를 얻었다. 후배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다. 세 사람은 흐뭇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술잔을 기울이며 무더운 오사카의 여름밤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앞으로 일본에서 더 오래 살면서 차로 이 긴 거리를 횡단할 기회가 또 생길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에 맞는 사람과 닷새나 되는 시간을 밤낮으로 함께 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절친까지 만나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된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잊히지 않고 남을 것 같다.
여름의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한다.
잘 가시게. 자네도 고생 많았네.